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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내가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92/159)


92화. 내가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2023.01.16.



 
유동백은 제자만큼이나 내 사근사근한 태도에 떨떠름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절 구해주기까지 하셨네요. 우리도 인연이 있나 봐요.”

그래도 모른 척 나는 내 할 말을 마치고서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유동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반응을 보자 자신감이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갔다.

제자가 내게 커다란 방어벽을 만드는 거라 여겼는데. 유동백까지 저렇게 반응하는 걸 보니, 나는 그냥 남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재주가 없는 건지도…….

* * *

13황자가 돌아오자 요요화는 그만 돌아가 보겠다면서 혼자 떠났다.

유동백은 점소이가 새로 가져온 김이 나는 찻잔을 들고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전하의 스승님은 꼬리가 열댓 개는 되어 보입니다.”

13황자는 눈썹을 올리고서 유동백을 쳐다보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좋은 시간을 보냈나 보군.”

“아주 말을 달콤하게 하시더군요.”

유동백은 느긋하게 말하다가 13황자를 보았다.

13황자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만 있었다.


“조금 홀릴 뻔했지요.”

유동백은 일부러 도발하듯 덧붙여보았다.

청양과 운귀는 13황자와 요요화 사이가 조금 이상하다고 말했다. 원래 유동백은 그 둘만큼 요요화에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일을 겪고 나니 조금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흥미가 생겨났다. 13황자와 그의 스승은 일반적인 사제 간 같지도 않았고, 일반적인 정혼자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 * *



“새로운 은신처를 네 개 더 구했답니다.”

어느 날, 유 가주가 날 불러 말했다.


“정말인가요?”

나는 기뻐서 유 가주의 손을 붙잡을 뻔했다.

일이 잘 풀려가지 않아서 그간 꽤 답답해하고 있었다. 제자는 여전히 적의가 흘러넘쳤으며 그런 주제에 내게 관심만 많았다.

어머니는 내게 ‘집안을 이끄는 법’을 가르치려고 수시로 눈을 빛냈고, 아버지는 소가주 문제를 숙부들과 논의하느라 몹시 머리가 아파 보였다.

린화가 사람을 보내서 날 재촉하진 않았지만, 그 애가 한 부탁 역시도 떨떠름하게 남아 있었다.

황제가 수업 도중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생겨났다. 그야말로 모든 게 날 골치 아프게만 만드는 와중이었다.

그런데 은신처를 구했다니! 심지어 네 개나!


“잘됐네요!”

그러면 은신처가 총…… 일곱 개가 되는구나! 그중 하나는 제자도 아는 거니 빼더라도 여섯 개가 생기는 셈이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유 가주에게 큰절을 해야 할까?


“음. 하지만 문제가 있답니다.”

그런데 유 가주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놓고서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문제라니요?”

“은신처 지도를 넘기기로 한 자가 돈만 챙겨서 달아나 버렸거든요.”

“뭐라고요!”

아니, 그러면 못 구한 거잖아?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자 유 가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찾아올 방도는 있답니다.”

“어르신이 절 아주 쥐락펴락하십니다. 놀랐잖아요.”

“하지만 이국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 영감님이 진짜로 날 쥐락펴락하는구나.


“이국사께서 도와주신다면 찾아온 은신처 절반을 드리지요.”

게다가 네 개 다 주는 것도 아니고 두 개만 준다니. 그러면 은신처를 받더라도 내가 가진 은신처는 네 개뿐이었다.

네 개라도 많지만 여섯 개를 상상하다가 네 개라고 하자 기쁨이 좀 덜어졌다. 게다가 그냥 주는 것도 아니라 도와야 한다니…….


“혹시 잊어버렸을까 알려드리자면 은신처는 아주 귀하답니다, 이국사.”

내 표정에서 실망한 기색을 읽었는지 유 가주가 엄격하게 말했다.


“그럼요. 잊지 않았지요.”

나는 얼른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래, 두 개라도 생기는 게 어디냐. 게다가 처음에는 아예 안 준다고 했는데 선안을 도운 일로 그나마 이렇게라도 주는 거잖아.


“뭘 어떻게 도우면 될까요?”

“사실 받기로 한 은신처는 다섯 개랍니다. 하지만 돈을 받고 달아난 그자가 그 은신처 중 한 군데에 자기가 몸을 숨겨 버렸지요. 그래서 네 개라고 한 거랍니다. 이미 사용한 은신처는 몇십 년은 묵혀야 하거든요.”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거기에 도움이 될 일이 있을까요?”

유 가주가 종을 울리자 화려한 차림의 직원이 들어와 나와 유 가주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갔다.

찻잔도 화려하네. 유 가주님은 화려한 거 좋아하는구나.


“그자는 빼돌린 은신처 지도를 암시장에 내놓으려고 하고 있답니다. 지도가 암시장 경매에 올라가고 나면 우리가 소유권을 주장하기 복잡해지지요. 그쪽에서는 장물임을 부정하려 들 테니까요.”

