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소가주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 (82/159)


82화. 소가주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
2022.12.12.



 
제자의 심장 소리가 이렇게 빠르다니. 왜 그런가 싶어서 자세히 들으려 귀를 더 들이밀려는데 월섬이 나를 잡아당겼다.

내가 제자에게서 떨어지자, 월섬이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뒤늦게 아차 싶어서 올려다보니 제자는 미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마차가!”

당황해서 나는 괜히 지나간 마차 쪽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짐을 한가득 쌓은 짐마차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고, 그걸 피하느라 다른 사람들도 이리저리 튕겨 나가고 있었다.


“괜찮으신지요?”

삿대질하는 내 손을 내리면서 제자가 물었다.


“머, 머리가 좀 어지럽네요! 많이 놀라서요! 제가 잠시 기절했나 봅니다. 전하 덕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 이만 가볼게요. 바빠서요.”

나는 빠르게 둘러대고서 얼른 월섬을 챙겨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휴 망신 망신! 왜 거기서 제자 심장 소리를 듣고 선 거야! 미쳤다 요요화! 미쳤어 요요화!’

하지만 제자 심장 소리가 상당히 컸다고! 철 같고 얼음 같은 사람에게서 심장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면 누구라도 놀라서 더 자세히 듣고 싶을 거다.


‘하지만 정보 하나는 얻었어. 제자도 나를 좀 무서워하는 거 같아.’

전에 내가 우산 드니까 찌르지 말라 한 것도 그렇고…… 나랑 딱 붙으니까 심장 박동 빨라지는 것도 그렇고.


“스승님.”

온전히 다 멀어지기도 전에 제자가 다시 뒤에서 불렀다. 좀 먼 뒤가 아니라 바로 뒤에서.


“!”

놀라 돌아서다가 비틀하자 제자가 팔을 잡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중얼거리고서 얼른 뒤로 물러나 올려다보니, 제자는 나와 달리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나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던 사람 같지 않았다.


“어딜 가시는지요?”

게다가 내가 달아났던 게 무색하리만큼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물건도 사야지요. 과일만 사고 돌아가실 겁니까?”

결국 우리는 다시 장으로 갔고, 제자의 주도하에 집에서 만들기 힘든 간식을 몇 종류 더 구매했다.


“이제 다 되었는지요?”

물건을 살 만큼 사고 나자 제자는 내 부탁을 받아서 억지로 같이 다녀주기라도 한 것처럼 물었다.


“예!”

화를 드러내려 살짝 크게 대답하자, 제자는 그제야 미소 짓고서 말했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은데요.”

도도하게 거절했지만, 제자는 순 자기 마음대로였다.


“스승님이 또 도박하러 가시면 안 되니까요.”

도박 소리에 월섬이 나를 커다래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쁜 제자 같으니. 일부러 저러는 거야.’

한 무리의 상인과 손님들이 언성을 높여 싸우는 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서 그들을 지나쳤고, 마차들이 이리저리 얽힌 거리도 조용히 지나갔다.

장이 선 구역을 빠져나오자 거리는 넓어졌으나 오가는 사람 수는 한결 줄어들었다.

나는 조용히 걷다가 한 번씩 제자의 긴 옷자락 끝을 곁눈질했다. 그는 춥지도 않은지 아주 얇게 입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됩니다.”

집 근처에 왔을 즈음. 나는 제자를 불러세웠다.


“더 멀리 바래다주시면 부모님이 놀라서 감당 못 할 거예요.”

내 뒤에서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월섬이 슬그머니 뒤로 바짝 붙어 섰다.

제자는 걸음을 멈추고서 뒷짐을 지고 물었다.


“혼자 잘 들어가실 수 있겠는지요?”

“우리 집 근처인걸요. 그리고 혼자 아닌데요.”

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

하지만 작별 인사는 하지 않았다.


“제자는 스승님께 가문을 이끌 특출난 능력은 바라지 않습니다.”

헛소리만 할 뿐.

제자의 난데없는 소리에 나는 “예?” 하고 되물었다.

제자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굳이 손으로 펼쳐 보이며 덧붙였다.


“스승님은 가문을 다스리는 법은 됐으니, 도덕심, 의리, 이런 걸 함양하도록 하세요.”

“아니 제가 어때서요? 폐하는 저만큼 의리 있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하셨는데요?”

