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제자의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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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제자의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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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제자의 생일
2023.02.27.
“네가 한 게냐.”
언관이 떠나자 보문 공주가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내가 공주에게 인사를 올리자 월섬도 삐거덕거리며 다급히 같이 허리를 숙였다.
“네가 한 거지?”
보문 공주는 내 인사를 무시하고서 재차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나는 발뺌하고 물었다.
“그런 식으로 넘어가려는 거냐.”
“정말로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갑자기 다가오셔서 그런 질문을 하시다니요.”
보문 공주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네가 언관을 속였지. 그 일을 이야기하는 거다.”
“언관을 속여요?”
“그래.”
나는 눈을 일부러 커다랗게 떴다.
“제가 무슨 수로 언관을 속입니까, 전하. 전 외출했다가 이제 막 돌아가는 길인데요? 언관과 만난 적도 없어요.”
“방금 나와 이야기 나누던 자가 언관이다.”
“소신은 모릅니다, 전하. 오히려 무슨 일로 전하가 우리나라 언관과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그게 더 이상해요.”
뒤에서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월섬이 긴장해서 움찔거리는 듯했다.
“네가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지?”
“그럴 리가요, 전하. 영민한 건 공주 전하시지요.”
“마음 놓지 마라. 이번은 어찌어찌 언관을 속여 넘긴 모양인데…… 내가 계속 널 주시할 거다.”
보문 공주는 나를 싸늘하게 쳐다보다가 돌아서서 멀리 가버렸다.
그녀가 완전히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자 월섬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로 언관이 다녀갔나 봐요.”
“그러게. 설마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다녀갈 줄은 몰랐어. 빠르기도 하지.”
“며칠 전에 소가주님께서 친척들을 모아 놓고 언관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미리 말해두셔서 다행이에요.”
“그러니까.”
“소가주님은 언관이 올 줄 어떻게 아셨어요?”
보문 공주가 예고해주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거다. 보문 공주는 나를 골탕 먹일 생각에 너무 기뻐서 일을 벌이기도 전에 다가와 자랑을 늘어놓는 실수를 해버렸다.
“운이 좋았어. 그래도 다행이지. 한 번 이랬으니, 언관은 보문 공주가 또 비슷한 내용으로 신고하면 안 받아줄 거야.”
아무리 숙부들이 나와 아버지에게 화가 났어도 바보는 아니었다. 언관에게 요씨 가문이 걸린다면 요씨 성을 단 이들이 모두 손해를 보게 된다.
특히 가주인 아버지가 언관에게 책잡히면 숙부들이 탐내는 가산도 위태로웠다.
그러니 숙부들도 언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같이 연극을 해준 거지.
“그래도 조심해야 해. 대문 밖으로 싸우는 소리가 넘어가면 또 누군가 이 일로 해코지할지도 몰라.”
“설마 그러려고요. 소가주님이나 나리는 적이 많이 없잖아요?”
나야 그렇지. 그런데 13황자는 적이 많으니까. 앞으로 더욱 많아질 거고.
“돌아가자.”
* * *
용정이 방 안으로 들어와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보문 공주는 신경질을 부렸다.
“완전히 일이 실패했네!”
용정은 그녀를 살피며 일단 인사부터 올린 후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요요화가 소가주 자리에서 물러나기 싫어하고 그 일로 요씨 가문이 내내 싸우고 있단 이야기를 언관에게 흘렸네. 하지만 언관이 갔을 땐 그 가문 사람들이 합심해서 사이좋은 척 굴고 있었어. 내 체면이 완전히 구겨졌네!”
“이런. 그랬군요.”
“다른 방도는 없는가? 요요화가 날 보면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어. 고작 이국사 따위가!”
용정은 보문 공주를 달래느라 일각 가량을 지체했다.
“공주 전하는 괜찮으신가요?”
용정이 공주가 머무는 전각 밖으로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사내종이 물었다.
용정은 공주가 머무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가서야 대답했다.
