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이 품은 누구의 품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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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이 품은 누구의 품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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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이 품은 누구의 품인고
2023.03.27.
“멍청한 것이 야심만 크구나.”
보고를 들은 황후는 혀를 찼다.
“그러게 말입니다. 황후마마께서 그토록 잘해주셨는데 뒤에선 그런 말이나 하고 다니다니요.”
황후의 측근인 고 상궁은 바로 황후에게 동조했다.
말을 전한 태감은 헛기침했다.
그는 보문 공주가 황후를 모욕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보문 공주는 황후에 대해 나쁜 말은 하지 않았다. 황후 소생의 황자가 없단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황후를 모욕하기 위해 꺼낸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요요화는 뭐라 했지?”
황후는 태감에게 다시 이야기하라 손짓했다.
“요 이국사는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 13황자 전하께선 황위에 전혀 관심이 없으시다. 황위에 관심이 없는 분께 그런 건 이득이 아니다. 오히려 정쟁에 휩쓸리면 골치만 아프다. 공주님은 우리 13황자 전하를 황위 다툼에 끌어들이실 셈이냐.”
“그래도 요요화가 도리는 있습니다.”
고 상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살아남는 법을 아는 게지.”
황후 역시 만족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보문 공주보단 역시 요 이국사가 낫습니다, 마마.”
태감도 황후의 눈치를 살피며 얼른 맞춤 말을 했다.
“그렇지.”
황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생각에 잠겼다.
궁인들은 침묵한 채 황후가 생각을 끝내길 기다렸다.
일각 정도 뒤. 황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지시했다.
“보문 공주를 데려와라.”
* * *
“요요화 그자는 아주 여우더군요. 13황자 앞에선 착한 척 온순한 척해대더니, 저와 둘만 남자마자 온갖 무례한 말을 퍼부어댑니다!”
보문 공주는 황후궁에 오자마자 하소연했다. 요요화에게 무척 화가 난 듯했다.
“이런. 무어라 하던가?”
황후는 너그러운 목소리로 보문 공주를 달래주었다.
보문 공주는 황후가 태감에게 들은 이야기보다 좀 더 과장되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황후는 이를 내색하지 않고 듣다가, 이야기가 끝나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요요화는 날 때부터 남장하고 사람들을 속이며 살았지. 공주처럼 귀하게 자란 사람과는 달라. 그 아이는 천성적으로 사기꾼이라네. 너무 화내지 말게.”
“그렇기야 하지요.”
공주는 단번에 차를 입에 털어놓았다.
“더 드릴까요?”
고 상궁은 얼른 빈 찻잔에 찻물을 채워주었다.
공주는 황후의 반응에 아군을 만난 기분이 들어 졸랐다.
“황후마마. 태월이었다면 그런 무례한 자는 당장 곤장을 때렸을 겁니다. 공주인 제게 그런 말을 해대다니요. 황후마마. 절 도와서 요요화에게 벌을 내려 주세요.”
그러나 황후는 저울추가 기울지 않을 때도 보문 공주를 위해 그 정도로 나설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지금은 더욱 나설 마음이 없었다.
“자네 마음이야 이해하지. 하지만 어쩌겠나. 요요화는 궁인이 아니라 관료라네. 건방지단 이유로 그런 벌을 내릴 순 없어.”
황후가 대번에 거절하자 보문 공주는 서운한 얼굴로 차만 홀짝였다.
“공주는 마음이 참 여리군.”
황후는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공주는 얼굴이 붉어져서 새침하게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마마는 절 부끄럽게 하시는군요.”
“하지만 자네도 분발하긴 해야 할게야.”
그러나 공주가 화가 좀 풀리는 듯하자 황후는 너그럽던 분위기를 바꾸었다.
황후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자 공주가 눈썹을 찌푸렸다.
“분발하다니요?”
“화음 황자와 황녀들 혼인이 미루어진 건 3황자 혼담이 막혀서이지.”
“예. 전에 그 이야기를 해주셨지요.”
“해서 이번에 폐하께서 3황자 혼담 상대 기준을 낮추기로 하셨거든.”
“예?!”
보문 공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쯤 몸을 일으켰다.
“정말인가요?”
“그래. 내일이나 모레쯤 공문이 나가면 좀 더 조건이 완화된 가문들이 대거 자원하겠지. 3황자가 혼인하기 시작하면 그 뒤 혼인들은 다 빠릿빠릿하게 진행되지 않겠나. 정혼자들은 다 있으니 말일세.”
