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공주를 낚다
(111/159)
111화. 공주를 낚다
(111/159)
111화. 공주를 낚다
2023.03.23.
“스승님. 혹시 우리가 전생에도 사제 간이었을지요?”
평소처럼 수업에 들어갔을 때였다. 제자가 심장이 철렁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책장을 넘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제자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나는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회귀 전 기억이 있냐고 묻는 건가? 이렇게 대놓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얼빠질 뻔했으나 나는 얼른 표정을 관리하고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자는 미소 짓더니 시선을 내게서 떼며 웃음을 거두었다.
“…….”
나도 다시 서책으로 시선을 내렸지만 이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저 제자는 내가 방심할 틈을 주지 않는구나. 청양에게 서점 이야기를 들었나? 그래서 저런 질문을 한 걸까?
‘침착하자. 제자가 의심을 풀 거란 생각은 나도 안 했잖아.’
“부황께서 스승님의 외숙모의 오라버니에게 건 반역 혐의를 지워주셨더군요.”
“예. 어제 아침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어제 내내 연습한 대로 말했다.
“실은 그 일로 폐하께 선물도 받았지요. 외숙부 심부름을 잘하니 폐하께서도 예뻐해 주시네요.”
제자가 코웃음을 쳤다. 진짜로 픽 하고 비웃는 소리가 났다.
“그렇군요.”
모른 척 책장을 넘겼으나 손에 들어간 힘 탓에 바스락 소리가 좀 더 크게 들려왔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짐을 주섬주섬 챙기면서 지나치는 투로 말했다.
“며칠 전에 서점에서 청양을 만났습니다.”
“들었습니다.”
“위험한 일 중이어서 제가 청양을 좀 피했거든요. 청양에게 미안하다고 좀 전해 주세요, 전하.”
“그러지요.”
오늘은 바래다줄 마음이 없는가. 제자는 제자리를 지킨 채 먹만 갈았다.
먹물 향은 맡기 좋았지만 제자의 옆모습은 얼음장 같았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서 얼른 그 방을 빠져나왔다.
* * *
스승이 나가자 화려는 먹을 눕혀두고 서랍에서 생일에 받은 그림을 꺼냈다. 그는 여기저기 노랗게 피어난 그림 속 개나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전하. 이걸 좀 드셔 보십시오.”
운귀가 김이 나는 떡을 가지고 들어와서야 화려는 그림에서 시선을 뗐다.
“여기 태감과 궁녀는 너무 게으릅니다. 언제까지 두고 보실 생각이십니까?”
운귀는 그릇을 책상에 내려놓다가 힐긋 그림에 시선을 던졌다.
운귀는 청양에게서 요요화와 13황자가 또 둘이 이상한 숨바꼭질을 했단 이야기를 이미 들었다. 그는 호기심이 강한 편이 아니었으나 궁금해서 묻고 말았다.
“전하. 전하는 혹시 요 이국사를 의심하십니까?”
화려는 떡으로는 시선도 내리지 않고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전하와 요 이국사는 같은 책을 찾았지요. 전하께서는 책을 구해오란 지시를 내리면서 요 이국사가 그 서점에 들렀는지도 확인하라 하셨습니다.”
운귀는 떡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점차 잦아드는 걸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틀 전에 요 이국사가 외숙부의 명령으로 무슨 책을 찾아와서 폐하의 노기를 가라앉혔습니다. 혹시 전하께서 찾던 책과 요 이국사가 찾아온 책이 같은 책인지요?”
“…….”
“요 이국사가 어찌 전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요 이국사를 경계하신단 생각이 듭니다.”
“맞다.”
뜻밖에도 화려는 바로 수긍했다.
운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요 이국사가 황후나 다른 황자 쪽 사람입니까?”
“글쎄.”
화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르겠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스승을 의심했지만, 스승이 어디의 사람인지는 알지 못했다.
회귀할 때마다 스승은 결탁한 사람이 달랐다. 그가 괜히 스승을 박쥐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의심하는 마음이 구. 믿으려 애쓰는 마음이 일 정도인가.”
운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의심이 구 할입니까?”
“믿으려 애쓰는 중이지.”
운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요요화는 새끼 여우처럼 머리를 굴려댔지만 나쁜 생각을 할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저 머리 좋은 13황자가 9할의 가능성으로 의심하고 있다니. 어느 쪽 사람인지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니.
“그렇다면 폐하께 스승을 바꾸어 달라 청하시고 혼담도 물려달라 하십시오, 전하. 전하께선 그러실 수 있잖습니까.”
