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꽃다발과 꽃바구니
(99/159)
99화. 꽃다발과 꽃바구니
(99/159)
99화. 꽃다발과 꽃바구니
2023.02.09.
3황자가 요요화에게 꽃다발을 보냈다고? 3황자가?
화려의 눈치를 보며 심하가가 쩔쩔맸다.
“전하. 소인이 혹여 말을 잘못했는지요?”
화려는 자신이 표정을 관리하지 못한 걸 깨닫고 바로 표정을 통제했다.
“아니다. 이미 스승님이 꽃다발을 받았다니 꽃바구니를 좋아할지 모르겠군.”
화려는 손을 넣어 꽃바구니에 그가 직접 골라 넣은 수북한 꽃들을 휘저었다. 스승이 이번에도 배신하려는 걸까?
3황자는 요요화가 수많은 삶 동안 내내 좋아한 사내였다. 두 사람이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요요화는 짧든 길든 늘 3황자를 사모했다.
그러고 보니 귀여워서 넘어갔는데. 요요화가 암시장에는 왜 갔던 거였을까. 스승이 암시장에 볼일이 무엇이 있어서?
“전하? 꽃이 다 떨어집니다…….”
심하가가 조심스럽게 화려를 불렀다.
화려는 바구니에서 손을 치웠다.
“정확히 셋째 형님이 스승님에게 꽃다발을 준 게 언제였지?”
“저번 달 29일이었습니다, 전하. 대화원을 지나가다가 발견했지요.”
심하가는 주저하다가 덧붙였다.
“그냥 우연이 마주친 거였고 오래 같이 있으시지도 않았습니다.”
화려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연히 마주쳐서 꽃다발을 준다면 그사이가 더욱더 의심스럽지 않나?
3황자는 여러 번 회귀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적대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화려는 3황자가 워낙 온순하고 몸이 약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승과 얽히자 3황자도 수상하게 여겨졌다.
“전하?”
심하가가 목을 쭉 내밀었다.
“꽃바구니를 보문 공주에게 가져다주어라.”
화려는 말을 바꾸고 돌아섰다.
“예? 보문 공주님이요? 이국사님이 아니라요?”
심하가는 펄쩍 뛰며 물었다. 심하가는 게을렀으나 기양이 보문 공주를 욕하는 걸 들어서 요요화와 보문 공주 사이의 원한에 대해서는 알았다.
그런데 13황자가 보문 공주에게 꽃바구니를 보내다니. 요요화보다 공주를 편든다는 신호인 건가?
화려는 대답하지 않고 걸어갔다.
심하가는 입을 벌리고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자기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아이고 골치야. 진짜 공주한테 전하면 되는 건가?”
* * *
이 광경을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린화가 지켜보고 있었다.
“참으로 재밌게 되었구나.”
13황자가 자리를 떠나고, 그의 태감도 바구니를 끌어안은 채 떠나자 린화는 입꼬리를 올렸다.
“언니가 사모해 마지않는 13황자가 보문 공주에게 꽃을 보내다니.”
“안 그렇게 생기셔서는 13황자님도 참. 이 여자 저 여자 다 찔러보시네요.”
린화의 사가 궁녀인 월미가 혀를 찼다.
“안 그렇게 생기다니.”
린화는 월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13황자와 똑같이 생긴 폐하가 호색한데 저 얼굴이 점잖은 용모일 리가.”
“그도 그렇습니다. 소주의 말이 맞아요.”
린화는 턱을 괴고서, 바쁘게 움직이는 태감들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그보다 한층 더 바쁘게 린화의 머리가 굴러갔다.
“좋아.”
마침내 결정을 내린 린화가 미소 지으며 지시했다.
“동생으로서 장차 형부가 될 사람이 한눈파는 걸 볼 수는 없지.”
“네?”
“요요화에게 가서 13황자가 보문 공주에게 꽃바구니를 보냈단 이야기를 전하거라. 사람들 앞에서도 전혀 체면 차리지 않고 그랬다고 강조해서.”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게 무엇이냐. 내가 없던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닌데.”
린화는 쌀쌀맞게 대답하며 아까 꽃놀이를 할 때를 떠올렸다. 황제는 요요화가 무어라 말을 하자마자 대번에 그녀를 편들었다.
