118화. 부부 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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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부부 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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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부부 흉내
2023.04.17.
그 당당한 투기 이야기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도 보였다면 분위기라도 탔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 하나 말려버릴 살벌한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니 이쪽도 쑥스럽기는커녕 어이가 없었다.
“왜 그리 놀라시는지요?”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자니 제자가 오히려 차분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냥 좀. 얼떨떨해서요.”
“무엇이 얼떨떨합니까.”
네가 투기 중이라고 말한 게 얼떨떨하지.
제자는 사람 마음에 커다란 돌을 던져 놓고 자기는 태연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수업하지요.”
* * *
수업하는 내내 나는 제자를 기웃거렸다.
그러나 제자는 책에 시선을 내리고서 오늘은 고개를 아예 들지조차 않았다. 그러다 수업이 거의 끝날 즈음. 나는 그가 일부러 투기 이야기를 꺼냈단 걸 알아차렸다.
‘날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거야. 그 말을 들으면 내가 심란해할 테니까.’
이런 걸 미남계라고 하는 거지?
경계하자. 시기가 좋지 않아. 평소에 농담할 때 나온 말이어도 심상치가 않은데, 그 말이 튀어나온 시기가 제자가 청양과 서점 건으로 나를 아주 의심하게 된 뒤잖아.
단호하게 마음을 다잡은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책을 서랍 안에 집어넣고 책상 앞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전하.”
그러고서 꾸벅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제자는 그놈의 미남계를 계속 이어가려고 그러나. 오래간만에 따라 일어났다.
“같이 가지요.”
“전하도 나가세요?”
“간만에 스승님과 걷는 것도 좋겠지요.”
제자는 편안해 보이는 웃옷을 걸쳐 입고서 먼저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나란히 월무궁과 이어진 좁은 길을 걸어갔다.
제자는 딱 산책만 할 생각인지 입을 전혀 열지 않았다. 제자가 침묵하니 나 역시 말없이 걸어가기만 했다.
혹시라도 그도 내 생일 이야기를 꺼내려나 싶었으나 제자는 생일의 생 자도 꺼내지 않았다.
대화원 끄트머리와 이어진 길목에 도달하자 제자는 그제야 멈추어 섰다.
“아쉽지만 돌아갈 시간이군요.”
“바래다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앞으로 부황을 보러 갈 땐 제자와 함께 간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나는 입을 벌리고 어물거렸다. 제자는 대답을 추궁하는 대신 가야 할 길을 손으로 가리키기만 했다.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서 나오는 길에 심장이 요란하게도 뛰었다.
* * *
평화로운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어느새 나는 생일을 맞이했고 내 생일은 별다른 잔치 없이 가볍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래도 되겠니?”
어머니는 걱정했지만 생일잔치를 없애자는 건 내 제안이었다.
“모르는 사람은 아직 모르지만 아는 사람은 이제 제가 여인이란 걸 알잖아요. 그 사실을 신경 쓰는 사람들이 잔치에 와서 음식은 안 보고 저를 기웃거리고 있으면 잔치 분위기가 전혀 아닐 거예요.”
내 설명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수도 있지.”
“퇴궐하고 오면 가족끼리 식사나 해요.”
“그래. 그러자.”
오늘도 수업이 있는 날이어서 나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한 뒤 월무궁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월무궁 안에 도착해 보니 웬일. 황제의 측근 태감인 송 태감이 제자와 대화 중이었다.
“요 이국사 오셨군요! 안 그래도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평소 송 태감이 날 데려갈 때는 월무궁 길목에 서서 기다린다. 하지만 오늘 송 태감은 월무궁 안까지 들어와 제자와 대화 중이었다. 무슨 일이지?
나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들어가다가 문을 잡고 멈춰 섰다.
“송 공공? 무슨 일인가?”
내 질문에 송 태감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폐하께서 요 이국사와 13황자 전하께 함께 식사하자고 초대하셨지요.”
“식사라니?”
“폐하께서 오늘 ‘식구’들을 모두 부르셨거든요.”
