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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이리가 온다 (116/159)


116화. 이리가 온다
2023.04.10.



 


“전하. 3황자 전하의 정혼녀께서 물에 빠지셨습니다.”

예혜 낭자가 물에 빠졌다고!


“정말인가?”

내가 끼어들자 묻자 태감이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 대인.”

“그럼 건져야지!”

나는 소매를 걷었다. 하지만 제자가 바로 내 소매를 잡아 도로 아래로 내렸다.


“아, 폐하께서 구해주셨습니다. 괜찮습니다, 대인.”

태감도 손을 휘저으며 말렸다.


“그럼 다행이군.”

얼결에 소매를 걷긴 했지만 사실 내가 나서도 소용없긴 했을 거다. 수영을 못 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이런 무거운 옷차림을 하고서 나만 한 성인을 구할 정도로 잘하지도 않아서…….


‘그런데 무사히 구출했다면서. 저 태감 표정이 왜 저렇게 이상하지?’

“부황은 아직 여기 계시나.”

제자가 묻자 그 미묘한 표정의 태감이 옆으로 비켜서며 한쪽을 가리켰다.


“예. 저쪽에 계십니다.”

제자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소매를 내리다가 얼결에 제자와 손을 잡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태감의 말처럼 황제는 물기가 뚝뚝 흐르는 옷차림으로 서 있었다.

송 태감은 커다란 수건을 들고 황제의 옷에서 물기를 닦고 있었다.


“되었다. 괜찮다는 데도.”

황제는 번거로운지 연신 송 태감에게 손을 내젓고 있었지만, 송 태감은 황제가 오른쪽에서 치우면 왼쪽으로 가서, 왼쪽에서 치우면 오른쪽으로 가서 계속 물기를 닦아댔다.


“아. 이국사.”

그러다 황제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13황자의 손에서 내 손을 빼냈다. 황제 앞에서 손을 잡고 인사를 올리는 건 너무 무례한 행동이니까.

하지만 내가 손을 빼내자마자 제자가 내 손을 또 잡아 버렸다.

미쳤나 싶어서 손을 다시 빼내고 손등을 찰싹 치자 그가 어깨를 움찔했다.

내가 쳐놓고 내가 놀라서 쳐다보니 그의 입꼬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화났나 봐!


‘아이고 내 명복.’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하지만 황제 앞이었기에 일단 공손하게 인사부터 했다. 제자한텐 나중에 사과하자.

그런데 뭐지? 정신을 가다듬고서 보니 황제가 용포를 걸치고 있지 않았다. 용포 어디 갔어?

일단 잃어버린 건 아닌 듯, 황제는 머리카락을 모아 쥐고 태연히 물기를 짜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황제가 용포를 벗고 있는 바람에 안에 입은 얇고 하얀 옷이 가슴 근육에 달라붙은 걸 발견하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둘이 폭포 구경을 온 건가.”

황제는 그러거나 말거나 송 태감에게서 수건을 뺏어 들더니 목덜미의 물기를 툭툭 닦으며 물었다.


“예. 스승님이 많이 더워 하셔서요. 여기 오면 시원하다고 알려드렸습니다.”

제자는 친절하게 설명하고서 나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친한 척.


“그렇군.”

황제는 제자가 짓는 미소는 바라보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놀러 왔는데 소란스러워 어쩌냐.”

“괜찮습니다. 사람을 구하셨다지요.”

황제와 제자가 대화 나누는 동안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우리 대화가 들릴지 안 들릴지 애매한 정도로 떨어진 곳 바위에 과연 한 여인이 뒤돌아 앉아 있었다.

뜻밖에도 황제의 용포는 그 여인의 어깨에 덮여 있었다.

여인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어서 내가 선 방향에서는 여인의 왼쪽 얼굴만이 보였다.


‘예혜 낭자가 맞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그녀가 회귀 전 3황자의 정혼녀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


‘회귀 전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예 낭자가 인사할 처지가 아니다, 이국사. 이해하거라.”

너무 대놓고 보았나. 황제가 옆에서 농담하듯 말을 던졌다. 나는 얼른 그녀에게서 시선을 뗐다.


“송구합니다.”

황제는 웃음을 터트리고서 손을 내저었다.


“13황자. 이국사를 데리고 돌아가라. 오늘은 여길 구경하기 힘들겠구나. 이국사.”

“예, 폐하.”

“자네는 폭포 구경을 할 땐 조심하고.”

“네, 폐하.”

