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눈에 띄는 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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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눈에 띄는 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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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눈에 띄는 무희
2023.01.19.
돌아보니 선안이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 미쳤나?”
눈이 마주치자 선안이 가차 없이 물었다. 춤 선생은 시범을 보이느라 올렸던 팔을 내리고서 선안에게 인사했다.
“뭐 하는 거야?”
선안은 내 곁으로 오다가 벽에 기대어 선 유동백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춤을 배우고 있었어.”
내가 대답했으나 선안은 유동백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춤을 왜?”
살려고. 그런데 얘 뭐야? 질문은 나한테 하는데 왜 계속 유동백만 쳐다봐?
“이봐. 자네.”
내가 팔을 찌르자 선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온 정신이 유동백을 향해 있다는 건 조금만 눈치가 있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자네는 여기 왜 왔나?”
“할아버지를 뵈려고.”
선안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내내 가만히 있던 유동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춤 선생도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유동백과 선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이 사이가 안 좋단 말은 들었긴 한데. 생각보다 더 나쁜가 보네.
* * *
선안이 잠시 다녀가긴 했지만, 깜짝 소동은 그게 전부였다.
선안이 돌아간 위에도 나는 그날 하루 내내 기본적인 춤을 익혔고, 다음날 새벽 유 가주를 다시 만나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들었다.
“관계자들만 드나들 수 있는 건물이 있답니다.”
유 가주는 지도를 탁자에 펼쳐 놓고서 중앙 부분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 건물 안에는 관계자가 아니면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지요. 하지만 무희들은 공연 준비를 하느라 한 시진 정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이국사께서는 이때 건물 안에서 물건을 하나 찾아주시면 됩니다.”
유 가주가 눈짓하자 유동백이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이렇게 생긴 겁니다.”
유동백은 열쇠를 내 앞에 내밀며 말했다.
“건물이 작은가요? 건물 안에서 이 조그만 걸 찾으라고요?”
내가 열쇠를 받아 들면서 당황해 묻자 유 가주가 부연해 설명했다.
“아닙니다, 이국사. 열쇠는 복도 여기저기에 걸려 있지요. 그러니 따로 찾아다닐 필요가 없답니다.”
“열쇠를 복도에 걸어두어요? 보안이 그래도 되나요?”
유 가주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렇게 쉽진 않답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는 우리가 할 일이지요. 이국사는 열쇠를 구해주기만 하면 된답니다. 복도에 걸린 열쇠라면 아무 열쇠라도 좋아요. 그걸 창문 밖으로 던져 주기만 해요.”
“어느 쪽 창문이요?”
“이쪽이 입구입니다. 알겠지요? 이 입구의 오른쪽 창문입니다. 오른쪽에 있기만 하다면 몇 번째 있는 창문인지는 상관없어요.”
잘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기진 않았다. 하지만 해야 한다면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옷을 가져왔습니다.”
여자 직원 하나가 들어오자 유 가주는 날 향해 인자하게 웃어 보이고서 일어났다.
“이국사는 잘할 겁니다.”
나는 여자 직원을 따라 탈의실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익숙하지 않은 무희 의상을 챙겨 입었다.
무희 의상은 입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몸에 채우는 장식이 많아 혼자서는 맵시를 챙기기 어려운 구조였다.
어쨌든 나는 이제 이 위에 두툼한 피풍의를 걸치고 암시장에 갔다가 나중에 무희들이 모이는 장소로 가면 피풍의를 벗으면 된다.
“참 잘 어울리십니다!”
의복 입는 걸 도와준 직원은 얼마나 성격이 좋던지, 내가 옷을 갈아입자 제대로 꾸미기도 전부터 소리쳤다.
옷을 다 입은 뒤에는 직원은 과도할 정도로 환한 표정을 만들어 내고서 외쳤다.
“정말로 아름다우시네요. 이런 무희가 정말 있다면 사람들은 보자마자 모두 반해버릴 겁니다.”
나는 직원의 과한 칭찬을 흘려 넘기고서 탈의실 밖으로 나갔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유동백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때요?”
나는 유동백 앞에 팔을 뻗어 보이며 말했다. 돌아올 대답이 짐작은 갔지만 그냥 민망하니 물어본 것이었다.
“…….”
그러나 유동백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반쯤 벌리고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어, 이상해요?”
그 태도에 조금 자신감이 사라져서 물었는데도 그는 말하지 않았다.
직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큰 도련님께서 요 낭자께 완전히 반했나 봅니다!”
직원이 놀려대자 그제야 유동백은 입을 다물었다.