“장물인데도요?”

“암시장에 올라오는 물건은 두 종류랍니다.”

“?”

“장물이 아니지만 거래나 소유, 사용이 금지된 위험한 물건. 장물.”

“아…….”

“상당수 물건이 장물이니 일단 거래가 시작되면 시장 주인은 장물이건 뭐건 돌려주지 않으려고 하지요. 그러니 물건이 올라오기 전에 다시 찾아야 한답니다.”

“그렇군요.”

새로운 세상을 알았네.


“하지만 제가 무슨 도움을 드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똑똑하지만 이런 쪽엔 아는 게 없는걸요.”

“암시장에는 들어가기가 쉽지 않답니다. 특히 관계자로 들어가기가 힘들지요. 관계자로 들여보내기 위해 자리를 찾아보았지만 급하게 구하다 보니 안 됐어요. 결국, 사람을 매수해서, 그 사람 자리에 우리 사람을 하나 넣기로 했지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 사람이 무희랍니다.”

불길한 예감이 스치듯 지나갔다. 나는 벌떡 일어났으나 유 가주에게 바로 팔이 잡혔다.


“아직 부탁은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국사.”

나는 팔을 뿌리쳤다.


“저더러 그 무희인 척 들어가 달란 거잖아요?”

“영민하십니다.”

“영민하니까 안 들어갈 겁니다.”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다른 여자 직원에게 시키면 되잖아요? 좀 더 그, 뭐야, 이런…… 하여튼 저보다 더 잘 해낼 사람이요.”

“일단 앉으시지요.”

마지못해 자리에 앉기는 했으나 나는 당장에라도 돌아갈 사람처럼 의자와 탁자 사이에 거리를 계속 벌려두었다.

유 가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편하겠지요. 하지만 은신처는 기밀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이 노부와 유동백 둘이서 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지요.”

“…….”

“이번에도 저와 손자, 둘이서 가려고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나나 동백이가 무희로 위장하면 누가 속아 넘어가겠습니까? 혼자 들어가는 무희면 뭐 어찌어찌 시도라도 해볼 겁니다. 하지만 무희들이 여럿인데 거기에 살짝 끼어 들어가는 거라서요.”

유 가주가 살짝 몸을 흔들며 춤추는 시늉을 했다.

저절로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는 겁니다.”

“꼭 제가 해야 할까요? 손녀분 안 계시나요?”

“이국사만큼 영민하지 못하지요. 게다가 이국사만큼 무술 솜씨가 뛰어나지도 않고요.”

“!”

내가 무술 익힌 건 어떻게 안 거야?


“동백이에게 들어보니 사파 무림인들의 공격을 받을 때도 잘 피하셨다 하더군요. 무공을 익히신 줄은 몰랐습니다.”

유동백 그놈……! 구성루에서 날 구해주기 전에 강도들 공격을 피하는 것도 지켜보았구나. 정말 방심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당혹스러워서 굳어 있자니, 유 가주가 말을 좀 더 부드럽게 하며 웃었다.


“그래도 정 싫다면 돕지 않아도 됩니다, 이국사. 대신 은신처도 줄 수 없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의자를 탁자 쪽으로 끌면서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 * *

나는 제자에게 며칠간 휴가를 받아냈다.

제자는 왜 휴가가 필요한지 물었지만 내가 집안일 때문에 그렇다고 하자 그러라고 허락해 주었다.

소가주 문제로 우리 집안이 지금 전전긍긍하고 있단 이야기를 아는 듯했다. 뭐. 사실이기도 하고.

유동백이 내가 휴가 기간에 뭘 하러 가는지 고자질하는 게 아닐까 염려했지만, 다행히 제자는 끝까지 그 일을 모르는 내색이었다. 유동백이 자기 집안일이라서 입을 무겁게 다문 듯했다.

어쨌든 그 덕에 며칠은 은신처 구하는 데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휴가를 얻은 그 날 저녁. 나는 약속한 대로 유 가주를 다시 찾아갔다.


“이국사께 인사드립니다.”

유 가주의 방에는 유 가주뿐만 아니라 유동백도 같이 있었다.


“예. 안녕하세요.”

나는 친한 척 유동백에게 같이 인사했다.

유 가주가 은신처를 구하러 다닐 때 보통 자신과 유동백 둘이서 다닌다고 말했지.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유동백이 나와 함께 움직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고 있었기에 유동백이 여기 있어도 놀랍지 않았다.


“놀라지 않는군요.”

유 가주는 그게 신기한지 이렇게 말했지만.

아니, 이보세요들. 당신들이 머리 좋은 건 알지만 나도 바보가 아니에요.


“지금 가면 되나요?”

나는 방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무희로 위장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막막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면 해야지. 가장 중요한 건 내 목숨이다.


“아닙니다.”

그런데 날 여기에 불러 놓고서. 유 가주는 말을 바꾸었다.


“아니라고요? 오늘부터 휴가를 내오라고 하셨잖아요?”

“무희로 위장하려면 춤을 익혀야 하니까요.”