다른 형제자매들이 13황자를 모욕할 때는 가만히 있었으면서 말이다.
그걸 보면서도 다른 후궁들은 별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린화는 황제가 요요화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린화에게는 그 광경이 의미심장했다.
“기껏 화해했는데. 괜찮을까요?”
“화해했으니 더욱 알려 주어야지. 요요화는 13황자를 좋아하니까.”
* * *
“전하가 보문 공주한테 꽃을 보냈다고?”
저녁 무렵. 린화가 보낸 사람이 찾아와 묘한 말을 전했다.
“네, 소가주님. 소주께서 그걸 보시고는 얼마나 화를 내셨는지 모릅니다.”
월미는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과할 정도로 씩씩거렸다.
“린화가?”
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요화가 그걸 보고 화내줄 사람인가?
“싸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소주님은 소가주님의 하나뿐인 동복 자매인걸요.”
“그렇구나.”
하지만 화나서 전해준 건 아닐 거야. 아주 잘됐다 싶어서 전해주었겠지. 린화가 그 광경을 보고서 좋아하는 표정이 눈에 선하다.
“알았다.”
“소가주님께서도 소주께 전할 말이 있으신지요?”
“멍청이라고 전해줘.”
월미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로요?”
“어. 속 다 보인다, 멍청이야. 라고 전해줘.”
월미가 창백한 얼굴로 나가자, 곁에 서 있던 월섬이 대번에 투덜거렸다.
“린화 아가씨는 진짜 속이 다 보이시네요!”
“그렇지.”
나는 침대로 가서 드러누웠다. 원래도 월미가 오기 전엔 이러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긴 해요. 소가주님은 괜찮으세요?”
“나도 기분 나빠.”
기분이 나쁠 뿐일까. 자존심이 상한다.
나는 제자가 이젠 나를 이전만큼 미워하지는 않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안도하고 기뻐했는지 모른다.
보문 공주가 내게 시비를 걸 때 제자가 자연스럽게 내 편을 들어주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뒤에서는 그 공주에게 꽃바구니를 보내고 있고…….
“혹시 아가씨가 거짓말한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닐 거야. 이런 말은 물어보면 금세 진위를 알 수 있잖아.”
그냥 답은 하나였다. 13황자는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 * *
꽃바구니 건으로 화가 났지만, 나는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오히려 다음날 입궐하는 길에 거리에서 꽃다발을 한 묶음 샀다.
“이거요.”
그걸 월무궁으로 가서 제자에게 내밀자, 제자가 책상 앞에 거만하게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엇인지요.”
“꽃이요.”
나는 제자의 서책 위에 꽃다발을 내려놓고 내 책상으로 걸어갔다.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그래도 이를 내색하면 안 된다. 나는 ‘13황자를 사모하는 요요화’이고 ‘13황자에게 아무 해도 안 되는 요요화’이고 ‘13황자가 없으면 죽는 요요화’여야 하니까.
“갑자기 웬 꽃인지요.”
제자는 꽃다발에 손도 대지 않고서 물었다.
“어제 꽃놀이를 할 때요. 전하가 꽃나무를 보고 있으니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걸 보고 나서 생각했지요.”
나는 입에 침을 바르고 거짓말했다.
“화원에서 꽃을 꺾어도 될 텐데요.”
“저는 황친이 아니라 화원에서 꽃을 못 꺾어요, 전하. 그러니 사 온 거지요.”
“그렇군요.”
제자는 심드렁하게 대답하고서 내가 준 꽃다발을 들어올렸다. 꽃다발 사이에 그가 얼굴을 가져가자 빌어먹게도 잘나 보였다.
“좋군요.”
제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노를 누르고 아부한 효과가 없진 않은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인가.
“살다 보니 스승님이 제게 꽃을 주는 날도 오는군요.”
아닌가. 아부 효과가 없는 건가. 저 새끼는 감상을 왜 저리 음울하게 말해?
“마음에 드시는 거죠?”
찝찝해서 묻자 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듭니다.”
“진짜죠?”
“왜 그렇게 물어보시는지요? 제자는 스승님이 준 꽃이 마음에 듭니다.”
제자는 내가 자꾸 캐묻자 증거를 보여주겠다는 듯 꽃다발을 품에 안더니 날 보며 수려하게 웃었다.