황제의 입가 끝에 걸린 미소를 보자 행방불명된 내 필첩이 생각났다. 황제에게 필첩에 관해 물어보면…….


“왜 그러지? 짐에게 할 말이 있느냐?”

“아. 아닙니다. 송구합니다.”

나는 잠시 떠오른 멍청한 생각을 누르고 두 손을 모아쥐었다.

황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짐에게 할 이야기가 있거든 언제든 오거라. 이국사와의 대화는 언제나 환영이지.”

 

* * *

회귀 전에는 없던 일이라 좀 놀라긴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일이 그냥 거기서 그러고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며칠 뒤 어머니가 같이 차를 마시자고 와서 내게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너 그거 아니? 3황자와 정혼한 예 씨 가문 여식 말이다.”

“물에 빠진 이야기요?”

“아니. 그 아이가 폐하의 후궁으로 입궐한다더라.”

나는 놀라서 입안에 넣은 차를 뿜고 말았다.

사레에 걸려 기침하자 어머니가 내 등을 두드렸다.


“몰랐구나.”

“어머니는 어떻게 아셨어요?”

“먼 친척이잖아. 가까스로 생긴 정혼녀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틀어졌다고 그쪽에서는 끙끙 앓고 있나 봐. 넌 뭐 들은 거 없니?”

“없어요. 폐하가 물에 빠진 예혜 낭자를 구해 준 건 알아요. 그 일과 관련이 있을까요?”

“글쎄.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만…….”

어머니는 눈썹을 찡그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다음날. 나는 수업을 하는 내내 제자의 낯빛을 살폈다.

회귀 전에는 무사히 3황자의 정혼녀가 되었던 예혜 낭자가 난데없이 폭포에 빠졌고 황제의 은혜를 입었고 후궁이 되게 생겼다.

그날 제자는 뜬금없이 내게 폭포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내가 회귀를 했나 안 했나 의심한다고 한참 예민해 있는 저 제자가 말이다.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의심하는 마음이 들었다.


‘제자가 이 일에 개입했을까? 혹시 내가 회귀한 걸 의심해서 이러나? 내가 아는 모든 걸 바꿔버리려는 건가?’

“스승님. 제자에게 할 말이 있거든 하시지요.”

“아닙니다. 날이 더워서 아무 생각 없이 있었어요.”

제자에게 예혜 낭자에 관해 묻고 싶다. 그 충동은 굴뚝 같았으나 나는 억지로 질문을 참아냈다.

제자는 내 회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내가 예혜 낭자에 대해 캐묻는다면 ‘과거를 아니까 저렇게 놀라나?’ 생각할지도 몰랐다.

대신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린화를 찾아갔다. 린화는 그래도 후궁에 있으니 이런 내밀한 사정에는 빠삭하겠지.


“이번에 새로 들어오는 후궁 말이야? 당연히 이야기를 들었지.”

린화는 내가 질문하자 코웃음을 치더니 한쪽 다리만 무릎을 위로 굽히는 자세로 앉았다.


“아주 가관도 아니야.”

“왜? 원래 3황자 전하랑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다며?”

“폐하랑 황후마마한테 인사드리러 왔는데 너무 일찍 왔나 봐. 본인 말로는 약속 시각을 잘못 전해 들었다는데 모르지. 어쨌든 시간이 많이 남아서 폭포를 구경하러 올라갔대. 그런데 미끄러져서 빠진 거야. 폐하가 근처에 있다가 구해주었고.”

“폐하가 구해 준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왜 후궁으로 들어온대?”

나도 황제 덕에 보문 공주가 보낸 암살자에게서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필첩은 잃어버렸지만.

어쨌든 그런데도 내게 황제의 후궁이 되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왜 예혜 낭자는 후궁으로 입궁하게 된 거지?


“폭포에는 뾰족한 바위가 많잖아. 물에 떨어질 때 옷이 뾰족한 바위 끝에 걸려서 찢어졌나 봐. 폐하가 건져냈을 때는…….”

린화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묘한 어조로 덧붙였다.


“옷에 참사가 벌어져 있었대. 그리고 알다시피 폐하 뒤에는 수많은 사람이 졸졸 다 쫓아다니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겠지?”

“아.”

그래서 용포를 두르고 있었구나.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폐하가 책임지게 되었어.”

……그럼 제자랑은 관련 없는 그냥 우연의 산물인가?

회귀 전과 회귀 후 모든 일이 똑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도 그런 일 중 하나인지도 몰랐다.

