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13황자를 놀라게 하려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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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13황자를 놀라게 하려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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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13황자를 놀라게 하려 했는데
2023.01.05.
제자의 눈길이 내 의복을 빠르게 오가더니, 표정이 못 볼 꼴을 보았다는 것처럼 변했다.
제자가 내 새로운 모습을 보고 과거 흔적을 잊어주길 바라는 책략은 먹혀들어 갔을까?
어쨌든 감회를 주긴 한 것 같았다. 제자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이리저리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더욱더 새치름한 표정을 꾸며냈다.
“왜 옷을 그리 입고 계시는지요?”
한참 만에야 제자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물었다.
“한 번씩 입어보려고요.”
나는 일부러 목소리도 평소보다 부드럽게 냈다.
“앞으로 자주 입게 될지도 모르는데 미리미리 연습해 두어야지요.”
그러고서 서책을 펼치며 상냥하게 말했다.
“250쪽 보세요, 전하.”
“…….”
제자는 어울린다던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등 아무 표현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자기 책상으로 가서 서책을 펼칠 뿐이었다.
‘별로인가? 너무 반응이 짧은데?’
나는 서책을 넘기면서 제자를 살폈다. 제자는 무덤덤하게 서책을 넘기고 있었다.
그 반응을 보자 붕 떴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괜히 여인 옷을 입고 왔단 후회가 밀려왔다. 아주 무덤덤하잖아?
“260쪽 보세요, 전하.”
민망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아까는 250쪽이라고 하셨습니다, 스승님.”
“250쪽 보세요.”
나는 서책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침착하게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보니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았는데도 말이 좀 빠르게 나간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다음 주제까지 설명하면 시간이 과하게 초과할 듯해서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빨리 이 옷을 벗고 원래 내 차림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제자가 내 새로운 차림에 그리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 앞에서 여인 옷을 입고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내가 여인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는 다들 아주 신이 나서 그 이야기를 해대겠지. 이 이상 주목받는 건 사양이다.
그런데 제자가 일어나더니 긴 다리로 몇 걸음 만에 내 앞에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엉거주춤하게 묻자 제자는 내 책상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스승님.”
그의 눈이 내 얼굴을 집요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냥 잠깐씩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눈빛 받는 사람이 몹시 부담스러우리만큼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전하?”
부담스러워서 슬그머니 부르자, 그제야 제자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수업하러 오실 땐 평소처럼 입고 오시는 게 낫겠습니다.”
“왜요?”
나는 제자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면서도 물었다. 보나 마나 내게 말을 막 하겠지. 안 어울린다거나, 보기 좋지 않다거나, 그런 식으로.
“너무 고우셔서 공부에 집중하기 어렵군요.”
그러나 제자가 뱉은 말은 예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그 말의 효과는 놀라웠다. 제자가 무슨 말을 하든, 앞으로 월무궁에서는 여인 의복을 입으리란 각오가 단박에 무너졌다.
그가 곱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팔다리에 소름이 돋아났다.
목구멍 끝까지 ‘네 앞으론 안 그럴게요’란 말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지 않은 건, 혹시 그걸 유도하고서 제자가 이렇게 말하는지 의심이 들어서였다.
“제가 고와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인가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방금 집중하기 어려우시다고…….”
“네. 좀 어수선하네요. 하지만 스승님께서도 제자가 난데없이 여인 의복을 입고 나타나면 집중이 안 될 겁니다.”
뭐? 물론 그렇겠지. 근데 그거랑은 상황이 좀 다르지 않나?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문 너머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데없이 황제가 온다고.
제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스승님이 불렀습니까?”
“제가 무슨 수로요?”
제자는 옆으로 두 걸음 떨어져 섰고, 나는 문을 향해 돌아섰다.
우리가 자리를 잡는 것과 거의 동시에 문이 열리고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나는 얼른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
한참 뒤에야 대답이 들려와 고개를 들어 보니, 황제가 나를 아까 13황자만큼이나 샅샅이 쳐다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제자와 얼굴이 똑같이 생긴 황제가 저러고 있으니, 몹시 부담스러워진다.
