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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가산 싸움 (101/159)


101화. 가산 싸움
2023.02.16.



 


“그 남장 여자가 내 계획을 죄다 망쳐놓았네.”

보문 공주가 탁상을 내려치자 위에 놓인 찻잔들이 차르르 울렸다.


“고정하시지요.”

용정은 태연하게 그녀를 말렸으나 그리 소용은 없었다.

보문 공주는 탁자에서 손을 떼고서 벽에 걸린 그림을 쏘아보았다.

황후의 방에서 나선 뒤, 그녀는 곧장 용정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와 요요화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어차피 용정은 그녀가 13황자와 혼인하고 싶어 하던 걸 알았으니 숨길 필요가 없었다.


“화음 황후와 공주 전하가 친해 보이시니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일이 잘 풀리는 줄만 알았지요.”

“황후는 날 마음에 들어 하네. 황후는 나와 고부 관계가 되고 싶어 하지. 하지만 13황자 전하는…… 완전히 그 요망한 남장 여자한테 홀리셨네.”

보문 공주는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창문을 죄다 열어버렸다. 봄바람이 선선하게 흘러들어왔으나 그녀를 진정시키진 못했다.


“나는 요요화 때문에 두 번이나 망신을 당했지. 그것도 둘 다 13황자 앞에서!”

“듣자 하니 13황자는 외가도 없고 지지자도 없고 황제에게 총애도 받지 못하는 구박덩이라던데요. 대체 얼마나 외모가 출중하기에 공주 전하께서 이리 원하시나 궁금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선인처럼 생겼네. 13황자와 혼인한다면 성격이 아무리 달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그 정도로 잘생겼다네.”

보문 공주의 말에 용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주는 다시 의자에 앉으며 그를 졸랐다.


“용 대인, 어떻게 해야 13황자의 혼담을 깰 수 있겠나? 황후는 나더러 13황자와 사이좋게 지내면서 기다리라고 하지만 13황자는 뭘 하고 다니는지 만나기도 쉽지 않아.”

용정은 픽 웃던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굳이 그 남장 여자와 공주 전하가 부딪칠 필요는 없습니다.”

“어째서?”

“그 남장 여자는 아마 자기 가문 일로도 바쁠 겁니다. 아니면 곧 바빠지겠지요. 공주 전하께선 진흙탕에 발을 담그지 마시고 그저 기다리기만 하시면 됩니다.”

“기다리다가 그 둘이 사고라도 치면 어쩐단 말인가. 요요화는 하루가 멀다 하고 13황자 전하를 찾아가 둘이서만 붙어 있단 말이네!”

“그러면 요요화의 가문을 조금 휘저으시지요. 그걸 감당하느라 바빠서 빈틈을 보일 겁니다.”

“자네가 내게 지혜를 주게. 용 대인, 너무 막연하게 말하지 좀 말고. 응?”

“공주 전하의 적이 누구인지를 중심으로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직접 하셔야지요.”

보문 공주가 좀 더 졸랐으나 용정은 거기까지 딱 선을 자르고 일어났다.


“참으로 너무하는군!”

보문 공주가 따라 일어나며 질책했으나, 용정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원래 저렇게 거만한 분이신가요?”

용정이 나가자, 보문 공주의 새로운 궁녀가 곁에서 물었다. 그 궁녀는 태월에서도 용정을 만난 일이 없었다.


“그렇긴 하지.”

보문 공주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하지만 인정하고 나자, 지금 자신의 상황이 떠올랐다. 자국에서 온 아군을 욕할 때가 아니었다.

공주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기분은 나쁘지만 용정의 충고는 새겨들을 만하지. 경린아. 너는 사람을 시켜서 앞으로 요씨 가문을 잘 지켜보도록 해라.”

“요씨 가문 사람들 전체를 보면 될까요?”

“그래. 그러다가 소가주 문제로 얽힌 이들이 누구일지, 요요화가 소가주 자리를 잃게 된다면 누가 물려받게 될지 등 그 가족 관계도 잘 살펴보고.”

“그러겠습니다, 전하.”

