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늦은 밤 책방 안에서
(109/159)
109화. 늦은 밤 책방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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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늦은 밤 책방 안에서
2023.03.16.
내가 서점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심지어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뜰 시각이었다.
서점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고 안쪽에서는 흘러나오는 빛이 없었다. 서점 주인이 문을 닫고 갔거나 가게에 딸린 방에서 잠든 게 분명했다.
나는 서점 문을 쾅쾅쾅 두드렸다.
“…….”
두어 번 더 쾅쾅쾅 두드리자 나무로 된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누구야!”
안경을 쓴 서점 주인이 신경질을 내며 나왔다.
“누군데 이 시간에 서점 문을 두드리고 그럽니까!”
나를 본 서점 주인은 씩씩거리면서 항의했다.
“미안합니다. 책을 하나 사고 싶어서요.”
내가 싹싹한 척 웃으며 말했으나 주인은 더욱 기막혀했다.
“그럼 낮에 와요! 하다못해 아침에라도! 미쳤나.”
서점 주인이 문을 닫으려는 걸 나는 얼른 같이 붙잡아 막았다. 내가 문 닫는 걸 막자 서점 주인이 ‘이거 강도인가?’ 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나는 절대로 강도일 수 없는 내 맑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이면서 재차 부탁했다.
“죄송합니다, 주인장. 내가 내일은 시간이 없어서요. 그래서 급하게 왔습니다.”
“아니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시간이 몇 신데-.”
“금화 하나.”
“들어와요.”
주인장이 문을 열어주자 나는 안심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장은 툴툴거리면서 서점 안에 매달린 등불에 불을 붙였다. 희미한 빛이 책방 내부를 밝혔다. 그래도 어둑했으나 글자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여기 있을 테니 골라서 와요.”
책방 주인은 문 옆 계산대 뒤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경고했다.
“최대한 빨리!”
“그럼요.”
나는 넉살 좋게 대답하고서 서점 안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빨리 책을 사서 돌아가고 싶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급해서 바로 오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제자가 이 증좌를 노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회귀 전에는 제자 손에 없던 물품이지만 회귀 후 노리게 됐을지도 모르니까.
‘대체 원비 집안사람들은 왜 이딴 걸 연구한다고 해서는. 보나 마나 7황자가 황위에 오를 수 있나 보고 싶었던 거겠지만.’
책장을 빼곡하게 채운 책 제목을 손으로 훑고 지나가면서 나는 그 ‘증좌’가 무엇일지 열심히 찾았다.
회귀 전 나는 당연히 그 증좌를 보지 못했다. 그때 나는 이국사였고 그런 업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원비의 오라비가 주장한 그 증좌의 제목은 얼핏 기억났다.
‘그 제목도 다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아직 멀었소?!”
“아 잠시만요! 방금 왔잖아요!”
바쁘게 이리저리 다니다가 건너편 책꽂이로 가며 보니 주인은 팔짱을 끼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자다가 나 때문에 일어났구나.
‘측…… 즉…… 황…… 염…… 뭐 이런 글자가 섞여 있었는데.’
의외로 책방의 중앙에서 두 칸 뒤에 있는 책장에서 그 제목이 나타났다. 나는 얼른 책을 꺼내서 내용을 훑어보았다.
황제의 이름이 실린 예언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앞부분을 잠깐 살펴보니, ‘백 가지 가능성을 외친 다음 거기서 한두 개 맞춘 게 뭐가 예언서냐’가 책의 요지였다.
저자는 차라리 용감한 황제가 본격적으로 역사서와 그 예언서를 비교하게 했다면 그 예언서가 가짜란 걸 진즉에 알았을 거라며, 다들 쉬쉬하며 감추다 보니 오히려 예언서가 과대평가를 받게 된 거라고 주장했다.
‘이거인 거 같아.’
그 순간 덜컹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나는 서책을 품 안에 넣고서 빈 책장 칸을 딛고 책장 위로 올라갔다.
최대한 몸을 납작하게 숙이고서 슬쩍 앞으로 기어가 고개를 내밀자 한 손으로 문을 닫는 남자가 보였다.
키도 체형도 다 어중간해서 지나쳐 가면 기억이 안 나는 남자. 자세히 보면 이목구비가 단정하지만, 그 이목구비도 돌아서면 잘 기억이 안 남는 무난한 인상. 13황자의 측근 암살자인 청양이었다.