“스승님은 박쥐 같은 분이시지요.”

뭐야?

기막힌 소리를 뱉은 제자는 혼자 터덜터덜 왔던 길을 돌아갔다.

어이가 없어서 그 동그란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자니, 월섬이 내 소매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만 가시지요, 애기씨.”

나는 돌아서긴 했으나 참지 못하고 월섬에게 제자를 흉보았다.


“저 나쁜 사람 말하는 소릴 들었지?”

“어휴, 나쁜 사람이라니요. 무서운 소리 마셔요.”

하지만 월섬은 제자가 황자이기 때문에 나와 같이 제자를 흉보아주지 않았다.


“말을 너무 나쁘게 하잖아. 나더러 박쥐래, 그 인간이.”

“애기씨, 인간이라니요.”

“난 인간이라고 불렀지. 하지만 자기는 나더러 박쥐라고 했어!”

월섬이 걸음을 빨리했다. 월섬의 공포가 덩달아 전해져서 나는 제자가 안 쫓아오고 있는지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집 안에 들어왔을 즈음에야 월섬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전하가 소가주님을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영 모르겠어요. 어찌 보면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네요.”

 

* * *

혹시라도 숙부들이 식솔들을 데리고 오지 않는다면, 나는 제자를 크게 비웃어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숙부들이 데려오는 손님을 다 합하면 스무 명 가까이 될 거란 제자의 말은 옳았다.

숙부 하나는 그로부터 칠 일 후 식솔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숙부 하나는 그다음 날 새벽 식솔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그날 늦은 저녁, 마지막 숙부가 식솔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그들을 모두 합치니 열일곱 명이었다.

제자가 예측한 스무 명보다는 적었지만 내가 예상한 세 명과는 전혀 다른 수였다.


“전하는 영민하시네요.”

숙부3이 식솔들을 데리고 나타난 날. 월섬은 내 방에 간식을 가져다주며 감탄했다.

그다음 날. 나는 수업을 위해 월무궁으로 갔고, 제자에게 숙부들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버지는 푹 휴식한 숙부들을 불러서 집안일을 의논했다.

그리고 저녁에 내가 퇴궐해서 돌아오자, 아버지는 낮 동안 숙부들과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네 숙부들이 조사해보니, 현재 가장 촌수가 가까운 건 내 숙부의 서출 아들 두 명이란다.”

“아버지 사촌이요?”

“그렇지. 하지만 난 이들을 두세 번 정도밖에 만난 적이 없어. 게다가 둘 다 서출이라서 좀 애매한 부분이 있지.”

“그렇군요…….”

서자는 적자보다 순서가 밀리지만, 장자는 동생들보다 순서에서 우선한다. 그래서 서장자가 있으면 족보가 꼬였다.

우리나라는 적서차별이 없는 나라는 아니었으나, 운월만큼 심한 나라도 아니었다. 그들이 소가주 자리를 가져갈 수 있다고도 없다고도 확실하게 말하기 힘들었다.


“어휴.”

내가 투덜거리자 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다음으로 촌수가 가까운 게 5촌 당숙인데, 한 명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 하지만 다른 한 명이 후처에게서 본 늦둥이라 나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더라.”

5촌 당숙이면 관계가 어떻게 되지?

아버지의…… 작은할아버지의…… 아들들인가?


“후처가 낳은 아들은 심지어 너보다도 몇 살밖에 많지 않아. 그리고 네 숙부가 조사한 바로는 둘 다 소가주 자리에 욕심을 가지고 있대.”

“심각하네요.”

월섬이 차를 가져와 조심조심 아버지와 내 앞에 내려놓고 나갔다. 나는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아버지의 사촌 서출들은요?”

“네 숙부가 보기엔 소가주 자리에 관심이 있어 보였대.”

“오.”

“다른 한 명은 내 종증조부란다.”

“어…… 그 정도면 연배가 어마어마하게 높을 거 같은데요. 아버지의 소가주가 되기엔 좀 그렇지 않나요?”

아버지가 푹 한숨을 내쉬자 찻잔의 연기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숙부가 보기에 그분은 소가주 자리에 전혀 욕심이 없으시다는구나. 문제는 그분의 손주들이 관심을 보인단 거지.”

아버지는 차를 마시면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관찰하다가 물었다.