“그럴 수야 있나.”
화려가 미묘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웃었다.
운귀는 화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왜 그러면 안 된단 거지?
화려는 요화가 준 그림에 코를 대고 먹과 스승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가 처음 스승을 의심한 건 수업 첫날이었다.
그는 지겨울 정도로 스승의 수업을 반복해 들었다.
스승의 수업은 중반부까지는 늘 같았다. 중반부부터는 두 사람의 사이나 당시 스승의 심리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지만, 중반부까지는 늘 비슷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스승의 수업 깊이가 갑자기 달라졌다.
장기를 잘 두지 못하는 스승이 장기로 유 가주를 감탄시켰다.
황제에게 벼루를 맞아 다쳤는데도 때린 황제가 아니라 걱정하는 그를 두려워했다. 당시 그는 스승을 걱정하는 척 표정을 잘 숨기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스승이 이국사 자리에서 쫓겨나게 생겼을 때 화려는 일부러 황제에게 시험을 쳐보라 권했다. 그가 ‘아는’ 스승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권한 것이었다.
역시 스승은 이전 회귀 때보다 더욱 영리해진 게 맞았다.
회귀 전 모임 장소 부근에서 스승을 만난 일도 수상했고, 스승이 용정을 신경 쓰는 일도 거슬렸다.
그는 황제 예언서에 대한 일을 회귀 전보다 빨리 끄집어낼 때 일부러 반박 증좌를 챙겨오지 않고 스승을 지켜보았다.
그가 나서지 않고 기다리자 스승은 반박 증좌가 있는 서점으로 이동했다. 화려의 의심은 순식간에 깊어졌다.
이런 수많은 정황에도 불구하고 화려가 스승이 회귀한 게 확실하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같은 실수는 반복하면 안 되지.’
“전하?”
생각에 잠긴 13황자를 운귀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방해되지 않게 소인은 나갈까요?”
“함정을 하나 파야겠다.”
“예?”
딱 하나. 딱 하나만 걸린다면 그는 스승이 회귀한 게 확실하다고 여길 수 있었다.
* * *
‘제자는 분명 함정을 팔 거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회귀 전 기억을 짜내며 빈 공책에 옮겨 적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이러는 게 요즘 내 일과였다. 사람 기억이라는 게 전부 다 한 번에 떠오르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떠오르는 게 많으니 말이다.
‘이번 일로 나에 대한 제자 의심이 강해졌을 거야. 분명 함정을 파서 내 기억을 확인하려 들겠지. 더 더 더 조심해야 해.’
* * *
제자에 대한 경계심이 바짝 높아진 다음 날. 나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린화에게 가다가 보문 공주와 황후, 용정이 같이 산책하는 걸 보고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하지만 세 사람은 퍽 사이좋은 지기처럼 연신 웃어가며 걸어가고 있었다.
‘회귀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조합이네.’
나는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나무 뒤에서 나와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자를 경계하는 상황에서 그 조합을 보고 나니 불안한 마음은 한층 더 강해졌다.
‘예전엔 황후가 알아서 보문 공주를 쫓아냈지. 하지만 지금 황후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 제자도 보문 공주를 쫓아낼 마음이 없어 보이고…….’
회귀 전에도 보문 공주는 제자와 맺어지는 데 방해가 될만한 것들을 모조리 공격했다. 회귀 전 내가 그녀의 공격 범위에 포함되지 않은 건 사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문 공주는 나를 가장 경계하고 있지. 그녀는 떠나기 전까지 내게 온갖 계략을 부릴 거다.
‘안 되겠어. 제자만 상대해도 벅찬데 보문 공주까지 내버려 두었다간 더 힘들잖아. 제자랑 황후가 안 나서니 내가 보문 공주를 쫓아내야겠다. 되도록 쥐 죽은 듯 있고 싶은데. 무리를 해서라도 나서야겠어.’
하지만 어떻게? 고작 말단 이국사인 내가 저 공주를 어떻게 돌려보낼까.
* * *
나는 보문 공주의 동선을 며칠에 걸쳐 파악했다.
보문 공주는 대화원에 자주 들렀다. 궁녀 한 사람만 데리고 갈 때도 있고 여럿을 데려갈 때도 있었지만, 공통점은 대화원에 하루에 한두 번 꼭 간단 점이었다.
나는 잠자코 벼르다가 보문 공주가 호위를 데리고 화원을 산책할 때 일부러 그쪽 부근을 지나갔다.
