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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스승님은 사기꾼이시지요 (83/159)


83화. 스승님은 사기꾼이시지요
2022.12.15.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자, 13황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순진한 척 물었다.


“왜 놀라시는지요, 스승님?”

왜 놀라냐고?


“제가 언제 전하한테 사기를 쳤는데요?”

내가 항의하자 제자는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언제 사기를 안 쳤는지를 물어보셔야지요.”

뭐야?


“전 전하한테 늘 진실만을 말하는데요?”

나는 다시 항의했으나 제자는 태연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주로 사기꾼이 하는 말이로군요.”

그는 사람을 순 사기꾼 취급해 버리고서는 혼자 서책을 펼치면서 물었다.


“몇 쪽 할까요 스승님?”

“사기꾼에게 수업은 듣고 싶으신가 봅니다.”

그 모습이 얄미워서 쏘아붙이자 제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부러 부드러운 표정을 꾸며내며 조롱했다.


“사기꾼은 말을 잘하니까요.”

“220쪽 펴시지요!”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는 듣기 좋았으나, 나는 제자의 작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눈살을 구기고 펴지 않았다.

수업하는 내내 나는 제자가 대체 왜 나를 박쥐니 사기꾼이니 부르는지 의아해졌다.

회귀 전. 나는 제자를 배신한 적도 없고 제자에게 사기를 친 적도 없었다. 오히려 날 배신한 것도 제자였고 내게 사기를 친 것도 자기 아닌가?

물론 제자는 회귀를 한 번만 한 게 아니니 그 전전 회귀 때는 내가 그를 조금 배신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제자를 배신했다면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다. 난 아무나 배신하고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스승님.”

“220쪽이요.”

“스승님은 자신이 사기꾼이 아니라고 여기시는지요?”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수업을 하려는데. 제자가 또 사기꾼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책을 넘기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제자는 느긋하게 계속해서 서책을 넘기고 있었다.


“예.”

단호하게 대답하자, 제자는 서책 종이를 주르륵 흘려보내듯 빠르게 뒤로 넘기다가 어느 한쪽에서 우뚝 멈추더니 돌연 날 바라보며 물었다.


“스승님. 제자를 연모한다고 하셨지요?”

그 말에 나는 “예?” 하고 황당해서 되묻다가 그렇게 주장했던 걸 떠올리고서 얼른 말을 바꾸었다.


“아 그럼요. 그렇지요.”

“거 보세요.”

제자가 가볍게 웃었다.


“지금도 사기를 치고 계시지 않습니까.”

“!”

 

* * *

수업이 끝나자 나는 서둘러 정리하고 일어났다. 하지만 제자를 의식하느라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수업 전 제자가 한 말 때문에 그렇다. 그 말 때문에 심장이 조금 조마조마하게 뛰어서.

제자는 날 그냥 조금 놀리려고 사기꾼이라고 부른 게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나는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도 했고 그를 좋아하는 시늉을 하려고 마음도 먹었지만 마음만 먹었다. 막상 그를 앞에 두면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듯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바람둥이처럼 잘 굴었지만 유독 제자에게만 그러지 못했다. 말로만 연모한다고 하고 행동은 다르게 하니, 제자가 보기엔 내가 사기꾼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스승님.”

반성을 마치기도 전에 제자가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서책을 서랍 안에 집어넣다가 후다닥 손을 빼냈다.


“예?”

정자세를 하고 쳐다보자 제자가 책상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아홉째 누이와 선안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기가 사기꾼인 것도 모르는 스승님이 자아 성찰을 할 리가 없으니까요.”

뭐야?


“스승님 주위에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자가 거만하게 말했다.


“수업 시간에 수업 안 듣고 그 생각이나 하셨어요?”