진짜인가? 그 반응이 미심쩍어서 쳐다보다가 나는 그 앞에서 한 바퀴 팽그르르 돌아보았다.
“잘 어울려요?”
유동백은 위엄 있는 표정을 만들어 내면서 중얼거렸다.
“생각보단 잘 어울리는군.”
“정말이요?”
“내가 본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 두 번째로 예뻐 보인다.”
“오. 정말요? 첫 번째는 누구인데요?”
제자인가?
“내 어머니.”
“그래요? 그럼 제가 가장 예쁘단 뜻이네요?”
“무슨 뜻이지?”
“유 대인은 어머니를 닮았을 거잖아요. 그런데 유 대인보다 제가 더 잘생겼으니까요. 유 대인의 지금 말은 콩깍지가 씌었다는 확률이 높지요.”
“!”
유동백이 무어라고 말했으나, 직원이 입을 막고 달아나는 바람에 나는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어쨌든 준비 과정을 모두 본 유동백이 저렇게 놀라워할 정도라면, 내 무희 복장이 암시장에 침투하고도 눈에 띌 정도는 아니란 게 분명했다.
“지도를 한 번 더 보지.”
유동백이 좀 이상해진 목소리로 지도를 펼쳤다.
우리는 지도를 샅샅이 살피면서 재차 계획을 점검했고, 해가 뜨기 직전. 나와 유동백은 마차를 타고 천금수화를 빠져나갔다.
* * *
암시장 앞에는 긴 줄이 있었지만 내가 유 가주에게서 미리 받아둔 패와 추천장을 보여주자 약간의 검문만으로 바로 통과할 수 있었다.
암시장 안에 들어오기 전 이미 나와 유동백은 헤어진 후였으니 이후로 유동백이 어찌 들어올진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패를 가지고서 암시장을 홀로 걸어갔다.
‘이렇게 생긴 데구나.’
안쪽은 그냥 무난했다. 오가는 사람이 바구니를 든 수수한 차림의 손님들이 아니라, 하나같이 우중충하게 차려입은 이들이라는 걸 제외한다면 말이다.
어쨌든 상당수가 피풍의를 걸쳐댄 통에 삿갓을 쓰고 피풍의를 걸친 나도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저긴가?’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유 가주가 말한 가장 높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앞에 달린 간판 역시 유 가주가 말한 이름이었다.
“이거요.”
그 앞으로 걸어가 패를 보이자 이번에도 손쉽게 안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저쪽 가장 끝방에 가면 됩니다.”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걸어가며 보니 유 가주가 말한 그 ‘열쇠’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이 중 하나만 창밖으로 던지면 된다 이거지?
‘지금 던져도 되겠는데?’
손을 움직이려 했으나 뒤쪽으로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또 오는 게 느껴져서 나는 그냥 얌전히 앞으로만 걸어갔다.
‘지금은 오가는 사람이 많아.’
게다가 열쇠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빈틈없이 걸려 있어서 이 중 하나를 빼버리면 티가 날 것 같았다.
내가 이 안에 있는데 열쇠가 사라졌다고 소동이 벌어지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
‘나가는 길에 빼자. 그러면 걸리더라도 도망칠 수 있을 거야.’
나는 두 손을 얌전히 몸에 붙이고서 끝방으로 들어갔다.
“이름.”
방 안으로 들어가자 날카롭게 생긴 여자가 바로 물었다.
“송사현이요.”
그 무희의 이름을 대고서 패와 추천장을 보이자 여자는 추천장을 꼼꼼히 읽은 다음 다시 돌려주면서 말했다.
“삿갓을 벗어 봐라.”
얼른 삿갓을 벗자 여자는 내 얼굴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옆에서 배경으로 자리 채울 무희를 하나 보내 달라 했더니 너무 눈에 띄는 아이를 보냈군.”
“제가 너무 예쁘단 뜻인가요?”
“저리로 가서 조용히 있어라.”
여자가 가리킨 ‘저리’는 벽에 붙은 길쭉한 의자였다.
내가 그곳으로 걸어가는 내내 주위 무희들이 낯선 사람이 나를 한 번씩 힐긋거렸다. 하지만 굳이 말을 걸지는 않았다.
이후 일각 정도 조용히 구석에 박힌 채 지켜보니, 같이 이야기하며 노는 이들은 모두 같은 극단 사람들이었고 나처럼 구석에 말없이 있는 이들은 인원수가 모자라서 다른 극단에서 불러온 손님들인 듯했다.
