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절 구해주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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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절 구해주셨군요!
2023.01.09.
13황자가 보문 공주에게 함께 태월에 가겠단 말을 했다고? 상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황후를 힐긋 쳐다보았다.
“정말 13황자가 그렇게 말하던가?”
황후는 놀란 내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물었다.
‘13황자는 요요화와 정혼했는데. 요요화와 정혼했으면서 태월에 보문 공주를 따라가겠다니?’
요씨 가문이 요요화의 남장 건으로 체면을 잃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요씨 가문이 갑자기 명문가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13황자는 요요화와 보문 공주 모두를 가질 처지가 아니었다.
“네. 태월에서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서 초대해달라 하셨지요.”
보문 공주가 웃으면서 덧붙였다.
공주가 자신을 놀렸단 걸 깨달은 황후는 애써 짓고 있는 다정한 표정이 흐트러질 뻔했다.
“깜짝 놀랐지 않은가.”
황후는 가볍게 책망하고서 표정을 가리느라 차를 들이마셨다.
“하지만 13황자께서 저와 점점 친분이 깊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말이 얼마나 잘 통하는지 몰라요.”
보문 공주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거참 다행이군. 13황자는 어린 시절부터 홀로 지내 외로움을 많이 탔지. 본궁이 나서보려 했지만, 아이가 마음을 닫고 열어주지 않으니 쉽지 않았어.”
황후는 쓸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후마마께서는 참으로 자애로우시군요.”
공주는 감탄한 목소리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도 않아. 결국 그 아이 마음을 돌리지 못했으니까.”
황후는 착잡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서 물었다.
“그래, 열셋째가 태월에서는 누구를 만나보고 싶다던가?”
공주가 잠시 대답을 주저했다.
“공주가 열셋째에 대해 말해준다면 본궁이 늦게라도 그 아이와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네. 그렇게 된다면 훗날 공주와 열셋째가 혼인했을 때 우리는 참으로 사이좋은 고부지간이 되겠지.”
황후가 작게 웃으며 말하자 상궁이 따라서 웃었다. 두 사람이 웃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공주는 황후에게 잘 보이면 13황자와 이어지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계산이 들었다.
“13황자는 용정에 대해 궁금해 했어요. 혹시 용정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알지. 유명한 전략가 아닌가.”
황후가 자기 나라 사람을 칭찬하자 공주는 뿌듯해졌다.
“네. 13황자께서 용정을 만나보고 싶어 하시더군요.”
황후와 상궁이 시선을 교환했다.
황위와는 전혀 관련도 없고 황제가 될 가능성도 황자 중 가장 낮은 13황자가 대체 무슨 일로 외국의 전략가를 만나보고 싶어 할까?
만나려는 상대가 평범한 문인이 아니라 전략가라는 점이 수상쩍었다.
“열셋째가 전술에 관심이 많았나 보군.”
황후는 불편해진 심기를 감추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말했다.
“내가 공주 덕에 막내아들에 대해 많은 걸 알아가네.”
“도움이 되었다니 제가 영광이지요.”
공주가 잠시 수다를 떨다가 떠나기 전, 황후는 그녀를 배웅하겠다는 핑계로 정원으로 따라나섰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슬쩍 부탁했다.
“열셋째가 용정을 만나고 싶어 한다니 본궁이 어미로서 꼭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군. 돌아올 그 아이의 생일에 깜짝 만남을 주선하고 싶은데. 괜찮다면 공주가 용정에게 본궁의 서신을 전해줄 수 있겠나?”
심부름꾼을 보내면 될 일이지만 그렇게까지 해주어야 할까? 공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공주가 우리 모자 사이가 가까워지는 데 도움을 준다면, 본궁도 공주가 열셋째와 가까워지는 데 도움을 주어야지. 보답은 오고 가는 거니까. 그렇지?”
황후가 공주의 속내를 알아차리고서 친절하게 제안했다.
공주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그러면 용정에게 편지를 써서 한번 이곳에 올 수 있나 물어보지요.”
* * *
“왜 그러세요, 소가주님?”
다음날.
내가 입궐할 채비를 마쳐 놓고서도 어정쩡하게 방을 돌아다니자 내 시비인 월섬이 물었다.
월섬은 방 청소를 하기 위해 가져온 마른걸레를 바닥에 내려놓고서 나를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무슨 일 있으세요?”
“고민 중이야.”
“린화 아가씨 때문에요?”
내가 린화를 만나고 온 이야기는 이미 식구들 모두가 알고 있다. 부모님이 린화에 대해 슬슬 이야기를 꺼내려 들기에, 며칠 전에 보고 왔으니 그만하시라고 대놓고 말했기 때문이다.