 

* * *



‘제자는 자기 측근이 황후한테 갔는데.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용정을 본 이후 이틀간 나는 제자를 열심히 살폈다. 하지만 제자는 태연자약했다. 그는 용정의 존재에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전하.”

“네, 스승님.”

“전에 황후마마 상궁이 데려가던 그자 있잖아요.”

“예.”

“보문 공주랑 같이 걸어 다니는 걸 봤어요. 둘이 친해 보이던데요?”

결국 불안해져서 나는 대놓고 용정 이야기를 꺼냈다.

죽지 않기 위해 내 원수인 제자에게 이렇게 열심히 붙어 지내고 있는데. 막상 제자가 황위를 차지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 손에 죽게 된다면 억울해서 못 견디지.


“그렇습니까.”

그러나 여전히 제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대체 누구일까요? 누군데 황후마마와 보문 공주가 챙기는 걸까요? 안 궁금하세요?”

“그자에게 왜 이리 관심을 보이십니까?”

“네?”

“그런 얼굴이 스승님의 취향이던가요?”

오히려 제자는 엉뚱하게 이런 데나 관심을 기울였다.


“그게 중요해요?”

“자기 배우자 될 사람이 정숙하지 못하다면 누구라도 신경 쓰게 되지요.”

말이나 요따위로 해 대고!


“그러세요…….”

내가 기운이 빠져 중얼거리자, 제자는 말없이 나를 힐긋거렸다. 그러고는 수업이 끝났을 즈음. 먼저 나서서 물었다.


“스승님은 정말로 그자에게 왜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건지요?”

“예?”

“얼굴이 취향도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자에게 그리 관심을 기울이시는지요? 그저 황후나 보문 공주 곁에 있던 사람일 뿐인데요.”

“보문 공주는 계속 제게 시비를 걸었잖아요, 폐하. 황후마마는 저와 전하를 자꾸 공격했고요. 그 둘과 같이 있는 낯선 사람이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요.”

“…….”

제자의 시선이 거북해졌다. 나는 붓을 통에 집어넣고 남은 먹물을 종이로 닦아내면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내가 자꾸 용정을 신경 쓰니까 제자 눈에 이상하게 보였나? 제자가 내게 회귀 전 기억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나?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버텼다. 여기서 수상할까 봐 말을 이것저것 더 덧붙이면 더 수상하게 된다. 그냥 이대로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전하.”

나는 수업 도구를 정리하자마자 일어났다. 제자는 곁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며 물었다.


“스승님.”

“예?”

“혹시 제자를 걱정하시는지요?”

 
말도 안 된다고 외치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 정확히는 그로 인해 내게 발생할 불똥을 걱정하는 거지만.’

“맞아요. 혹시 그자가 전하에게 해가 될까봐 걱정하고 있어요. 전 자나 깨나 전하 생각이니까요.”

 

* * *



“전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운귀가 들어오며 하는 말에 화려는 표정을 단속했다. 운귀는 과일이 담긴 바구니를 화려의 책상 옆에 내려놓았다.


“기분이 나빠 보이기도 하시고…….”

“그런 일이 있다.”

“요 이국사에 대한 일인가 봅니다.”

“!”

“전하께서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건 이국사가 얽혀 있을 때뿐이니까요.”

화려는 대답하지 않고서 조용히 화병에 담긴 꽃을 만지작거렸다.

운귀는 그 모습을 신기해서 구경하다가 물었다.


“전하. 그보다 전하께서 용정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까?”

“두었지.”

“그자가 입국했습니다. 하지만 황후궁에 자주 찾아간다던데요. 괜찮을까 모르겠습니다.”

화려의 입매가 한층 더 올라갔다. 운귀의 염려가 내내 스승이 떠들던 말과 다르지 않아서였다.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내 생일날 대비나 확실하게 해두거라.”

 

* * *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다. 하지만 당장 제자가 용정에게 관심을 안 보이는데, 내가 그를 쫓아다니면서 용정을 신경 쓰라고 잔소리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제자에게 그 이야기 하는 걸 관두고 집에 틀어박혀 존 더 현실적인 고민을 시작했다.


“곧 제자 생일인데. 무얼 주지?”

“매해 소가주님은 그걸 고민하시네요.”

시비인 월섬은 찻잔을 탁자 앞에 내려주면서 웃었다.