‘제자가 보낸 건가!’
그가 여기에 올 이유는 그것뿐이다. 젠장! 젠장! 젠장!
‘청양이 여기 온 걸 보니 제자가 이번 원비 사촌 사건을 터트린 게 맞구나.’
나는 책꽂이를 꽉 붙들고서 청양이 계산대를 콕콕 두드리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주인장은 꾸벅꾸벅 졸다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아니 이건 또 누구야!”
“한밤중에 미안합니다, 주인장. 그래도 문을 열어둔 걸 보니 지금도 장사하는 게 맞죠?”
청양이 미소 지으면서 묻자 주인장이 씩씩거렸다.
“어떤 손님 때문에 연 거요!”
“미안합니다. 이 서점의 책을 모두 사고 싶은데요. 다해서 얼마죠?”
주인장은 화를 멈추고 입을 벌렸다.
“모두 말이오?”
“네.”
제자가 찾아오라고 하기도 귀찮았나 보다. 그냥 다 사버리라고 하다니.
“안 될까요?”
청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외관상 전혀 암살자 같지 않아서 그와 마주하는 사람들은 경계심을 쉽게 풀곤 했다.
책방 주인도 마찬가지로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나야 좋지만…… 하지만 그러면 다른 손님들이 내일 왔을 때 놀랄 텐데.”
“책이야 또 들여놓으면 되지요. 값은 후하게 치르겠습니다.”
“그렇다면야.”
책방 주인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고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책을 다 가져가시려고?”
“제 부하들을 시켜 가져가겠습니다.”
부하들 소리에 책방 주인의 표정이 들썩였다.
“그러시오. 지금?”
“예.”
“나는 그럼 어디 있지?”
“여기 계셔도 됩니다.”
청양은 부하들을 불러오려는 듯 문을 열었다.
‘청양이 잠깐 나가면 그사이에 빠져나가자.’
“참. 오늘이 무슨 날인가. 이상한 손님들이 아주 많구먼.”
그 순간. 책방 주인이 잠이 다 깬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도로 의자에 앉았다.
청양이 나가려다 말고 멈칫했다.
‘이 인간아, 그런 말을 왜 하는 거야!’
그는 도로 안으로 들어오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저 말고도 이상한 손님이 다녀갔나요?”
“그렇지. 그 손님 때문에 이 오밤중에 문을 열었지요.”
“그 손님이 아주 아름다운 사내나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었나요?”
“훤칠한 사내였지.”
“그렇군요.”
청양이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다급히 머리를 집어넣고 주인장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왜 그딴 걸 말하는 거야!’
젠장. 막 회귀했을 때 내가 제자를 볼 때마다 너무 두려워하다 보니 제자가 나를 의심했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그를 대할 수 있게 되었고, 제자의 의심도 풀리는 듯했는데. 아직 제자가 날 의심하는 건가?
그런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청양이 굳이 저런 걸 물어볼 리가 없었다.
‘어쩌지? 내가 다녀간 걸 알았으니 분명 제자에게 내 얘기를 할 거야.’
내가 같이 회귀한 걸 알아차린다면 제자가 어떻게 나올까?
그냥 ‘신기하네요 스승님’ 하고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그는 분명 나를 다시 죽이려 할 거다.
청양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다. 하지만 청양은 안 그렇게 생겨서 제자에게 제법 충성을 다하는 편이었다.
“그 손님이 언제 나갔나요?”
청양의 질문에 주인장이 나를 한 번 더 사지로 밀었다.
“아직 이 안에 있지요. 아, 그러고 보니 그 손님이 책 한 권은 먼저 사가기로 했습니다. 그 손님이 가져갈 책 한 권은 빼고 가져가요.”
“아하. 그렇군요.”
청양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아직 이 안에 계시군요.”
청양이 천천히 문을 밀어 닫았다. 주인장이 안경을 슬쩍 위로 올리며 그의 옆모습을 살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주인장이라도 이쯤 되니 무언가 이상한 걸 눈치챈 듯했다.
“이 안 어디에 계실까요.”
청양이 흥얼거리면서 천천히 근처의 책꽂이로 걸어갔다. 누가 암살자 아니랄까 봐 숨어있는 날 찾을 생각에 아주 즐거워 보였다.
나는 기척을 죽이고서 청양이 돌아다니는 방향과 반대쪽으로 내려갔다.