화해를 한 건 아니고 그냥 이전만큼 사이가 나빠졌을 뿐이라고 못 박아두었지만, 부모님은 그 정도만으로도 안심해서 여기저기에 그 이야기를 죄다 해버렸다.
“아니. 린화도 지금은 몸을 사리고 있고 집에서 부딪칠 일도 없는걸.”
린화가 황제 운운하며 부탁하긴 했지만, 그거야 내가 안 들어주면 그만이고.
월섬은 내가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지 그냥 걸레를 잡고서 청소를 시작했다.
“13황자 전하 앞에서 여인 의복을 계속 입을까 말까 고민이야.”
하지만 내가 솔직하게 털어놓자 월섬은 바로 걸레를 내려놓았다.
“전에 린화 아가씨 옷 챙겨서 가셨잖아요. 전하 앞에서 보여주신다고요. 반응이 나빴던 거예요?”
“모르겠어. 곱다고는 하던데.”
월섬의 입가가 히죽 양옆으로 벌어졌다.
“그럼 좋은 거잖아요?”
“다음부턴 그냥 입던 대로 입으라 했거든.”
월섬이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나는 차마 내 여인 복장에 제자보다 황제가 더 관심을 보이더란 말은 꺼낼 수가 없었다.
젠장. 왜 낚이라는 제자는 안 낚이고 황제가 날 힐긋거리는 거야? 호색한 황제 같으니라고!
‘나에 대한 제자의 적의가 너무 커. 내가 자길 여러 번 죽였다니 당연하겠지만…… 어떻게 해야 적의가 사라질까. 날 좋아하게 되진 못하더라도 죽이겠단 생각만이라도 안 했으면 좋겠는데.’
월섬은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본격적으로 청소를 시작했다.
월섬이 청소를 끝내고 일어설 즈음.
“맞아!”
드디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뭐가요?”
월섬이 덩달아 물었다. 나는 월섬에게 설명해주지 않고 그녀를 내보낸 다음 혼자 만세를 불렀다.
이번엔 진짜로 좋은 계획을 세웠다. 내가 제자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며 애쓸수록 제자는 나를 미심쩍게 바라보았지. 그건 제자가 나를 경계하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반대로 뒤집으면 된다. 제자가 보기에 내가 자기를 좋아할 만하다고 여겨질 일을 만들어주면 되는 거다.
그냥 단순히 ‘전하가 잘생겨서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더욱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나는 얼른 책상 앞에 앉아서 회귀 전 제자가 자기 측근들과 주기적으로 만나던 장소와 위치를 떠올렸다.
모임 장소를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었다. 그땐 마지못해 제자 편에 선 거라…… 반강제로 참석할 때만 나갔으니까.
하지만 꼭 제자의 행적을 다 알 필요도 없지!
‘제자가 자주 사용하는 다루가 있었어. 구상루인가. 그런 이름이지. 30년째 같은 자리에 있다던 다루니까 지금도 있을 거야.’
제자가 본격적으로 활동할 시기는 아니지만, 그가 측근들을 불러들이는 시기가 전체적으로 앞당겨졌지. 그렇다면 모임 시기도 앞당겨졌을 거야.
‘좋아. 그럼 그쪽으로 가자.’
* * *
제자는 매달 20일, ‘구상루’라는 다루에서 자기 측근들과 모임을 가졌다.
이 때문에 나는 사흘을 흘려보내야 했다.
그리고 딱 20일이 되는 날. 나는 제자가 모임을 가지기 한 시진 전쯤 일부러 질 좋지 못한 이들이 모이기로 이름난 술집을 찾아갔다.
평소라면 절대로 오지 않을 술집이었다. 부모님은 이 근방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그곳은 스스로를 무림인이라고 부르며 멋대로 살아대는 인간 중에서도 사특하다고 취급되는 부류들이 주로 온다는 곳이었다.
나는 이 술집에서 나한테 시비를 걸어줄 사람을 찾을 생각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고. 구상루 부근까지 쫓아와 시비를 걸어줄 사람을 말이지.
“웬 도련님이 여길 찾아오셨나?”
‘나 부유하다!’라고 주장하는 차림으로 그 술집으로 가자 입구에서부터 시비가 걸렸다.
얼굴에 칼집이 가득 난 남자가 히죽거리면서 내 목에 걸린 반짝거리는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등에는 낫처럼 생긴 무기가 걸려 있었다.
“나한테 말 걸지 마라. 천한 것.”
나는 일부러 오만한 표정을 하고서 재수 없게 말했다.
