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웃고 있는 제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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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웃고 있는 제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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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웃고 있는 제자님
2023.03.09.
시집이라니. 제자가 뱉은 단어에 팔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완전히 굳어서 쳐다보자 제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스승님 표정을 보여드리고 싶네요.”
“예……?”
“지금 스승님 표정이요.”
제자는 자기 입술을 누르며 웃었다.
“제자가 그렇게 놀랄 이야기를 했는지요?”
“갑자기 결론이…… 왜 우리 혼사 이야기로 향한 건지 모르겠어요.”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제자는 내 붓으로 내 서책 위에 웃는 표정을 그렸다.
“월무궁은 한적하고 조용하지요. 스승님 저택은 늘 시끄러운 듯하고요.”
여기는 한적한 게 아니라 한산한 거 아닌가.
“스승님이 여기 오실 때 유일하게 이곳이 생동감 있어 진답니다.”
“…….”
“스승님은 조용한 곳에 와 있으니 좋고, 제자는 스승님이 있어 좋고. 서로 좋지 않나요?”
제자가 붓을 벼루에 내려놓고서 내 머리에 달린 장신구를 툭 가볍게 쳤다.
머리를 비키면서 째려보자 그가 미소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싫으신지요? 스승님은 절 사모하시니 제 말에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요.”
“아 물론 좋지요. 싫을 이유가 없지요.”
그가 정곡을 찔렀다. 나는 얼른 만면에 웃음을 드리웠다.
“하지만 전하는 열세 번째 아드님이시니 순서가 오려면 멀었잖아요. 전하와 제가 혼인하려면 몇 해는 지나야 하지요. 원한다고 빨리할 수 없는데 초조해봤자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러고서 적당히 둘러대자 제자가 시무룩한 척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아. 제자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저랑 빨리 혼인하고 싶으세요?”
“그럼요.”
“제가 눈 빼고는 다 못난 박쥐라면서요.”
“…….”
제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미소 지으며 수긍했다.
“그건 그렇지요.”
절대 아니란 말은 안 하는구나. 제자는 사람 마음을 마구 휘저어 놓고서는 혼자 여우처럼 책상으로 걸어갔다. 아주 요괴가 따로 없었다.
제자를 홀리기로 작정한 건 나인데. 왜 제자가 날 홀리려는 거지?
제자가 고의로 저러는 거라면 저놈은 정말 구미호 같은 인간이었다. 고의가 아니라면 저놈은 구미호 중에서도 아주 높은 등급의 구미호일 터였다.
‘회귀 전엔 이렇게 살갑지 않았는데.’
“스승님. 수업해야지요.”
제자가 한껏 꼬리로 내 얼굴을 마구 문지르고 가서는 혼자 고고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서책으로 시선을 내리니 그가 아까 그려놓고 간 웃는 얼굴이 방긋 나를 맞이했다.
인상을 쓰고서 그 표정을 째려보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제자가 다정한 미소를 띠고 있다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저러니까 오히려 더 의심스럽단 말이지…… 역시 이번 역모죄 건은 제자가 터트린 게 아닐까? 원비를 노리기엔 부족해서 이상했는데. 어쩌면 원비가 아니라 날 노린 걸지도 몰라. 날 엿 먹이려고.’
이번 생의 제자 목적이 황위가 아니라 ‘요요화 물 먹이기’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수업하는 내내 나는 제자를 의심하느라 목소리가 흔들렸다.
하지만 수업을 마치고 나서 생각해보니 제자의 이번 생 목적이 ‘요요화 물 먹이기’일 리는 없었다.
그는 회귀 전 자기 측근들을 이번에도 불러모았다. 용정은 뺐지만. 그가 황위에 관심이 없다면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 * *
요요화가 떠난 지 일각 정도가 지났을 무렵. 태감 복장을 한 청양이 나타났다.
“이거 참. 전하. 전하 궁전은 너무 경계가 없는 거 아닙니까.”
청양은 서재 안으로 들어와서는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며 툴툴거렸다.
“낯선 태감이 들어오는데 누구냐고 붙잡는 사람 하나 없네요. 아무나 오가는 곳 같습니다.”
“그편이 편하지.”
청양은 더 투덜거리려다가 그의 주군이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어휴 또 뭘 그리 열심히 하십니까.”
청양은 감탄하면서 다가갔다가 화려가 낙서 중인 걸 발견하고 입꼬리를 내렸다.
화려는 서책에 우는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뭘 이런 걸 그리세요?”