책장 위에서 버텨 보았자 그가 이쪽으로 다가와 위를 올려다보면 바로 들키게 된다. 차라리 책장을 방어막 삼아 그를 피해 같이 돌아다니는 게 나았다.
툭 툭 툭
청양은 걸을 때마다 책장을 손으로 두드렸다.
나는 그 소리를 기준으로 삼고서 기척을 죽이고 이동했다.
예전에 무술 스승이 인기척 감추는 방법을 알려줄 때 나는 참으로 쓸데없다고 여기고서 항의했다.
-내가 도둑놈도 아니고 이걸 배워서 어디다 쓰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흐음.”
아무리 돌아다녀도 내가 보이지 않자 청양이 한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쯤 튀어나와 있는 책을 꺼내서 만약을 대비해 손에 들었다.
그걸 기점으로 청양에게서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그가 장난을 그만두고서 본격적으로 날 잡으려는 듯했다.
나는 책꽂이 사이로 청양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살금살금 여러 책장을 돌고 돌았다.
그러다가 나는 계산대에서 가장 가까운 책장에 도착하고 청양은 저 안쪽에 있는 구도가 되자마자 재빨리 문으로 다가갔다.
“책값 주고 가야죠!”
하지만 문을 열기 직전 주인장이 날 붙잡았다. 거의 목구멍 끝까지 욕이 튀어나왔다.
‘진짜 이 주인장 눈치가!’
저 끝 책장에서 이쪽으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청양은 아까와 달리 신발 밑창과 나무 바닥이 부딪치는 소리를 고의로 내며 다가왔다.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
“요 공자, 이렇게 뵈니 너무 반갑네요.”
“어라 아는 사이요?”
주인장이 끼어들어 물었다.
나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러네요. 이 야심한 시각에 만나니 참 기쁘네요. 청 대인은 무슨 일로 여기 왔어요?”
“아마 같은 목적으로 온 거 같군요.”
청양이 웃으면서 사람 속을 뒤집었다.
“요 공자, 무슨 책을 샀어요?”
난 이 새끼가 제자와는 다른 의미로 무섭다. 제자가 함정을 파고서 먹이가 걸리기를 기다리는 거미 같다면 이놈은 그냥 이를 드러내고서 무작정 돌진해 달려드는 호랑이였다.
“뭐 별거 아니에요.”
“그럼 제가 봐도 되겠네요?”
“…….”
청양이 내가 손에 든 서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가 멋대로 서책을 가져갔지만 나는 막지 못했다.
청양은 서책을 주르륵 훑더니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나를 보았다.
“이 늦은 시간에 찾으러 온 것치고는 너무 흔한 서책입니다, 요 공자. 이런 서책은 요 공자 집 근처에도 많지 않나요?”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그가 서책을 계산대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른 책이 하나 더 있을 거 같은데.”
“뭐라고요!”
책방 주인이 펄쩍 뛰었다.
“책 한 권 값을 주고 두 권을 가져가려 한 건가요!”
저 눈치 없는 책방 주인은 내가 금화 하나를 내민 걸 까맣게 잊었나 보다. 금화 하나가 뭐가 책 한 권 값이야!
한 권만 가져가겠다고 한 건 맞지만 그래도 상황이 이 정도 되면 그냥 눈치껏 좀 닥쳐 주면 안 되는 건가? 혹시 내가 한밤중에 들어온 것 때문에 화가 나서 일부러 저러는 건가?
“요 공자?”
청양이 한 걸음 내게 더 다가와서는 친근하게 물었다.
“다른 서책은 무엇입니까?”
제기랄! 나는 속으로 욕을 뱉고 그를 쏘아보다가 품 안에 넣어둔 서책을 꺼내 내밀었다.
청양은 태연히 서책을 받아 주룩 훑다가 얼굴이 굳었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나를 황당해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럴 것이다. 저 서책은 음란 서책이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서책 하나는 손으로 짚고, 모두가 숨기고 싶어 할 서책 하나는 옷 안에 넣어둔 것이다.
“…….”
청양은 눈썹을 위로 올리고서 책을 이리저리 훑어댔다. 그러면서도 나를 한 번씩 이상한 인간 보듯 쳐다보길 멈추지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척 입술을 오므렸지만 심장이 튀어 나갈 지경이었다. 눈속임으로 챙긴 책은 두 권뿐이었다. 그가 여기서도 속지 않는다면 이젠 증좌까지 뺏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