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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집안싸움은 식구들끼리만 (103/159)


103화. 집안싸움은 식구들끼리만
2023.02.23.



 
장보기 과제를 끝내고서 돌아와 보니 대문에서부터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더 안으로 들어가자 비틀거리는 첫째 숙부가 보였다.


“숙부. 요즘 너무 술 많이 드시는 거 아니에요?”

그냥 지나갈까? 고민하다가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게 누구야. 우리 잘난 조카님 아니신가.”

숙부는 반쯤 돌아서더니 내 얼굴을 확인하고 완전히 돌아서며 웃었다. 아이고 술 냄새야.


“술에 완전히 취하셨네요.”

“화가 나니 술을 안 마시고 배기나.”

숙부는 코웃음을 치면서 내가 입은 행색을 위아래로 살폈다. 마땅치 않아 하는 표정을 보니, 아직 내가 남장한 게 싫은 모양이다.


“뭐가 그리 화가 나시는데요?”

그래도 모른 척 묻자 숙부가 재차 코웃음을 쳤다.


“형님이 널 너무 너그럽게 길렀어. 부녀 둘이서 집안 망신을 줘 놓고서도 아주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구나.”

그러더니 위협할 듯 다가왔다.


“말을 조심해주세요!”

내 시비인 월섬은 바로 내 앞을 막아섰다.


“흥.”

숙부는 더 시비를 거는 대신 돌아서서 다시 걸어갔다. 이왕 발이 꼬인 김에 한 번 넘어져도 괜찮을 텐데. 그러진 않는다.


“제일 속상하고 곤란한 분은 우리 소가주님인데 왜 소가주님한테 저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월섬은 숙부가 사라지자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리도 좀 그래요.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동생들 성격을 아실 거잖아요. 불러봤자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면 그냥 부르지 마시지.”

동감이었다. 그냥 부르지 마시지.


“처음에는 안 싸우고 의견도 잘 나누었잖아. 해결 방법이 없으니 점점 더 날카로워지시는 거겠지.”

“그건 그래요.”

“됐다. 숙부와 싸워봐야 우리만 혼나지. 가자.”

 

* * *

하지만 막상 방 안에 들어와 제자에게 줄 그림을 그리고 있자니 불안한 마음이 치솟았다.

숙부들과 싸운 지도 벌써 닷새가 지났다. 그때 싸운 뒤 첫째 숙부는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내내 술을 마시며 지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소가주님?”

“숙부 때문에.”

“역시 화나시죠. 마님께 이를까요?”

“어머니한테 일러도 무슨 소용이겠어.”

먹물이 종이에 스며들까 봐 나는 붓을 벼루 위에 얹어두었다.

월섬은 가져온 백색 찻잔을 책상 변두리에 놓았다.


“그래도 너무 술을 많이 드세요. 셋째 나리나 넷째 나리는 안 그러시는데 둘째 나리만 저러시잖아요.”

“사실 그게 걱정이야. 술에 취하면 온갖 이야기를 다 하게 되잖아.”

특히 첫째 숙부는 술을 많이 마시긴 하지만 주량은 세 보이지 않았다.


“술 마시고서 우리 집안 이야기를 여기저기 다 하고 다니면 어쩌지?”

월섬은 나를 멀뚱멀뚱 보다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설마요. 그러진 않으실 거예요. 이번 일 전에는 나리들은 모두 친하셨잖아요.”

 

* * *

하지만 가까스로 누른 불안감은 다음날. 월무궁에 가던 도중 보문 공주를 만나자 다시 치밀어올랐다.


“이국사. 요즘 집안일이 말이 아니라면서.”

“공주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집안 단속을 좀 하는 게 좋겠네. 자네는 전하의 스승 아닌가. 자네가 전하께 폐가 되면 안 되지.”

보문 공주는 내게 인사 삼아 악담과 조언 사이의 말을 건넸다. 심지어 아주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일련의 사건으로 보문 공주는 날 싫어하는 데도 말이다.

공주의 저 말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월무궁에 도착해서도 수업을 하는 내내 보문 공주를 머리에서 밀어내기 힘들었다.


‘안 그래도 며칠 내내 첫째 숙부 때문에 집 분위기가 꼴이 아니지. 그런데 보문 공주가 나한테 우리 집 분위기를 단속하라고 했어. 우리 집 사정을 알고 있단 거야. 이상하지. 여기 계속 살던 사람도 아니고 외국 공주잖아?’

“스승님. 수업 안 하실 건지요?”

“해야지요. 하고 있어요.”

“계속 서책만 노려보고 계십니다.”