이 남자가 겉만 흉악하지 속은 여린 사람이라면 참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시비에 걸리러 온 거지 술을 마시러 온 게 아니니까…….
“하하 용감한 도련님이네.”
하지만 남자는 흉포한 생김새와 달리 속이 너무 넓었다.
남자의 친구로 보이는 이들이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나 보다. 이 착한 것들.
나는 얼굴만 흉흉한 이들을 모른 척 지나가서 다시 시비를 걸 만한 이들을 탐색했다.
“뭐야 그 얼굴은. 왜 들고 다니는 거야? 당장 꺼져.”
그리고 새로운 적을 탐색한 다음 또다시 시비를 걸었다.
“이게 미쳤나.”
그 사람 역시 안타깝게도 인내심이 강했지만.
그래도 나는 지치지 않고 술집 안을 다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사람마다 시비를 걸고 다녔다.
“이 꽃도령은 입이 독사네.”
“뉘 집에서 애를 저렇게 못되게 길렀을까.”
“철 좀 드시오. 말이 너무 못되네.”
대부분은 내가 시비를 걸어도 그냥 웃어넘겼다. 웃어넘기지 못하더라도 잠깐 발끈했을 뿐 협박하진 않았다.
그들은 내가 너무 가소롭게 보이다 보니, 내가 무어라 하든 그냥 근처에서 강아지가 짖어댄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시비를 걸기를 한참. 적당히 주목을 받았다 싶은 즈음 나는 얼른 술집을 빠져나와 구상루로 갔다.
그리고 제자가 지나갈 즈음까지 대로에 있다가 그가 나타날 시간이 되었을 때 일부러 구상루 옆 골목길로 들어갔다.
“거기 공자!”
거기서 잠시 머뭇대고 있기를 반의 반 각 정도. 마침내 누군가 내게 시비를 걸러 다가왔다.
놀란 척 고개를 돌리자 비열하게 생긴 사람이 덩치 큰 동료 둘을 데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말하는 싸가지가 말이야. 지켜보니까 아주 입이 더럽던데. 세상 무서운 걸 모르나 봐?”
“이 어르신이 아주 기분이 상했어. 다짜고짜 다가와서 사람 얼굴을 가지고 시비를 걸어? 부모님이 사람 얼굴에 대고 생선 가시 같다 말하면 안 된단 말 안 하든?”
“마음이 아프니 치료비를 내놓아야겠는데?”
그들이 자기 주먹을 마구 눌러대자 뼈 소리가 우득 우득 들려왔다. 딱 내가 기다리던 이들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을 누르고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이 다가와 주먹을 휘두르자마자 얼른 피하며 비명을 질렀다.
“끼야아아악!”
제자가 내 비명을 들어야 하기에 좀 과도하게 높게 지르긴 했다.
“이거 진짜 미쳤나?”
하지만 반응이 너무했다. 생선 가시 같은 사람은 고함 좀 높게 질렀다고, 짜증을 내면서 칼까지 꺼냈다.
“끼악! 끼악! 끼악!”
나는 더 비명을 내지르면서 생선 가시가 휘두르는 칼을 피해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윽.”
생선 가시는 뒤로 물러서는가 싶더니 눈이 돌아가서 칼을 돌려 잡았다.
“이 새끼가 봐주려 했더니!”
“깍! 깍! 깍!”
그래도 나는 구애하는 새처럼 계속 비명을 질렀다. 제자야! 얼른 날 구하러 와라! 날 구해주고 내 사랑을 받아야지! 평소엔 시장만 가도 나타났잖아?
“요 선생?”
무뢰배들의 공격을 피해 대기를 반 각 정도. 마침내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타났다.
‘뭐야. 왜 쟤가 와?’
하지만 이 고생을 했는데 나타난 건 유동백이었다.
황당해서 쳐다보는 사이. 덩치 큰 무뢰배가 내 등을 바위 같은 주먹으로 내리쳤다. 맞고서 비틀하자 눈 깜짝할 사이 유동백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유동백이다!”
그는 그냥 다가왔을 뿐인데 놀랍게도 무뢰배 셋은 알아서 달아나버렸다.
얼어 있는 내게 유동백이 다가와 부축하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괜찮을 리가 없었다. 속으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네가 아니야. 네가 아니야!
등에 주먹까지 맞았는데 엉뚱한 놈이 낚이다니!
하지만 날 구해주러 온 사람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이에 잠시 굳어 서 있는 사이.
“스승님?”
제자가 한발 늦게 나타났다.
“전하! 절 구해주셨군요!”
그래도 온 게 어디냐. 나는 얼른 제자에게 달려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