“예전에 스승님께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한 적이 있다. 생일이 아닐 때.”
“?”
“그때 우리 사이는 거의 밑바닥까지 치닫고 있었지. 나는 지쳐서 스승님에게 그림을 하나 그려 달라고 했어. 스승님이 그림을 그리느라 내 얼굴을 쳐다보면 화가 풀릴 거라 여겼거든.”
청양은 어디에서부터 지적해야 좋을지 막막해졌다.
자기 얼굴을 보면 화가 풀릴 거라는 저 막대한 자신감도 이상했고, 스승과 자기 사이가 밑바닥까지 닿았다는 표현도 이상했다.
요요화와 화려는 그리 사이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좋다고 하기에도 좀 애매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셨군요. 그럼 지금 전하가 그리는 그 낙서, 우는 사람이 요 이국사께서 그려준 그림인가 봅니다?”
화려는 의뭉스럽게 어깨를 으쓱하고서 물었다.
“시킨 일은 잘하고 있나?”
“그럼요. 잘하고 있습니다. 구씨 가문 둘째네 집 어멈을 매수한 다음, 요 이국사의 모친이 찾아왔을 때 ‘반역죄에 연루되어 집안이 멸문했지만 시집간 딸과 친척이 입양한 아들은 살아남은 이야기’를 전해 듣게 했지요.”
청양의 목소리에는 조금 빈정거리는 기색이 어렸다.
“잘했다.”
화려는 신경 쓰지 않고 칭찬했다.
청양은 입술을 내밀고서 요요화가 앉는 책상으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제발 이런 것 좀 시키지 마십시오, 전하. 무림에서도 악명을 떨치는 제가 이런 치사한 일이나 해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운귀는 태감이니 나가기 어려워. 유동백이 나서면 다들 무서워서 경계하지. 네가 가장 적절하다, 청양.”
“이번 일이 전하가 황위를 차지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저는 통 모르겠는데요.”
화려는 빙그레 미소 짓고서 손부채질을 해서 낙서를 말렸다.
“내게 필요한 건 스승님이지 요씨 가문이 아니란다. 그러니 스승님만 거기서 빼 오려면 요씨 가문과 스승님의 사이가 멀어져야 해.”
청양은 뚱하게 물었다.
“요씨 가문이 지금 가주 대에서 가세가 조금 줄었지만 그래도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이지 않습니까. 요 이국사와 혼인하면 요씨 가문 힘을 받을 수 있을 텐데요. 굳이 이국사를 그 가문에서 빼낼 필요가 있을까요?”
“그 가문은 필요 없다.”
화려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스승님의 부친은 실권 없는 대신이고 더 위로 올라갈 것 같지도 않아. 스승님의 모친도 야망이 적어 대신의 아내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지.”
“이국사의 동생이 후궁이 아닌가요?”
“그 여인도 별로 내게 도움이 되진 않아.”
청양은 생각하다가 납득했다. 그의 주군은 황제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요 이국사의 동생이 부황의 총애 받는 후궁이 되어 보았자 주군에겐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처제이자 서모가 되는 게 아닌가.
“그래도 요씨 가문은 명문가이니 없는 것보단 나을 텐데요.”
“내 스승은 박쥐 같은 인간이란다.”
“!”
청양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화려는 그리운 이를 말하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청양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다고 여겼다. 저런 얼굴로 스승을 욕하다니.
“그런 신의 없고 간사한 인간은 자기에게 누군가 잘해주면 그대로 넘어가 버리지.”
“지금 전하 스승님 말씀하시는 거 맞죠?”
“그래. 내 스승은 누군가 잘해주면 바로 그쪽에 붙어 버릴 사람이란다. 그러니 주위에 아무도 없게 만들어야 해. 달라붙을 게 나뿐이란 걸 확실하게 알려주지 않으면…….”
“?”
“위험해.”
청양은 입을 벌리고 13황자를 쳐다보았다.
13황자가 자리를 비울 때면 요즘 그와 유동백, 운귀는 요 이국사와 13황자가 대체 무슨 사이인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하지만 주군에게서 스승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 혼란은 더욱 커져갔다. 스승을 곁에 두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스승을 간사하니 박쥐 같니 하며 나쁘게 표현하다니.
하지만 화려는 정말 자신이 느낀 그대로 말한 것뿐이었다. 그가 아는 스승은 가족이 곁에 있으면 가족을 위해서 그를 독살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스승을 안전한 상태로 가까이 두려면 스승이 딛고 서 있는 땅이 그의 몸 외에는 없게 해야 했다. 이건 안전한 미래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처였다.