그렇다고 황제에게 부담스럽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니 황제가 말했다.
“이렇게 아리땁고 귀여운 스승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안 그러냐 화려야.”
제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아리땁다는 부분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귀엽단 부분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아니면 그냥 황제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진 모르겠지만.
나는 무어라 반응하기가 애매해서 그냥 웃고만 있었다.
“날씨가 좋아서 같이 산책이나 하자고 왔는데. 마침 이렇게 곱게 차려입고 있군.”
……웃고만 있어도 되는 거…… 맞겠지?
날씨가 좋은데 왜 나랑 산책하러 왔단 거지?
제자와 나의 신경전이 황제가 끼자마자 방향이 바뀌었다.
“요 이국사가 여인 복장 한 건 처음 봅니다. 참으로 잘 어울리네요!”
송 태감이 옆에서 아부하듯 말하자 황제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 이국사는 원래도 고왔지.”
나는 슬쩍 황제와 제자의 눈치를 살폈다.
제자는 무표정해서 속내를 알기 어려웠다. 그래도 짐작해 보자면 ‘X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
“요 이국사. 수업은 끝났나? 끝난 거 같은데.”
“예. 좀 전에 끝났습니다.”
“하면 짐과 산책하러 가지. 따라오라.”
황제는 내가 분석을 마칠 틈도 주지 않았다. 그가 뒤돌아서며 내린 명령에 나는 영문을 몰라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폐하. 페하.”
하지만 황제가 문밖에 나서기 전, 나는 용기를 끌어모아 그를 불렀다.
황제가 뒷짐을 지고 나가다가 힐긋 고개만 반쯤 돌렸다.
“폐하. 저도 폐하와 산책하고 싶지만, 제가 여인의 모습으로 폐하와 둘이서만 산책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 염려됩니다.”
황제가 나를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이상하게 보다니?”
놀리는 말투였다.
“너는 짐의 신하이자, 장차 황자비가 될 아이지. 내가 널 데리고 다니는데 누가 감히 고약한 시선을 보낸단 말이냐.”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소식을 들은 린화가 이상하게 볼까 염려하는 거였지만…… 이건 말하면 안 되겠지.
게다가 황제와 내가 가까이 지내면 제자가 화낼 거다.
제자를 약 올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잠깐 누려도 되는 즐거움이 있고 참아야 하는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이건 후자였다.
“제가 남장을 푼 것만으로도 온갖 소문이 돈다고 들었거든요. 폐하, 13황자 전하도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그럼 아무도 함부로 말을 얹지 못할 거예요.”
황제가 힐긋 13황자를 쳐다보았다. 잠시 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따라와라. 화려.”
그렇게 우리는 다 같이 월무궁 밖을 빠져나와 인적 드문 길을 걸어갔고, 나중에는 대화원 안쪽의 넓은 길목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 수가 늘어나자, 자연히 우리를 보며 놀라는 이들도 늘어났다.
궁인들은 우리 일행을 보면 얼른 허리를 숙였지만, 우리가 지나쳐 가면 뒤에서 쳐다보며 쑥덕거렸다. 뒤통수에 달라붙는 그들의 시선이 노골적이라서 몰라볼 수가 없었다.
“너와 함께 나오니 좋구나. 앞으로도 가끔씩 널 데리고 산책 나와야겠다.”
그러나 황제는 황제인지, 남들이 쳐다보건 말건 느긋하게 내게 말을 걸었다.
“저와 함께 나와서 좋은 게 아니라 13황자 전하와 나와서 좋으신 게 아닐까요? 두 분은 정말로 많이 닮았거든요.”
나는 황제가 내게 뭐라고 말할 때마다 눈치껏 13황자에게로 대답이나 화살을 돌렸다.
13황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하다가, 내가 자기에게 말 흐름을 돌리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군사부일체에 대해 스승님께 많이 배웁니다. 군사부를 모시고 산책 나오니 소자도 좋습니다.”