나는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일부러 놀리는 척 비꼬다가 제자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전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줄 아시네요. 대단해요. 아무나 그러지 못하지요.”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뱉고서 나는 내 짐을 챙긴 다음 문가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제자는 내 책상에서 일어나더니 자연스럽게 따라 나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스승님이 제게 그 두 사람 일에 관해 물어보았다는 건, 스승님 친구가 그 일로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겠지요.”

이놈 머릿속에 귀신이 들어 있나……?


“제자가 조언을 드리자면, 그 둘이 싸우건 말건 스승님은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제자가 문을 활짝 열고서 내게 나가라고 눈짓했다. 나는 반쯤 나갔다가 도로 안으로 돌아와 물었다.


“왜요?”

“스승님이 끼어들수록 복잡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선안은 제 비밀을 지켜주다가 9황녀 전하한테 분노를 산 건데요. 책임감이 느껴져요.”

“그걸 왜 스승님이 책임지는지요?”

“예?”

“친구의 비밀을 지켜주는 것과 연인에게 솔직한 것, 둘 중 전자를 선택한 건 스승님의 친구입니다. 그 새X는 세 살입니까?”

“하지만…….”

“스승님 친구는 선택을 했고 아홉째 누이는 거기에 분노하는 겁니다. 스승님이 그 사이에서 쩔쩔맬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내가 ‘하지만 하지만’ 하고 자꾸 반박하자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이제 좀 가라는 듯 문을 두어 번 두드렸으나 나는 버티고서 물었다.


 


“하지만 전하. 선안이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9황녀 전하를 위해 소꿉친구인 제 비밀을 가볍게 털어놓는다면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요?”

“안타깝지만 스승님의 친구는 연인과 친구 사이에 낄 때부터 둘 중 누군가에겐 한 소리를 듣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계속 버티자 제자가 아예 가라고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안 가십니까, 스승님?”

아예 대놓고 가라고 말도 하네. 나는 결국 더 반박하지 못하고서 밖으로 나가 걸어갔다.

하지만 제자는 자기가 가라고 그렇게 말해 놓고서, 막상 내가 나가자 한 걸음 떨어져 따라오며 말했다.


“스승님 친구가 뭐라고 부탁하든 들어주시면 안 됩니다. 이제 스승님은 여인이고 아홉째 누이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아홉째 누이는 스승님과 선안이 가까이 지내는 걸 싫어할 겁니다.”

월무궁 대문 앞에 서서 나는 제자를 쳐다보았다. 그가 내게 하는 조언들이 모조리 다 부정적으로 들려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혹시 일부러 저러나?

제자는 근엄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 비꼬거나 놀리는 기색은 없었다.


“전 평생 선안과 친구였는데요. 제가 여인이란 이유만으로 멀어져야 한다면 슬프잖아요, 전하.”

“어쩔 수 없지요.”

“제 친구들은 전부 사내인걸요. 그럼 제게 남는 친구가 없어요.”

말하고 나니 서글프네. 이러다 진짜로 친구가 하나도 안 남게 되면 어쩌지?

비슷한 가문의 여식들은 모두 린화와 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교류하며 린화와 우정을 쌓아온 그들이 이제 와서 ‘친구 오라버니’라 여겼던 나를 받아줄 리는 없었다.

나는 침울하게 말하는데 제자는 오히려 입꼬리가 올라갔다. 심지어 그걸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노골적으로 미소 짓는 얼굴로 대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스승님의 제자이자 남편이자 가족이자 유일한 친구가 되겠군요.”

즐거워하는 태도가 묘하게 기분이 나빠서 나는 인상을 찡그리고 물었다.


“가족은 갑자기 왜요? 가족은 많은데요.”

“스승님의 가족들은 모두 다 동생만 챙기지 않던가요? 그런 가족은 마음에서 지우는 게 낫지요.”

……왜 저렇게 인간이 극단적이지? 조언을 하는 거야 저주를 퍼붓는 거야?

* * *

제자가 한 조언이 그의 많은 회귀에서 나온 조언일까, 아니면 날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계책일까?