제자가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다시 집중하려 애쓰다가,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빠르게 돌아왔다.

제자에게 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 꽤 그럴듯한 가정이 떠올랐다.


‘공주가 무언가 꿍꿍이를 세워서 안 좋은 일을 한 거 같아. 분명 뭔가를 했어. 하지만 어떻게 했을까?’

내 방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짐을 풀지도 않고 침대에 엎어졌다.


‘머리를 굴려야 해. 보문 공주가 무슨 꿍꿍이를 부렸을지 생각해보자. 그 공주가 전생에 어떤 계책을 꾸미다 돌아갔지? 젠장. 나랑 직접 부딪친 게 아니니 아는 게 적은데…….’

“소가주님. 식사하시겠어요?”

“아니. 나중에 할게.”

월섬이 상을 차려 오는 것도 물리고서 나는 빈속으로 밤까지 고민했다. 그 덕인지 마침내 실마리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공주는 외국인이지. 황후나 후궁들처럼 바로 나나 제자에게 손을 쓰긴 어려운 처지야. 우리한테 함부로 했다가는 국가 문제로 비화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분명 남을 거쳤을 건데…… 누구를 거쳤을까.’

 

* * *



“아이고 자주 오시네요.”

요 가주의 첫째 동생 요고원이 술집 안으로 들어가자 점원이 바로 얼굴을 알아보았다.


“늘 마시던 거로 가져오너라.”

요고원은 항상 앉던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점원은 재빨리 부엌으로 뛰어갔다. 점원이 커다란 쟁반을 갖고 돌아올 즈음, 요고원의 맞은편에는 덩치가 큰 사람이 앉아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점원은 가져온 술병과 술잔 두 개를 둘 사이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요고원은 위협적인 덩치가 곁에 앉았는데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술잔 하나를 건네며 아는 체했다.


“동생도 여기 참 자주 오는군. 매일 이리 술집만 다니면 가족들이 좋아하나?”

그 덩치는 보문 공주의 정보원이었다. 정보원은 늘 그렇듯 요고원에게 집안일에 관해 캐물었다.

요고원은 술을 입안에 퍼부어대면서 가족들을 흉보았다.

* * *



“이야기를 들어 보니 요즘 요씨 가문은 한창 개싸움 중이라고 합니다.”

다음날. 정보원은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보문 공주에게 털어놓았다.

보문 공주는 바로 즐거워졌다.


“개싸움?”

“예. 친인척들도 거기 소가주가 남장한 일을 몰랐던 터라 그걸로 이래저래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습니다.”

보문 공주는 차를 마시려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제 발로 무덤을 잘 파고 있구나.“

”이제 어찌할까요?“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는 알고?”

“아니요. 그냥 퉁쳐서 형제들이라고만 부르다 보니 정확히 누가 싸우는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자가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상대는 큰형인 요 가주였지요.”

“그거면 됐다.”

공주는 흐뭇해졌다.


“수고 많았다.”

품 안에서 금화를 꺼내 내밀자 정보원은 얼른 받아들었다.

정보원이 나가자 곁에 서 있던 궁녀가 밝은 얼굴의 공주에게 물었다.


“이걸로 충분할까요?”

“그럼.”

보문 공주는 당당히 말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가자. 이 이야기를 언관에게 전해야겠다. 아주 재미있겠구나.”

 

* * *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라 나는 오후 늦게까지 그림에 매달리다가 팔이 아파서 붓을 내려놓았다.


“전하께서 아주 좋아하시겠네요. 소가주님은 정말 그림을 잘 그리세요.”

월섬은 한가득 종이에 피어난 개나리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괜찮아 보여?”

“그럼요. 소가주님 그림 솜씨야 옛날부터…….”

왜 말을 하다 말지?


“어라. 그러고 보니 소가주님, 그림 솜씨가 갑자기 더 좋아지셨네요!”

“!”

월섬의 말에 나는 스스로의 멍청함을 꾸짖었다. 이 바보! 회귀한 나는 당연히 회귀 전 나보다 그림을 더 잘 그렸다. 어째서 이걸 까먹고 있었지?


“소가주님, 소가주님은 학문도 잘하시는데 그림까지 잘 그리시니 정말 대단해요.”

월섬은 열심히 아부했지만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젠장. 이를 어째.

며칠 전 제자가 내 그림을 보고 이상하단 생각은 못 했을 거다. 그땐 구도만 잡으러 간 거라 이리저리 간단하게 선을 그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완성작을 보면 이상하게 여길 거야. 죽기 전까지 나는 매년 그에게 그림을 주었으니까.