“13황자와 공주가 혼인하는 게 내게 대체 무슨 이득이라고 볼 때마다 징징거리는지 모르겠다.”
용정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사내종은 낄낄 웃으며 동의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나리는 공주 전하의 사람도 아니고, 공주 전하가 노리는 혼사가 태월에 중요하지도 않은데 말이지요.”
* * *
보문 공주가 언관을 보낸 일로 숙부들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아버지와 싸우지 않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싸우더라도 다들 이 일이 외부로 흘러가지 않게 신경 쓰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쨌든 그 일 이후로는 보문 공주도 한동안 조용했기에 보름 가까운 날은 평화롭게 지나갔고 무사히 제자의 생일날이 다가왔다.
“붓은? 붓을 내가 어디 뒀더라?”
“상자에 담아 두셨잖아요, 소가주님.”
“그건 알아. 그런데 포장하려고 꺼냈단 말이야.”
생일 당일. 나는 한참 갈팡질팡한 끝에 선물을 바구니 안에 모조리 넣고 그 위를 꽃으로 뒤덮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바리바리 선물을 챙겨 월무궁에 가 보니 막상 생일 주인공이 없었다.
‘뭐야. 어디 갔어?’
이 시기의 제자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당연히 제자의 선물을 챙겨주는 사람도 아주 적었다. 음…… 내 생각엔 나 하나뿐이었던 거 같은데.
그런데 대체 어디 간 거야? 의아하지만 선물은 내 책상에 올려두고 나는 먼저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서 서책을 펼친 다음 오늘 수업할 부분에 문진을 올려둘 때였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제자인가? 그쪽을 쳐다보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늦게 오셨네요.”
나는 친한 척 웃으면서 일어서다가 도로 의자에 앉았다.
‘피 냄새.’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자를 지나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피 냄새가 같이 흘러들어왔다.
비릿한 냄새가 방 안에 밀려왔다가 다시 밖으로 빠져나갔다. 제자가 문을 닫았으나 코끝에는 여전히 피 냄새가 남아 있었다.
밖에서 난 냄새가 아니었다. 제자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하지만 강한 냄새는 아니다. 아주 미약한 냄새…….
“웬 꽃바구니인지요?”
제자가 평이한 어조로 물어보며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걸음걸이는 평소처럼 우아했다. 제자가 다쳐서 나는 피 냄새가 아니었다.
“전, 전하요.”
그걸 감지하자마자 혀가 얼어붙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지?
걱정보다 불신이 먼저 들었으나 나는 애써 말을 이었다.
“전하 생일이잖아요.”
“오늘이었나요?”
“네.”
제자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가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가 허리를 숙이더니 바구니에 얹은 꽃 냄새를 맡았다.
“막 따서 온 꽃이군요.”
제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올해 선물은 꽃바구니입니까? 매번 같은 걸 주시더니. 올해는 다르네요.”
“마음에 안 드세요?”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니요. 결국 그림은 스승님 방에 걸어 두셨나 봅니다.”
제자는 놀리듯 물어보면서 바구니를 들었다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도로 내려놓았다.
“꽃만 든 게 아니군요.”
제자는 나를 흘기듯 바라보았다. 그 태도는 장난치는 미남 같아서 보기 좋았지만 희미한 피 냄새 때문에 좀 섬뜩해 보이기도 했다.
제자는 나를 힐긋거리며 꽃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그는 꽃 무더기 사이에서 길쭉한 상자 두 개와 돌돌 말린 두루마리 하나를 찾아냈다.
“늘 주던 선물을 이번에도 주시는군요.”
제자는 상자 뚜껑을 열기도 전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하고서 놀렸다. 그는 두루마리를 가장 먼저 펼쳤다. 그림을 보는 그의 입꼬리가 위로 조금 올라갔다.
“마음에 드세요?”
“스승님과 제가 함께 꽃구경을 하는군요.”
“싫으세요?”
“그럴 리가요.”