식구? 식구? 나는 제자를 쳐다보았다. 너는 아는 이야기였어?
제자는 고개를 아주 살짝 가로저었다.
“저도 방금 들었습니다, 스승님.”
“이따가 점심 식사를 할 즈음에 두 분이 함께 오시면 됩니다.”
송 태감은 그 말만 전하고서 쑥 물러났다.
그가 가자마자 나는 서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전하. 정말 몰랐던 일이 맞으시지요?”
“당연합니다. 알았다면 진작에 말씀드리고 취소하려 했을 겁니다.”
취소했을 거라니 신뢰가 아주 약간 가긴 하지만…….
어쨌든 황제가 부른 시각이 오늘 점심이기에 나가서 준비를 하고 뭐고 할 시간도 없었다.
나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제자에게 서책을 설명해 주었고, 제자는 여기저기 방 안을 돌아다니면서 내 설명을 들었다.
그러다가 설명이 잠시 멈추었을 즈음. 제자는 곁방으로 들어갔다.
‘왜 갔지?’
의아해서 기다리고 있자니 제자는 하늘하늘한 녹색 옷을 들고 나타났다, 사내 옷이 아니라 여인의 옷이었다.
‘자기가 입으려고 들고 나온 건 아닐 거고…….’
제자가 여인에게 옷을 전할 일이 있나? 의아해하고 있자니, 제자는 뜻밖에도 옷을 내 책상 옆에 펼쳐 놓았다.
“이게 뭐예요?”
“옷입니다.”
“옷인 건 아는데, 왜 이걸 여기에 두시는지……”
“아까 송 태감이 와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부황께서 ‘식구’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렀다고요. 초대받아 온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닐 겁니다. 후궁들이 올지도 모르고, 황친들이 올지도 모르지요.”
제자의 시선이 내 옷에 닿았다.
“지금 옷도 어울리십니다. 하지만 사내 복장을 하고 들어서면 시선이 집중될 겁니다. 이 옷을 입고 가시지요.”
어느 쪽이 더 시선을 집중시킬지는 모르겠지만 얼핏 듣기엔 맞는 말 같았다.
”그럴게요.“
왜 제자가 여인의 의복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 척하자.
어쨌든 옷을 갈아입고 나니, 제자 역시도 녹색 새 옷을 입고 문 앞에 단정히 서 있었다.
”가지요.“
우리는 같이 월무궁으로 나가 집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 있으려니, 어느 문 앞에 서 있던 태감이 얼른 다가와 알려주었다.
“이쪽입니다. 여기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안 그래도 그 방 주위로만 궁인들이 여럿 모여 있어서 그 방이 아닐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태감이 문을 열어주어서 나와 제자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여럿 와 있었는데, 다행히 황제는 없었다. 황후도 없었고.
모인 이들은 거의 다 황녀와 황자, 그들의 정혼자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후궁들도 보였다.
‘아니, 가족 식사 개념이 너무 넓은 거 아니에요?’
”저쪽으로 가지요.“
여기저기에 동시에 인사를 올리고 나자 제자가 끄트머리에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그는 열셋째이니 나이순으로 치면 구석 자리에 앉는 게 맞았다.
우리는 얼른 그쪽에 앉았다. 방 안으로 안내해 준 태감은 다시 방 밖으로 나갔고, 이번에는 다른 태감이 다가와 나와 제자의 앞에 물잔을 내려놓고 갔다.
얼마나 그렇게 기다렸을까.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의 방문을 알리는 송 태감의 목소리가 울렸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다 일어났다.
황제는 도로 앉으라 손짓하고는 가장 상석으로 걸어가 앉았다. 황제와 함께 온 황후 역시 그 옆자리에 앉았다.
적당히 모두가 모였다 싶은지, 자리에 앉은 황제는 모인 이들을 한 번 둘러본 다음 입을 열었다.
“몇몇엔 미리 이야기했지만, 며칠 뒤면 태월에서 사절이 오게 된다. 보문 공주 사건을 해결하러 오는 것이지.”
“…….”