“이번에도 늘 보내는 걸 보내실 거지요?”

“그래야지. 그편이 무난하니까.”

월섬이 나간 뒤에도 나는 탁자 앞에 앉아 제자에게 보낼 선물을 떠올렸다.

평소대로 붓과 비녀, 그림을 보내길 할 거다.

하지만 고급 붓과 비녀는 공들여서 아름다운 걸 사면 될 뿐이지만, 그림에는 성의가 들여가야 하니까. 도중에 잘못 그리게 될지도 모르니 슬슬 시작해야지.


’내가 회귀 전엔 뭘 그려줬더라?‘

한참 고민하다가 나는 그냥 최근의 일을 그림으로 그려주기로 했다. 회귀 전과 회귀 후에 달라진 일들이 하나 두 개가 아니잖아. 그림도 꼭 회귀 전 그대로 그려줄 필요는 없지.

그런데 한참 밑그림을 그려 보면서 이것저것 그려 보고 있을 때였다.


“소가주님, 소가주님.”

수길 어멈이 다급히 내 방으로 들어오더니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지금 빨리 가주님 방에 가셔야겠습니다.”

“왜 그래?”

“숙부님들과 나리가 싸우고 있습니다. 마님께서 말리려 하셨지만 듣질 않아요. 벌써 반 각은 싸워대고 있습니다. 이를 어쩌지요?”

수길댁이 내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는 건 주먹다짐이 오가기 직전이란 뜻이었다.

나는 붓과 벼루를 그대로 두고 수길 어멈을 따라 내당으로 뛰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가득 흩어진 쓰레기 종이 뭉치들이 들어왔다.

아버지와 숙부들은 모두 서서 배를 내밀고 있었다. 그 뒤로 의자들이 다 저만치씩 밀려나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내가 묻자 아버지가 의자를 끌어다 도로 앉으며 말했다.


“네 숙부들 말하는 걸 좀 들어 보거라, 요화야. 아주 가관도 아니다.”

“애한테 뭘 이런 걸 다 말씀하십니까?”

막내 숙부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신데 그래요?”

“아니다. 너는 가거라. 네가 낄 일이 아니다.”

둘째 숙부가 말했다.

거기에 반응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차갑게 말했다.


“요화는 소가주인데 당연히 들을 건 들어야지. 요화가 낄 일이 아니라니.”

첫째 숙부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빈정거렸다.


“무슨 소립니까 형님. 요화가 소가주인 건 사내아이일 때이지요. 요화는 여자아이이니 이제 소가주가 아닙니다.”

“아직 요화가 소가주다. 어쩌면 계속 소가주일지도 모르지.”

숙부들이 동시에 마구 비난하는 소리를 퍼부었다. 그러더니 첫째 숙부가 얼른 말했다.


“형님이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내 딸들도 이 자리에 데려오겠습니다. 그 아이들도 자격이 있으니까요. 내 딸들과 요화가 다를 게 무어랍니까?”

수길 어멈이 초조하게 발을 움직였다.

나는 수길 어멈에게 나가보라고 눈짓한 다음, 적당히 틈을 보아서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일로 싸우시는 건데요?”

“네 숙부들이 어차피 네가 소가주 자리를 지키지 못할 테니, 차라리 가산을 팔아서 분배하자고 그런다.”

“가산을요?”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숙부들은 분가할 때 이미 자기 몫의 재산으로 가산의 1/4을 받아 갔다. 린화가 혼수로 가산의 반을 가져간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가산을 팔아서 또 분배하자니?


“팔지 않아도 되는 가산은 모두 우리 부모님 거예요. 팔아야 하는 가산은 가문에 얽혀 있어서 함부로 팔 수 없어요. 그런데 대체 뭘 팔아서 나누자는 거예요?”

내가 나서자 아버지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나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째 숙부가 얼른 말했다.


“그럼 요화야, 너는 우리 가문 재산을 왕래도 없는 친척들에게 다 주자는 거냐?”

“그래. 우리 아버지,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께서 온 힘을 다해서 가꾼 재산을 남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에게 넘기자고?”

뭐라는 거야? 나는 기가 막혀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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