제자는 그림에서 시선을 떼고서 나를 미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좋단 거야 싫단 거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같이 마주 보자 그가 입꼬리를 조금 더 올려 웃었다. 피 냄새만 안 났더라면 안심이 될 정도로 다정한 미소였다.
일부러 못 그리는 척하려고 좀 엉성하게 마무리했는데. 그게 티 나나?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리고 있자니 제자는 그림을 내 책상에 내려 두고서 상자 뚜껑을 차례로 열었다.
제자는 붓을 살펴보다가 마지막으로 비녀를 살피며 소리 없이 웃었다.
“개나리 같은 비녀네요.”
“마음에 드세요?”
“예쁘네요.”
주저하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해드릴게요.”
그의 손에서 비녀를 가져가자 제자가 비녀를 안 주려는 듯 힘을 슬쩍 주다가 손을 놓았다.
“전하, 머리 좀 숙여 주세요.”
하지만 제자가 키가 너무 커서 내가 그의 머리에 비녀를 해주기에는 높낮이가 맞지 않았다.
나는 제자를 내 의자로 데려가 앉혔다. 제자의 머리를 반 정도 묶은 끈을 잡아당기자 그의 머리카락이 내 손위에서 부드럽게 무너져 흘러내렸다.
얘는 머리카락도 비단 같네. 손가락에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이 감기자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해진다.
그에게서 계속 피 냄새가 나지 않았다면 조금 홀릴 것도 같았다.
“전하는 머리카락이 뱀 같네요.”
“칭찬인가요?”
“네. 아주 부드럽고 감촉이 좋아요.”
손을 빗처럼 만들고서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모으자 제자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정도 모은 다음 돌돌 말아 올리고서 거기에 비녀를 찔러넣었다.
제자는 뒤통수가 예뻐서 개나리 비녀를 해도 귀여웠다.
“어떠세요?”
“흘러내리진 않는군요.”
“마음에 드세요?”
“제자는 아직 거울을 안 보았습니다, 스승님.”
“아.”
하지만 안쪽 방으로 내가 멋대로 들어가 제자의 거울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손만 허우적대고 있자니, 제자는 내 의자에서 일어나 완전히 내 쪽으로 돌아섰다.
“이러면 되겠군요.”
그러더니 허리를 굽혀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전하!”
내가 놀라 외쳤으나 제자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스승님의 눈에 제가 비칩니다.”
“!”
“그러네요.”
제자의 눈매가 점점 휘어지더니 눈웃음으로 변했다.
“잘 어울리네요.”
제자는 만족한 척 말하고서 굽혔던 허리를 폈다.
나는 뒤늦게 질색해서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제자가 바스락거리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리가 났지만, 손을 떼지 않았다. 얼굴에 맞닿은 손에서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바스락 소리가 멀어져서 손을 떼보니 제자는 내가 준 선물을 다 챙겨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째려보자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기분 좋은 일이 많군요. 선물 감사합니다, 스승님.”
망측한 놈!
* * *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달아나듯 집으로 돌아갔다.
제자가 내 눈동자를 거울처럼 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코앞에서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걸 생각만 해도 얼굴과 목덜미에 열이 올라왔다.
아주 저놈이 회귀를 거듭하더니 망측하기 짝이 없어졌구나!
그런데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집안 분위기가 몹시 어수선했다.
“무슨 일이냐?”
뛰어가던 하인을 불러 묻자 하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소가주님, 마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어머니가?! 나는 바로 내당으로 달려갔다.
“소가주님, 마님께서 쓰러지셨어요!”
수길 어멈이 약사발을 들고 이동하다가 나를 보자마자 울먹이며 외쳤다.
“어머니!”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아직 의식이 없었다.
방 안에는 약 냄새가 가득했고 의원이 어머니의 손목을 진맥하고 있었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도로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자니 수길 어멈이 약사발을 내려놓고 내게로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이야? 어머니는 건강하셨잖아. 왜 갑자기 쓰러지셨어?”
“마님의 친정에 일이 생겼답니다! 반역죄 증좌가 나왔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