“그 사절에게는 저쪽 열셋째 옆에 앉은 이국사가 이미 황자비라고 말해두었다. 해서 짐은 두 사람에게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처럼 보이게 하라 지시했지. 그 연습을 하고자 오늘 이렇게 ‘식구’들을 불러낸 것이다.”
황제가 왜 다 불러서 식사하는 건지 아무에게도 목적을 이야기하지 않았나 보네. 이야기를 들은 ‘식구’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괴이해졌다.
“자연스럽게 식사해보라.”
황제가 지시하자 양쪽 두 문이 활짝 열리고 안으로 궁녀들이 음식을 운반해오기 시작했다.
후궁과 황족들은 음식이 차려지는 동안 내 쪽을 계속해서 힐긋거렸다.
나는 그 시선들을 흘려보내면서 음식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절 앞에서 부부나 다름없이 굴란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시킬 줄이야…….
“맞다. 이국사. 오늘이 생일이었지?”
하지만 황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궁녀들이 다 나가자마자 황제는 날 돌아보며 물었다.
속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 얘길 왜 여기서 꺼내!
“예, 폐하.”
그래도 모른 척 웃으며 대답하자 황제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생일 축하한다, 이국사.”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는 대놓고 내 쪽으로 쏠렸다. 이제는 제자도 그 시선을 분산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나는 억지 미소를 띠고서 음식을 다시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식사를 반 정도 먹었을 즈음. 나만큼 조용히 식사하던 황후가 웃는 얼굴로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를 만들다니. 폐하께서 이국사가 참으로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마음에 들지. 영민한 인재 아니오.”
“그렇지요. 하지만 다른 인재들은 이렇게 식구들을 모아 놓고 칭찬해주는 일이 없지 않나요. 다른 후궁이나 황녀, 황자들 생일에도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요.”
황후가 꺼낸 말은 묘한 어조였다. 황제가 나에게만 특혜를 베푼단 것처럼 들렸다. 나는 ‘후궁, 황녀, 황자’에도 들어가지 않는 인물 아닌가.
처음에는 호기심을 보이던 후궁들이 황후의 말을 듣자 불쾌해하는 시선으로 나와 예혜 낭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예혜 낭자는 왜 쳐다보지?’
“요 이국사는 저렇게 아리땁지 않습니까, 마마. 게다가 일전에 친 시험에서도 아주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지요. 미인이 똑똑하기까지 하니 폐하께서 싫어할 이유가 없지요.”
이번에는 원비가 황후의 말을 받았다.
그 대화들을 듣고 있자니 새삼 제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예혜 낭자란 선례가 생겼으니, 내가 황제와 가깝게 지내면 사람들이 오해할 거라는 주장 말이다.
당시엔 제자가 너무 앞서 생각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후궁들이 나와 예혜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묘한 말을 하는 걸 듣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진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가?’
나는 물을 마시는 척하며 린화를 보았다.
린화는 내 동생이지만 내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선두 주자에서 의심하고 있었다.
‘반박해야 하나?’
하지만 얼결에 같이 식사하고 있긴 해도 나는 이런 자리에서 편안하게 입을 열 위치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황후와 원비가 계속해서 저런 식으로 말하고 있으면 아무 생각 없던 사람들까지도 나와 황제를 오해하기 시작할 텐데.
젠장. 어쩌지?
‘아!’
다행히 머리가 밥값을 했다.
“전하. 이걸 좀 드셔 보세요.”
나는 제자에게서 먼 쪽에 있는 음식을 음식 더는 젓가락으로 들어다가 제자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이거 아주 맛있어요 전하. 얼른 드셔 보세요.”
제자는 묵묵히 식사를 하다가 눈썹을 찌푸리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미쳤냐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고 일부러 평소보다 방실방실 웃으면서 제자와 눈을 맞추었다.
황제는 태월 사절 앞에서 제자와 부부로 보이도록 굴라 했지. 지금 내가 사람들 앞에서 제자와 사이좋은 모습을 보이면 후궁들도 나와 황제 사이를 의심하지 않을 거다.
“이 반찬은 싫으세요?”
나는 평소보다 목소리도 살갑게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