그래. 하긴. 아무리 제자가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사고를 만들어내진 못하겠지.


“짜증 나!”

그때 갑자기 린화가 탁자를 내려쳤다.

나는 제자 생각을 하다가 말고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황당해서 묻자 린화가 탁자를 다시 쾅쾅쾅 두드리며 외쳤다.


“웃기지 않아? 그 여자는 입궁할 때 바로 빈 품계로 올 거래. 입궁할 때부터 빈인 건 설빈에 이어 두 번째로 최초야.”

두 번째는 이미 최초가 아니지 않나? 하지만 바로 빈으로 들어오는 건 놀랍다. 명문가 중의 명문가인 우리 가문에서도 린화는 귀인으로 시작하는데. 설빈은 공주 출신 아닌가. 그런데 같은 대우라니?


“빈으로 들어오는 게 확실해?”

“그래. 지금 후궁들도 그것 때문에 난리야. 황후마마가 문안 때 말해줬으니 확실해.”

황후도 예혜 낭자가 입궁하는 게 마음에 안 드나 보네.


“그런데 어떻게 그게 가능해? 폐하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셔?”

“아니. 3황자 정혼녀였는데 일이 꼬여서 폐하한테 후궁으로 입궁하는 거잖아. 그 집 부모가 울고불고 난리를 부렸대. 3황자 정혼녀이다가 후궁이 되게 생겼으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딸을 우스갯거리 취급하면서 헛소문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아아.”

“폐하께서도 가엾게 여기셔서 바로 빈 자리로 시작하게 해주었어. 말이 돼? 대신 봉호는 안 받았다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린화의 사가 궁녀가 다가와서 얼른 부채질을 빠르게 해주었다.


“고정하세요, 소주.”

“고정하게 되었어? 고작 예 씨 가문에서 입궐하는 여자가 나보다도 더 높은 품계로 시작한다고!”

“…….”

“웃기지도 않아! 폐하가 떠밀었어? 자기가 실수로 물에 빠졌잖아. 그래 놓고서 체면이니 명예니 하면서 입궁하기도 전에 빈 자리까지 갈취하다니! 아주 고단수야. 아주 머리가 비상한 작자가 틀림없어.”

“너무 밉게 보진 마. 어쨌든 본인도 원한 건 아니잖아. 사회 분위기 때문에 이렇게 흘러가게 된 건데. 그쪽도 그저 기쁘진 않을 거야.”

린화는 코웃음만 쳤다.

어쨌든 이로써 들을 이야기는 다 들었다. 다행히 13황자가 이 일에 끼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내가 회귀한 일로 인해 선안은 9황녀와 정혼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사건에 얽히지 않았던가.


“얘기해줘서 고마워.”

“고마우면 좀 갚아.”

나는 그대로 돌아갈까 고심하다가 린화에게 예혜 낭자에 대해 당부해주었다.


“그런데 너무 걱정하진 마. 굳이 싸움 걸고 그럴 필요도 없어. 내가 소문으로 듣기로는 예 낭자는 아주 어질고 착한 사람이래. 너랑 싸우기는커녕 아주 얌전하게 지낼 거야.”

“흥. 그러면 좋겠네.”

린화는 혀를 내밀며 빈정거렸다.


“어휴. 소주도 참.”

린화의 궁녀가 타박했으나 린화는 휙 고개만 돌려 버렸다.

저걸 보니 예혜 낭자가 더 걱정된다. 회귀 전 본 예혜 낭자는 아주 선량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후궁이 되어서 린화나 황후, 원비 같은 사람들이랑 싸우면서 버틸 수 있을까?

* * *

시비가 긴 머리카락을 빗겨주는 동안 예혜는 붓 뚜껑 끝을 열고 거기에 동그란 환을 집어넣고 있었다.


“어떡해요 애기씨…… 애기씨는 3황자 전하랑 혼인할 수 있어서 기뻐했는데. 일이 너무 이상하게 꼬였어요.”

시비는 울적한 목소리로 예혜를 연신 위로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소리가 없었다.

시비는 빗을 내려놓고 고개를 옆으로 내밀었다가 뒤늦게 예혜가 뭘 하는지 발견했다.


“그게 뭐예요? 왜 붓에 그런 걸 넣으세요?”

“독이야. 환으로 만들었어. 가지고 가려고.”

붓 뒤에 달린 뚜껑을 도로 끼운 예혜는 붓을 흔들어 안에서 소리가 나는지 살폈다.

시비의 표정이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또 누굴 죽이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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