그 손님들은 나를 포함해 셋이었는데, 그중 하나를 불러 물어보니 모두 다 만약을 대비해 예비용으로 불려온 거라 웬만하면 춤을 출 일은 없다고 했다.
‘나는 그냥 자리만 지키면 되겠네.’
이럴 거면 춤도 배우지 말걸. 괜히 유동백한테 웃음거리만 되었잖아?
* * *
하지만 사람 일은 어찌 흘러갈지 모른다고, 일이 꼬이고 말았다.
“조장님! 조장님! 큰일 났습니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내 초대장을 확인한 여자에게 다가가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앙에 서는 세 명이 간식 하나를 나누어 먹었는데 셋 다 배가 아파서 계속 토하고 있어요.”
“뭐야?”
조장이라는 여자는 날카롭게 외치고서 밖으로 나갔다. 대기실 안에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잠시 뒤 들어온 여자는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
“이 중에서 중앙 춤을 외우는 사람이 누구지?”
여자가 묻자 몇몇이 손을 들었고, 여자는 그들을 앞으로 불러서 동시에 춤을 춰보게 했다.
춤을 날카롭게 지켜본 여자는 개중 셋을 뽑아냈다.
“너희가 중앙에서 춤을 추어야겠다. 안무를 헷갈리면 안 된다!”
그러고서 여자는 예비용으로 빌려온 무희 셋, 그러니까 나를 포함한 우리 셋을 보더니 이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너희도 나가야겠구나. 너희는 그냥 벽에 붙은 무대에서 기본 안무만 추면 되니까 어려울 건 하나도 없다. 모두 극단 사람들이니 기본 안무는 할 줄 알겠지?”
젠장. 젠장. 젠장!
* * *
신화려는 그의 앞날에 꽤 유용한 도움이 될 물건을 찾기 위해 청양만을 데리고서 암시장으로 들어섰다.
유동백에게 말하면 구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자신의 부하들과 모든 지식을 공유하는 주군은 아니었다.
신화려는 많은 삶을 살았고 사람들이 사소한 일로도 틀어져 이전 삶과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 왔다.
“이쪽으로 과연 그 물건이 나올까요?”
이를 모르는 청양은 뒤를 따라오기는 했으나 믿지 못하고 계속 물었다.
“그 물건은 나온다 나온다 하지만 말만 나오고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물건 아닙니까. 이번에도 헛소문일지도 모르는데요.”
“이번엔 나올 거다.”
신화려는 덤덤하게 말했다.
청양은 그의 옆모습을 신기해서 힐긋거렸다. 신화려는 그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데도 아주 연장자 같은 느낌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세상사 모든 일을 다 꿰뚫어 보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았다.
오늘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 정보조차 쥐지 못했는데도 신화려는 갑자기 이곳에 청은금사가 나올 거라며 찾아왔다.
청양은 황궁 담벼락 안에서 자란 13황자가 무림인 중에서도 사파의 극소수만이 아는 물건을 어찌 아는 건가 놀라 기겁할 뻔했다.
“경매로 나올 테지. 경매장이 저기였던가.”
화려는 헷갈리는 듯 말하면서도 조금도 지체 없이 경매장 쪽으로 걸어갔다.
경매장 안에는 이미 많은 손님이 들어차 있었으나 아직 경매는 시작되지 않았다. 대신 극단 사람들이 와서 연극도 하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는 등 무대를 꾸미고 있었다.
화려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일부러 구석으로 걸어갔다. 삿갓을 쓰긴 했으나 그는 키가 우뚝 큰 편이라 다 같이 삿갓을 써도 눈에 가장 잘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많은 무희와 악사들을 어찌 다 고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청양은 거대한 건물 전체를 둘러싼 악사와 무희들을 둘러보면서 감탄했다.
화려는 그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구석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저 무희 말이야. 아까부터 혼자 반대 방향으로 춤을 추는데?”
“춤을 추는 건지 북을 치는 건지 모르겠네.”
“근데 귀엽지 않나?”
그런데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자니 주위 사람들이 계속 어느 무희 이야기를 속닥거렸다.
게다가 일부러 구석에 있는데 사람들이 계속 이쪽으로 모이면서 자리가 점점 좁아졌다. 사람들이 그 무희를 보기 위해서 이곳에 모여드는 듯했다.
불쾌해진 화려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방향으로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가 기겁해서 눈이 튀어나왔다.
‘저 스승이!’
벽에 붙은 무대 위. 스승이 혼자 반대 방향으로 팔을 휘저으며 그를 퀭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