보문 공주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눈에 띄게 초조해했다. 공주는 결국 몇 마디 더 말을 나누다가 핑계를 대고 가버렸다.
황후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으며 지시했다.
“마음이 조급하면 실수하기 마련이지. 뭘 하려는지 자세히 살피거라.”
* * *
보문 공주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빠르게 자기 처소로 걸어갔다.
대화를 함께 들은 궁녀가 그 뒤를 쫓으며 물었다.
“전하. 어떻게 하시렵니까?”
“안 돼. 시간이 없다. 이대로 가면 13황자가 날 연모하게 되어도 이미 요요화와 혼인할 날이 코앞이겠어.”
처소로 들어가자 궁녀는 문을 단단히 닫아걸었다.
공주는 초조하게 엄지를 씹었다.
궁녀는 창문까지 꼼꼼히 닫고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전하. 지금 13황자님은 혼담을 깰 마음이 없어 보이시던데요. 태월이라면 폐하께서 도와주셨겠지만…… 여기서는 공주 전하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 폐하께 도움을 청하면 어떨까요?”
공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바마마는 날 여기 보내면서도 못마땅해했어. 아바마마는 13황자가 내 수준에 못 미친다고 여기시지. 충분히 뒤로 많이 물러나셨다. 여기서 더 도움을 청하면 자존심 상하게 사내에게 매달린다고 화내실 거야.”
부황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진즉에 청했을 터였다.
“사실 공주 전하가 더 아깝긴 해요…… 그분은 정말 얼굴 빼곤 아무것도 없잖아요.”
궁녀가 수긍하자 공주는 버럭 소리쳤다.
“그 얼굴이 중요해!”
궁녀는 할 말이 사라졌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고개만 숙였다.
공주는 다시 엄지를 씹다가 중얼거렸다.
“이젠 별수 없구나. 요요화를 치워버려야겠다.”
“예?!”
“요요화도 억울하진 않을 거다. 13황자를 내게 뺏기는 모습을 못 보고 죽을 테니.”
* * *
공주는 지체 없이 자객촌을 찾아가 가장 몸값이 비싸단 자객을 찾았다.
공주의 신분을 모르는 중개인은 좀 더 몸값이 싼 자객을 고용하길 추천했으나, 공주는 단번에 거금을 내놓았다. 중개인은 바로 가장 솜씨 좋은 자객을 주선해주었다.
의뢰를 주고받는 방에 들어가자 자객이 이미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공주는 맞은편에 앉으며 곧장 요구했다.
“요씨 가문 소가주 요요화를 죽이고 싶다. 최대한 이른 시간 안에.”
자객은 공주의 의뢰에 눈을 번뜩이며 쳐다보았다.
따라온 궁녀는 겁이 나서 호위에게 반짝 붙어 섰다.
그러나 공주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자객은 잠시 고민하다가 웃으며 뜸을 들였다.
“요씨 가문은 명문가지. 일이 잘못되면 위험할 텐데.”
공주가 눈짓하자 호위가 품 안에서 두둑한 주머니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괜찮군.”
주머니 속 의뢰비를 꼼꼼하게 확인한 자객은 씩 웃더니, 품에서 단도를 꺼내 주머니 옆에 내려놓았다.
“의뢰를 받아들이지.”
자객은 공주가 누구인지, 왜 요요화를 죽이려는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공주는 만족해서 일어났다.
* * *
“자객을 고용해?”
황후는 보고를 듣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네. 어찌할까요 전하? 증좌는 지금도 있습니다. 바로 잡아들여 출국시킬까요?”
태감은 허리를 숙이고서 물었다. 태감은 요요화를 좋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다른 나라 공주가 자객을 고용해 이곳 관료를 죽이려 들자 자존심이 상했다.
“되었다. 쫓아내기 전에 마지막 쓰임새를 다하면 좋지. 어차피 의뢰까지 했다니 두고 보자.”
“하면…….”
“요요화가 살아나든 죽든 상관없지. 암살자가 요요화를 노리고 난 뒤에 신고해라.”
* * *
보문 공주 건은 황후의 불안을 자극했으니 황후가 알아서 할 것이다. 이제 난 제자만 대비하면 된다.
하지만 제자가 어떤 식으로 함정을 팔지 모르기에, 나는 할 수 있는 선에서 여러 가지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 대비 중 하나는 회귀 전 방문한 장소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기억을 자극해 되살리는 것이다.