“소가주님? 제가 너무 과하게 칭찬했나요?”

“아니야. 그 문제가 아니야.”

“?”

“전하께 그림을 이렇게 잘 그려주면 안 되거든.”

“예? 왜요?”

그야 그 눈치 좋은 제자놈은 내 그림 솜씨를 보면 내가 회귀했다는 걸 알아차릴 테니까.

하지만 어쩌지. 그렇다고 완전히 엉망으로 그려서 줄 수도 없다. 엉터리 그림을 그려서 건네면 제자는 내가 자기를 모욕한다고 여길 거다.

고민 끝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 좀 다녀올게.”

여기서 그림을 붙잡고 있어 봐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어차피 제자 선물로 붓과 비녀도 주어야 하니 좀 돌아다니다 와야겠다.

* * *



“언관은?”

“출발했다고 합니다.”

보문 공주는 언관이 요씨 가문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불시에 출발했단 이야기를 듣자, 얼른 피풍의를 걸치고 삿갓을 챙겨 나갔다.

요고원이 말하기를, 그 형제들은 지금 수시로 싸워대고 있다 했다.

윗사람들이 싸우니 당연히 그들이 데려온 하인과 하녀들끼리도 싸워대서 요씨 가문 전체에 살벌한 기운이 늘 감돈다고 했다.

어디에 서 있든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올 지경이라 했으니, 필시 언관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직접 가서 보시려고요?”

“그래. 요요화가 오늘은 집에 있는 날이지? 언관에게 이 일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을 이 눈으로 구경해야겠다.”

보문 공주는 신이 나서 마차에 올라탔다.

요씨 가문 근처에 도착한 그녀는 마차에서 내려 정문 근처의 큰 나무 뒤에 자리 잡았다.

잠시 기다리자 평범한 학자처럼 차려입은 언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관은 호위나 종을 두지도 않고서 요씨 가문 대문을 두드렸다.


“네. 뉘십니까?”

문이 열리고 곧 하인이 문을 열어주자 언관이 무어라 둘러대는 게 보였다. 하인은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언관을 데리고 들어갔다.

보문 공주는 기뻐서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언관은 아주 조금이라도 요씨 가문에서 이상한 걸 발견하면 기록해두었다가 황제에게 고할 터였다.

황제가 노하면 요요화와 13황자의 혼인을 엎어버릴지도 몰랐다. 아직 정혼만 한 거고 실제로 부부의 연을 맺은 건 아니니까.


“언관이 집을 돌아보는 데 보통 얼마나 걸리지?”

“이곳은 화음이라……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전하.”

“그래도 저 저택을 다 돌아보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보문 공주는 차분하고 느긋하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지루해질 즈음. 마침내 대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언관이 빠져나왔다.


‘나왔다!’

보문 공주는 기뻐서 웃었다. 그러나 언관의 뒤에는 따라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요요화나 요씨 가주, 아니면 요요화의 어머니라도 언관을 따라갈 거라 여겼는데. 언관은 오롯이 혼자였다.


‘뭐지?’

언관이 느긋하게 궁궐로 걸어가는 걸 지켜보다가 공주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잠시만.”

공주가 다가가며 삿갓을 살짝 위로 올리자, 언관은 신고자인 공주를 알아보고서 얼른 인사했다.


“공주 전하. 호위도 적게 거느리고 여기엔 어쩐 일이십니까?”

“자네, 자네 왜 갔다가 그냥 나오나? 원래 이런 건가?”

“그냥 나오다니요?”

“요씨 가문에서 가산을 가지고 지금 굉장히 다툰다고 하지 않았던가. 요요화가 소가주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하지 않아서 말이야. 난 자네가…… 뭔가…… 하여튼 이렇게 조용하게 들어갔다 나올 줄은 몰랐는데.”

“아. 계속 보셨군요. 하지만 분위기는 아주 평화로웠습니다, 전하.”

“평화로웠다고?”

“예. 불시에 여기저기 다녔지만 누구도 싸우지 않고 있던걸요.”

“요고원은 술집에서 내내 자기 형제와 조카를 욕하고 다녔네. 요요화가 소가주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면서 말이야. 그 부분은?”

“요고원에게 물어보니, 갑갑해서 싸운 건 맞답니다. 하지만 조카 때문이 아니라 요 이국사 다음 순서로 소가주 자리에 올릴 항렬이 여럿이어서 갑갑한 거라더군요.”

“그럴 리가!”

말도 안 된다고 외치려던 보문 공주는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보고 있는 요요화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요요화는 그녀가 뭘 했는지 다 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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