“꼭 그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 소가주 자리를 주어야 해요? 제가 이 자리를 계속 지킬 순 없을까요?”

아버지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버지는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 * *

숙부와 그 식구들이 찾아왔다지만 다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거나 하진 않았다. 잔치를 벌이러 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숙모들은 각자 집안을 이끌어야 하기에 아예 이곳에 오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하러 갔다가 숙부 셋에게만 인사를 드렸고, 이후에는 계속 입궐과 퇴궐을 반복하느라 평소처럼 지냈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을 돌아다니는 사촌들의 존재는, 소가주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먼 친척들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일깨워주었다.


‘교류가 거의 없어서 아버지조차 이름과 촌수를 조사해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문을 통째로 가져갈 수도 있는 거구나. 너무 이상한 거 같아.’

내가 잘 알고 지내는 건 가족들뿐이고, 사촌들도 린화 쪽과 친하지 나와는 가깝지 않았다. 나는 사내아이로 컸는데 사촌들이 죄다 여자아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사촌들과 린화가 어울릴 동안 거기에 끼지 못하고 혼자 서책을 읽어야 했다.

내내 가산과 소가주 자리를 지키려 평생을 사내아이로 커 왔다. 그런 자리를 남 같은 사람에게 넘기고 나면 앞으로는 일이 어떻게 흘러갈까?

벌써부터 걱정이 밀려왔다.


 

* * *

이런저런 걱정을 하느라 마음이 무거운 어느 날이었다. 입궐할 채비를 마치고 궁궐로 걸어가는 도중이었다.


“요화!”

옆 거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뜻밖에도 선안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안? 자네가 여긴 왜 왔나?”

오전 시간에 선안과 입궐 도중 마주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회귀 전에도.

내가 놀라서 묻자 선안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일단 걷자고 손짓했다.

나란히 걸어가기 시작하자 그제야 선안은 하소연했다.


“9황녀 전하가 내게 화가 많이 난 모양이네. 서신을 보내도 답장이 없으셔. 벌써 열 통도 넘게 보냈을 거네.”

“이런.”

“요화 자네도 알겠지만 난 여인들과 교류가 없지 않나. 교류는 자네가 혼자 했지.”

“그렇지.”

“난 9황녀 전하께서 어떻게 해야 화가 풀릴지 짐작도 가지 않네.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요화. 어찌할까?”

선안이 간절한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나는 황당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난데없이 여기에 왜 왔나 했더니. 그걸 물어보러 온 거였어?


“내가 그걸 어찌 알아?”

당황해서 되묻자 선안이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자네는 알 거야. 자네는 사내일 때도 바람둥이였고 여인일 때는 여인 아닌가! 어느 쪽이든 나보단 더 잘 알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단호하게 잘랐지만 선안은 계속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예 궁문 안까지 따라 들어올 태세였다.

결국 나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알았어. 방법이 있나 없나 나도 머리 좀 써보겠네.”

선안과 9황녀가 싸운 원인에는 나도 연관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의 싸움에서 아예 발을 뺄 수가 없었다.


“고맙네! 자넨 역시 의리가 최고야!”

선안은 떠났지만 나는 졸지에 남의 고민까지 함께 떠안게 되자 양어깨가 무거워졌다. 우리 가문 일도 머리가 아픈데 여기에 선안과 9황녀 일까지…….

덕택에 월무궁 안에 들어와서도 나는 평소처럼 제자에게 밝은 척 인사하지 못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하.”

나는 조용히 인사하고서 내 자리로 가서 조용히 앉았다. 그러고서 서책을 펼치는데, 제자가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안색이 나쁩니다, 스승님. 집안일 때문이십니까?”

나는 별거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아니요”라고 말하고서 보니, 문득 제자는 회귀를 여러 번 했단 게 떠올랐다.

안 그래도 나보다 머리가 좋은 데다 삶의 경험까지 나보다 훨씬 많으니, 제자는 이 문제에 대해 좋은 방안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저, 전하. 만약에요.”

“예.”

“제가 전하한테 사기를 쳤어요.”

제자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뭐야.


“예.”

“전하는 그걸 믿고 살았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제가 사기꾼이란 걸 알았어요.”

“그렇군요.”

“그럼 기분이 어떨까요?”

“늘 있는 일이로군요. 지금 기분을 말하면 될지요?”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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