못된 자식. 잘생겼기는.
“마음에 드시면 됐구요…….”
나는 중얼거리고서 서책을 펼쳤다.
“하지만 의외로군요.”
“뭐가요?”
“제자는 보문 공주에게 꽃바구니를 보냈거든요. 스승님도 이 소식을 들으셨을 테니 화나셨을 거라 여겼는데요.”
나는 서책을 넘기다가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제 제가 꽃바구니를 준비하는 동안 요 귀인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더군요. 스승님의 동생이라면 필시 이 소식을 전했겠지요. 좋은 의도는 아니겠지만요.”
제자가 린화 성질머리를 꿰뚫고 있구나!
무의식중에 입을 벌렸다가 나는 다급히 도로 닫았다. 하지만 이미 제자의 입꼬리에는 우리 자매를 비웃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동생은 언니 열 받으라고 그 소식을 전하고, 언니는 자존심 없게도 그 소식을 듣고서도 꽃다발이나 들고 살살거리니 우스운 듯했다.
‘이…… 나쁜 놈!’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방 안을 뛰쳐나왔다. 침착하게 굴고 싶지만, 화가 치밀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제자가 뻔히 다 알고 있는데도 그 앞에서 몸을 숙이고 비굴하게 굴었단 생각이 들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 건 알아도 좀 모른 척해주면 어디 덧나나?
“어디 가시는지요?”
제자는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와서는 긴 다리를 이용해 느긋하게 옆에서 걸으며 물었다.
“집에 갈 겁니다!”
“수업은요?”
“거부합니다!”
제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수업을 거부하신다고요?”
“네!”
단호하게 말하고서 월무궁 밖으로 나가는데, 제자가 뒤에서 나를 들어올려 도로 문 안에 집어넣었다.
“무슨 짓이세요!”
잠시 멍하게 섰다가 황당해서 항의하자 그가 짓궂게 웃었다.
“왜 이리 화를 내시는지요?”
“화내지 않았습니다.”
“화내는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전 빌어먹을 꽃바구니 얘기를 듣고서도 전하께 꽃다발을 가져다주었어요. 저는 대범하게 굴었다고요!”
제자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전혀 대범하지 않으신데요?”
“전하가 그 꽃바구니 얘기를 하면서 저를 놀리시니까요.”
“그 말은…… 제자가 공주에게 꽃바구니를 보낸 게 싫단 뜻인지요?”
“물론입니다!”
“어째서요?”
어째서긴! 네가 보문 공주와 내가 싸울 때 내 편을 들은 다음 그 공주에게 꽃바구니를 보냈으니까 그렇지!
나는 그 공주가 싫으니까! 그 공주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니까! 거기서 제자가 공주를 챙기면 당연히 나는 싫지!
그가 차라리 린화에게 꽃바구니를 보냈다면 이렇게 화나지 않았을 것이다. 린화가 뭐야. 보문 공주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 꽃바구니를 보냈어도 화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전하는 제 정혼자니까요.”
나는 언제나 늘 ‘13황자를 사모하는 요요화’라는 걸 염두에 두고 언동 해야 한다.
“전하가 다른 여인에게 꽃을 주면 전 기분이 상합니다. 전하는 제 거니까요.”
단호하게 말하고서 그를 쏘아보자, 능글맞게 날 놀려대던 제자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내가 아주 무례한 말이라도 뱉은 것처럼 정색하고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잘못은 제자가 혼자 다 한 것 같은데. 저 나쁜 제자놈이 나를 저렇게 내려다보니 괜히 내 어깨가 말려 들어갔다.
뭐야. 왜 저래.
“……아직은 제 건 아니시지만요.”
이 부분 때문에 그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정정하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자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얼굴이었다.
그걸 보자 꾹꾹 참았던 부끄러운 마음이 펑 하고 터져나갔다. 나는 다시 서재로 달려가서 내가 제자에게 준 꽃다발을 들고나왔다.
“뭐 하십니까.”
“도로 가져갈 겁니다. 도로 가져갈 거예요.”
“제자에게 주신 거 아닌지요.”
“도로 회수할 겁니다.”
“가져가서 누구에게 주시려고요.”
주다니?
“3황자? 부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