“되었다. 어차피 나와 스승님의 사이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해.”
“그렇죠…… 문제는 이국사께서도 이해를 못 하는 것 같단 거지요…….”
청양은 화려가 빤히 쳐다보자 입을 다물고 웃었다.
화려는 청양을 혼내는 대신 부드럽게 웃으며 충고했다.
“네가 호기심을 가져도 괜찮아. 하지만 할 일은 하면서 호기심을 충족하거라. 스승님의 부친과 모친이 갈라서게 만들어.”
* * *
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마당을 서성거리던 수길 어멈이 내게로 달려왔다.
“소가주님, 지금 난리도 아니에요.”
수길 어멈은 이곳에서 내가 오기를 내내 기다리고 서 있던 듯했다.
그 표정을 보자마자 관자놀이가 무지하게 아파왔다.
“또 싸우셔?”
“두 분만 싸우시면 그나마 낫지요…….”
수길 어멈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다른 사람도 참전했어?”
수길 어멈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마당과 안뜰 사이로 난 작은 골목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그 좁은 공간에 들어가자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설명했다.
“지금 둘째 나리, 셋째 나리는 물론이고 마님의 오라버니까지 오셔서 아주 난리도 아니에요.”
“뭐? 외삼촌이 왔어? 수사 때문에 바쁘다면서?”
“그분이 아니라 첫째 오라버니요.”
어머니는 아들이 셋 있는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구씨 가문에서 어머니는 그야말로 금지옥엽이었다. 첫째 외숙부로서는 그런 어머니가 둘째 외숙부와 조카들을 돕다가 아버지와 싸움이 붙었으니 끼어들지 않고 못 배길 터였다.
관자놀이가 더욱 아파온다.
“그뿐이 아니에요.”
“또야? 또 누가 끼었는데?”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휙 높아졌다.
수길 어멈의 어깨가 축 아래로 내려갔다.
“어른들이 싸우면 아이들도 같이 싸우기 마련이지요. 마님의 조카들이 나리의 조카들보다 나이가 어리다지만 그렇다고 못 싸울 정도로 어린 건 아니니까요. 지금 나리 조카들과 마님 조카들끼리도 싸우고 있어요.”
머리가 터지기 직전이다. 얼마나 당혹스럽던지 제자가 월무궁에서 조용히 지내면 좋겠다고 한 말이 정말 달콤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회귀 전에는 원비의 집안에 풍파를 몰고 온 사건이 왜 갑자기 여기서 이 난리가 난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가주님이 말리면 좀 들을지도 몰라요. 소가주님은 그래도 이국사시고 폐하께서 최근에 총애하셨으니까요.”
황제가 날 총애했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일단 누군가는 그 진창에 들어가 사람들을 끄집어내야 했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서 수길 어멈에게 말했다.
“어디서 싸우고 있어?”
* * *
“뭐가 그리 어렵습니까? 이 집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양자를 들이는 게 이 집안을 위해서도 아주 좋은 일이지요. 어차피 양자는 소가주 자리에 오르지 못하니 아이 둘을 입양한다고 해서 요화와 경쟁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내당에 딸린 뜰로 가자마자 첫째 외숙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양이 쉬우니 마니 하는 문제가 아닌데 왜 자꾸 그걸 잡고 물어집니까. 반역에 연루된 아이들을 거두어들였다 덩달아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건데요!”
이어서 둘째 숙부가 반박하는 소리가 났다.
“피해를 안 입는단 증거까지 가져왔지 않습니까.”
“그래도 안전하게 가는 게 낫지요.”
“가족끼리 이런 것도 못 돕습니까? 그쪽이 반역죄에 연루된다면 그쪽 아이들을 내 동생에게 맡기지 않을 거냐고요!”
첫째 외숙부는 숙부 셋과 싸우면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었고 아이들은 한구석에서 자기들끼리 목소리를 낮추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다들 주위 소리에 귀는 기울이고 있었는지 동시에 조용해져서 내 쪽을 쳐다보았다.
“계속 싸울 거예요?”
힘없이 묻자마자 어머니와 아버지가 소매를 걷으며 다가와 말했다.
“차라리 잘 왔다. 요화야. 네 생각엔 누구 말이 옳은 것 같으냐? 네 어머니가 너무 오지랖을 부리는 거 같지?”
“요화야. 네 아비가 이렇게 위선적이다. 자기 조카들 일이었다면 이렇게 발을 빼려 하겠니? 아버지가 박정한 거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