“하하, 요 이국사가 군사부일체 얘기를 자주 하느냐?”
황제가 재밌어하며 묻자 13황자도 장난치듯 나를 쳐다보았다.
“입에 늘 달고 사시지요.”
“그렇지. 이국사는 짐과 같지. 그러니 잘하거라 화려야.”
황제가 거기에 한술 더 뜨면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게 뭔 날벼락인지 모르겠네. 폐하는 왜 갑자기 산책하자며 찾아온 거야? 회귀 전엔 이러지도 않았으면서!’
그래도 이 난데없는 산책에도 장점은 하나 있었다.
‘폐하가 말을 걸 때마다 내가 13황자에게 관심을 돌려주고 있잖아. 13황자가 내 태도를 보고 이전보단 좀 신뢰심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 * *
13황자는 ‘일부러 쥐죽은 듯이 지내고 있는데. 스승님 때문에 완전히 눈에 띄게 되었다.’라고 생각 중이었다.
황제가 무어라 말하건 계속 자기를 걸고 넘어지는 모양새는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스승이 자신을 무시하고 황제와만 대화하는 것도 별로였기에, 13황자는 스승이 자신을 끌어들일 때마다 마지못해 화제를 이어갔다.
“요 이국사가 잘난 얼굴인 걸 알았지만 저렇게 아리따운 줄은 몰랐군.”
그런 13황자의 속내도 모르고서, 궁인들은 이 특이한 조합을 구경하며 수군거렸다.
“폐하께서 일부러 이국사를 13황자 전하와 맺어주려 하신다더니. 이유를 알겠네. 두 분이 나란히 있으니 정말 선남선녀로구먼.”
“폐하께서 갑자기 무슨 일로 13황자 전하와 요 이국사를 데리고 산책하실까요? 원래는 13황자 전하께 찾아가는 일이 없었잖아요.”
“그러게.”
“한 번 위급한 상황을 겪고 나니 챙기게 되신 게 아니겠나?”
“폐하께서 13황자 전하를 총애하게 되신 걸까요?”
“사실 친모 문제 때문에 무시당해서 그렇지, 폐하를 가장 많이 닮은 분은 13황자 전하시지.”
궁인들은 황제가 방치하듯 하는 막내 황자를 산책에 데리고 나서자 신기해했다.
요화가 13황자를 데리고 나선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13황자와 황제의 조합 덕에 요화는 묻혀갈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13황자를 데리고 보란 듯 대화원을 거닐었단 이야기는 머지않아 황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폐하께서 13황자를 데리고 산책하러 다니셔?”
“예. 13황자와 요요화를 데리고 대화원을 거니셨다 합니다. 그 후엔 둘을 서재로 데려가셔서 차를 주시고요.”
태감이 달려와 황후에게 바로 보고하자, 황후는 초조하게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대체 갑자기 왜?”
황후의 상궁이 옆에서 조용히 차를 따라 주었다. 황후는 찻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13황자가 최근에 따로 무언가를 했던가? 아닌데. 왜 갑자기 그 애를 불렀을까.”
“요 며칠 보문 공주가 13황자를 계속 찾아갔지요.”
상궁이 황후의 고민을 보다가 옆에서 알려주었다.
“하지만 보문 공주가 13황자를 찾아가는 게 폐하께서 갑자기 그 애에게 관심을 보일 이유가 되느냐?”
“제가 뭘 알겠습니까.”
상궁은 대번에 물러났다.
황후는 눈썹을 찡그리고서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결국 고민 끝에 황후는 직접 보문을 불러 물어보기로 했다.
“보문 공주를 데려와라.”
잠시 뒤 보문 공주가 오자, 황후는 평소 같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13황자와는 잘 가까워지고 있는가?”
사실 황후는 보문 공주가 13황자의 수업에 끼어들려다가, 9황녀와 6황자의 훼방으로 인해 실패했단 이야기를 들어 알았다. 알면서도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보문 공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전하께서 저와 함께 태월에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