제자의 조언을 듣고 나니 더욱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어떻게 보면 9황녀를 위해서 선안과 내가 거리를 두는 게 맞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건 너무 허무한 일 같았다.

그는 나를 사내로만 여기고 나도 선안에게 아무 생각이 없는데. 사회가 남녀를 유별하게 본단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우정을 난데없이 버려야 한다니.

그렇게 멍하게 걷느라 나는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면서 계속 부르는 것도 뒤늦게 눈치챘다.

소리가 난 쪽을 보니 9황녀 옆에 달라붙어 다니는 측근 궁녀가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요 대인, 혹시 지금 바쁘십니까?”

궁녀는 코앞까지 다가와서는 밝게 물었다. 반대로 나는 9황녀의 궁녀를 보자마자 심장이 추가 달린 듯 묵직해졌다.


“아니네. 왜 그러나?”

그렇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고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물었다. 설마 9황녀가 나를 부른다던가 그런 말을 하진 않겠지?


“9황녀 전하께서 요 대인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물어볼 게 있으시다고요.”

아이고오…….

* * *

9황녀가 머무는 처소로 가니 사방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내리꽂혔다. 태감이건 궁녀건 가릴 것 없이 다들 내 쪽을 힐긋거렸다.

나는 얼굴이 철면피인 것처럼 9황녀의 측근 궁녀를 따라갔다.


“전하, 요 대인을 데려왔습니다.”

문 앞에 다다르자 측근 궁녀가 커다랗게 외치며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 돌아서자마자 나는 긴 의자 앞에 팔짱을 끼고서 무시무시하게 서 있는 9황녀를 발견했다.

9황녀의 방은 포근하고 안락해 보였으나 방 주인은 눈이 흉흉하고 무서웠다.


“9황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래도 모른 척 미소 지으며 인사하자 9황녀가 대번에 호통쳤다.


“날 보면서 그렇게 멋지게 웃지 말거라!”

난처한 표정을 지어내자 9황녀가 재차 지시했다.


“저쪽 보고 얘기하거라!”

조금 비스듬하게 돌아서자 9황녀가 다시 명령했다.


“옆모습도 멋지잖아! 뒤통수로 얘기하거라!”

……진심이야?

당혹스럽지만 9황녀가 원하는 대로 완전히 뒤로 돌아서자 9황녀가 긴 의자에 털썩 앉는 소리가 났다.


“소신을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문을 보고 이야기하려니 이상했으나 그래도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물었다. 9황녀가 왜 나를 불렀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이를 내색하진 않았다.


“선안이 내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9황녀는 역시 호탕한 성품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말을 꼬지 않고 대번에 본론을 집어던졌다.


“그것 때문에 몹시 화가 나. 요 이국사.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내가 화를 내는 게 옳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선안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반쯤 열린 문 너머에서 9황녀의 측근 궁녀가 이쪽으로 살금살금 고개를 들이밀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달아났다. 그녀는 내가 뒤돌아 서 있을 거라고 짐작하지 못한 눈치였다.


“얼른 말하라.”

잠시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사이. 9황녀가 뒤에서 차갑게 재촉했다. 나는 두 손을 붙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았다.

하지만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도 뛰었다. 9황녀의 부름을 받고 여기 오면서도 그녀가 이 정도로 노골적인 질문을 던질 줄은 몰랐다.

젠장. 어쩌지?


“요 이국사. 왜 대답을 안 해?”

선안 편을 들면 9황녀가 분노할 거다. 9황녀를 편들면 너무 가식적으로 보이겠지. 틀림없이 빈말이란 걸 알 거야.

게다가 9황녀가 선안에게 애정이 남아 있다면 내가 그의 정혼자를 배신하는 건 그 나름대로 싫어할 터였다.

모르겠다고 할 수도 없다. 그건 무책임하게 보일 것이다.


“요 이국사……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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