“요 이국사.”
살짝 알짱거렸을 뿐인데도 보문 공주는 바로 미끼를 물었다.
“요 이국사도 꽃구경하러 나왔나?”
보문 공주는 날 발견하자마자 바로 다가오며 아는 척을 했다.
“공주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나는 기쁜 마음을 감추고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늘 놀고먹는 것 같군.”
보문 공주는 지난번 일로 완전히 날 적대하기로 마음먹은 듯 웃으면서 바로 화살을 날렸다.
안 그래도 그녀에게 시비를 걸 작정이었던지라 나는 기꺼이 그 시비에 걸려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공주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이렇게 뵈니 잘 되었습니다.”
“나한테 할 말이라니?”
보문 공주가 턱을 들어올렸다. 그녀도 나와 시비가 붙은 걸 아주 즐거워하는 듯했다.
“일전에 제 가문에 언관을 끌어들이신 건 공주 전하시죠?”
내가 물 먹으리라 기대하고서 언관을 따라왔다가 허탕 친 일이 떠올라서일까. 보문 공주의 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공주 전하께서는 늘 13황자 전하께 흑심을 보이셨지요. 그 일 때문에 제게 해코지하고자 그러셨습니까?”
공주는 내가 이 정도로 나올 줄 몰랐던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보문 공주의 뒤에 선 궁녀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와 공주를 번갈아 보았다.
공주의 목이 한층 더 빨개졌다.
“너무 무례하군.”
공주는 이를 갈았다.
“전하와 정혼하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지기라도 한 건가.”
“그럴 리가요. 저는 늘 겸손했습니다. 공주 전하께서 제 수업을 방해했을 때도, 제게 공주 전하의 물건을 잃어버렸단 누명을 씌우실 때도 늘 참고 견뎠는걸요.”
태감이 호랑이 앞에서 설레발치는 개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전하는 제 가문에까지 누명을 씌우려 하셨습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나는 화난 목소리를 꾸며내며 공주를 계속 비난했다.
“사람 마음은 마음대로 되지 않지요. 공주 전하가 13황자 전하를 마음에 두시는 것까지 제가 어찌 막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제게 해코지를 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계속 보문 공주의 인내심을 여러 방향에서 찔러댔다.
“공주 전하가 제 가문에 해코지하시면 13황자 전하께도 좋지 않습니다. 혼인하고 나면 몇 해 뒤에는 전하와 저는 요씨 가문에서 지낼 테니까요. 그러니 제 가문을 건들지 말아 주세요.”
마침내 공주는 펑 폭발했다.
“요씨 가문이 13황자께 큰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단 것처럼 말하는구나.”
“네.”
공주는 코웃음을 치더니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빈정거렸다.
“네 가문이 13황자를 위해 뭘 해줄 수 있단 거지? 넌 소가주 자리에서 쫓겨날 테고,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네 가문에 있는 돈? 돈 때문에 혼인하는 거라면 차라리 대상인의 여식과 혼인하는 게 도움이 될 거다. 넌 머리도 나빠. 네 아이도 머리가 나쁠 테지. 너와 혼인하면 전하껜 손해뿐이다.”
“그럼 공주 전하는 13황자 전하께 저보다 더 도움이 되신단 겁니까?”
“당연하지. 나는 전하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걸릴 것 같은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황후는 황위 문제에 신경이 바싹 곤두서 있었다.
그녀가 왜 보문 공주를 옆에 두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보문 공주가 13황자의 황위에 아주 약간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된다면 황후는 공주를 쳐낼 것이다.
‘여기는 황후 텃밭이지. 보문 공주를 따라다니는 호위 중엔 황후 사람이 있을 거다. 아니면 황후가 매수한 사람이라도.’
나는 낚싯대를 더 열심히 흔들었다.
“공주 전하는 저보다 더 높고 귀한 분이지요. 그렇지만 공주 전하와 혼인한다고 해서 우리 13황자 전하가 저와 혼인할 때보다 무슨 이득이 더 생기겠습니까. 없습니다. 오히려 공주 전하와 혼인하면 13황자 전하는 고향을 떠나 지내셔야 하니 더 외롭게 될 뿐입니다.”
“화음엔 황태자가 없으니 황자 중 누구라도 황위에 오를 수 있지. 나와 혼인하면 13황자께도 경쟁할 기회가 올 거다. 나는 부황께서 총애하는 공주니까. 하지만 너와 혼인하면? 우스갯거리가 될 뿐이다.”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