유 가주는 심지어 더욱 두려운 말을 뱉었다.


“춤이요?!”

나더러 춤을 익히라고!


“설마 암시장에서 제가 춤을 춰야 하나요!”

이쪽은 정말로 놀랐는데 유동백은 뭐가 그리 혼자 재미있는지 입가를 가리고 웃고 있다.

내가 째려보자 유동백은 뒤늦게 손을 내리고 정색했다.


“음. 춤을 출 필요는 없답니다. 춤추는 무희와 거래한 게 아니라, 만약을 대비해서 후보로 따라가는 무희와 거래한 거니까요.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예비 후보인 무희이니 웬만해선 춤출 일이 없지요.”

“그런데 왜 익히라고 하세요?”

“그래도 만약을 대비하는 게 좋지요.”

유 가주가 손뼉을 치자 발이 쳐진 문 너머로 한 여자가 춤을 추며 들어왔다.

하늘하늘한 선녀 같은 차림으로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무희였다.

무희의 춤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그녀가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도는 등 난이도가 높은 춤을 출 때마다 나는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더러…… 저렇게 추라고?

무희가 춤을 끝내자 유 가주와 유동백이 손뼉을 쳤다.

무희는 씩 웃으면서 두 사람 앞에 한쪽 팔만 굽혀 인사하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이분을 제가 가르치면 되는 거군요!”

“요 공자. 이분은 실제로 극단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춤 선생이랍니다.”

유 가주는 일어서며 내게 춤춘 사람에 대해 소개해주었다.

아이고. 이게 웬일이야. 은신처 구하려고 춤까지 배우게 생겼네!

* * *

내가 민망해하자 유 가주는 자기는 안 보겠다면서 곁방으로 들어갔다.


“유 대인께서도 자리를 비켜주시면 좋겠는데요.”

나는 골이 나서 유동백에게도 같은 배려를 요구했다. 그러나 유동백은 절대로 비켜주지 않았다.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저도 돕지요.”

그럼 네놈이 배워! 그렇지 않을 거면 뭘 돕겠단 거야?

결국, 나는 유동백이란 구경꾼을 두고서 춤 선생에게 군무를 배우기 시작했다.


“원래 춤추기로 되어 있던 낭자에게 들어보니, 중간에서 춤추는 역할이 아니라 그냥 양옆의 무대에서 가볍게 춤을 추는 역할이라 하더군요. 그 정도는 반 시진이면 익힐 수 있답니다.”

춤 선생은 그렇게 말하고서 두 팔을 한 방향으로 뻗으며 말했다.


“이게 기본자세예요. 해보세요, 공자.”

아. 아까 추면서 들어온 그 춤을 추는 건 아니구나. 다행이다.


“……이렇게요?”

“그럼요. 아주 잘하시네요.”

내가 어설프게 따라 하는데도 춤 선생은 칭찬해주었다.


‘뭐. 이 정도는 쉽긴 하네.’

생각보다 춤이 쉬울 듯하자 곪았던 마음이 가까스로 가라앉았다.


“그 상태로 팔을 이렇게 해보세요.”

하지만 춤 선생이 그 자세로 팔을 왕뱀처럼 꿈틀하자 다시 마음이 곪았다.


“예?”

“팔을…… 이렇게요.”

나는 그녀를 따라 하려 해보았지만 팔이 삐걱거리면서 움직일 뿐 그녀처럼 꿀렁거리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빳빳하면 안 되지요.”

사근사근하던 춤 선생의 목소리가 살짝 엄격해졌다.


“그건 나무토막이잖아요.”

“사람 몸엔 나무토막보다 단단한 뼈란 게 있어요, 선생님.”

“관절도 있답니다. 자, 다시!”

나는 그녀를 따라 하려 애썼으나 내 팔은 이번에도 삐걱삐걱 움직일 뿐이었다.

춤 선생의 표정이 굳었다.


“다시! 이번엔 두 팔로!”

두 팔로 삐걱삐걱 움직이자 유동백이 풉 소리를 내며 웃었다.


“조용히 하세요!”

춤 선생이 차갑게 호통치자 유동백은 바로 정색했지만, 내가 두 팔을 움직이자 다시 입꼬리를 씰룩였다.


“정말. 우리 극단에 온다면 당장 쫓아낼 공자네요!”

춤 선생이 차갑게 외치더니,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그러면 다른 걸 해봅시다. 두 팔을 위로 올린 채 허리를 부드럽게 움직이는 거예요.”

“물고기처럼요?”

“…….”

유동백은 또 웃었다.

춤 선생은 나를 망아지 보듯 쳐다보다가 시범을 보였다.

허리를 짠짠짠!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꼭 오리가 걸어가는 모습을 좀 빠르게 보는 것 같았다.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오리처럼이죠?”

춤 선생의 표정은 험악해졌고 유동백은 배를 잡고 쓰러졌다.

나는 위축되어서 얼른 그녀를 따라 했지만,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서 멈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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