나는 그 대비를 위해서, 오늘도 수업이 끝난 뒤 집 밖으로 나가 필첩을 들고 돌아다니며 회귀 전 일들을 떠오르는 대로 죄다 적었다.
비밀스럽게 해야 하는 일이기에 일부러 월섬도 데려오지 않았다.
‘이쪽에는 무슨 일로 왔더라?’
그렇게 변두리를 따라 감이 오는 대로 걷다 보니,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으슥한 골목으로 오게 되었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눈에 익은 돌벽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왜 왔더라……?’
회귀 전에도 오긴 왔다. 하지만 내가 오려고 온 건 아니었다. 제자를 따라왔던 것 같은데.
제자도 여기서 누굴 찾았던 것 같다. 막 대놓고는 아니고 좀 은밀하게 말이다. 당시에 나는 ‘은밀하게 올 거면 왜 나까지 데려와?’라고 툴툴거렸지.
아니, 왜 당시 한 생각은 떠오르는데 온 이유는 생각이 안 나는 거지?
‘기척?’
그런데 돌벽을 더듬거리며 걷고 있자니, 벽 너머로 발소리를 죽인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지? 수상한데?’
그냥 돌아다니는 사람의 기척이 아니었다. 돌벽 너머 발소리는 자기 존재를 숨기려는 듯 살살 다니고 있었다.
나는 필첩과 가는 붓을 챙긴 다음 인기척과 거리를 두고 그 장소를 빠져나갔다.
‘뭔지 모르겠지만 조심하자.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는 게 낫겠어.’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골목에서 빠져나가려는데 건너편 길을 삿갓을 눌러 쓴 제자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도로 뒤로 물러났다.
‘제자도 여기 있었구나!’
제대로 얼굴을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스치듯 지나가도 저런 얼굴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서서 제자와 마주칠 일을 피했다. 제자가 왜 여기 왔는진 모르겠지만 굳이 인사할 필요는 없겠지.
제자가 완전히 한쪽으로 지나간 뒤에야 나는 벽에서 몸을 뗐다. 하지만 몸을 떼자마자 지붕 위에서 누군가 검을 들고 뛰어내렸다.
‘젠장!’
나는 얼른 반대편 벽으로 뛰었다. 지붕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착지하자마자 날 향해 바로 검을 휘둘렀다. 그냥 지나가던 깡패 몸놀림이 아니었다.
‘무림인? 무림인이 왜 날 공격하지?’
나는 무림인의 공격은 피했다. 그러나 반격할 수가 없었다. 이쪽엔 무기가 없었다. 무림인은 이 와중에도 계속 검을 휘둘렀다.
결국, 나는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거리로 뛰어갔다. 여기론 못 쫓아오겠지.
하지만 복면 쓴 무림인은 골목길 밖까지 따라 나왔다. 대로까진 아니어도 사람이 없는 거리는 아닌데도 말이다. 이 무림인은 절대 강도는 아니었다.
‘그럼 날 노리고 쫓아온 건가?’
“강도야!”
“강도다!”
거리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복면인을 보자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기를 들고 있어서인지 외치기만 했다.
나는 무조건 앞으로 뛰어갔다. 무기. 무기. 무기로 쓸 만한 거 없나?
그러나 무기 대신 제자가 나타났다. 아까 지나간 제자는 어느 집 앞에 서 있었다.
소동을 들었는지 제자도 막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 순간. 제자의 뒤에 선 많은 호위가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제자놈은 아주 강하지.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르자 저절로 고함이 나갔다.
“여기요!”
나는 제자에게로 달려가며 외쳤다.
“도와주세요!”
그러고서 제자 가까이 다가가자, 제자는 나를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제자 뒤의 호위들이 나와 스치듯 앞으로 튀어 나가 대번에 복면인에게 검을 휘둘렀다.
나는 제자를 붙잡고서 고개만 돌려 호위와 복면인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둘 다 강했지만, 복면인이 쪽수로 밀렸다.
복면인은 안 되겠다 싶던지 검을 크게 휘둘러 달아나기 시작했다. 호위 반은 그 뒤를 쫓았고 반은 남아서 돌아왔다.
다행이다. 어찌어찌 해결됐구나. 그걸 보며 안도하고 있자니,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자가 왜 널 쫓았느냐?”
제자와 흡사한, 하지만 제자가 아닌 목소리가.
나는 벼락 맞은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폐,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