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과일을 좋아하는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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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과일을 좋아하는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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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과일을 좋아하는 스승님
2022.12.08.
나는 제자가 나타남과 거의 동시에 월섬의 뒤로 몸을 숨기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반쯤 가렸다.
“가자, 섬아.”
젠장, 아까는 저만치 앞에 있었는데. 대체 언제 이 옆까지 온 거야? 빨리도 이동한다! 나는 제자를 무시한 채 월섬을 이마로 밀었다.
“스승님?”
제자가 재차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를 평소보다 좀 더 높게 하고서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이상한 사내로구나. 얼른 가자.”
계속 이마로 쿡쿡 밀어대자 월섬이 마지못해 앞으로 나아갔다.
“스승님이 아니신지요?”
그래도 옆에서 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이고 있는 시야로 제자의 발이 보였다. 아니, 이 작자가 따라 걷고 있잖아?
“누군지 모르겠지만 양갓집 규수한테 함부로 말 걸고 하지 마시오.”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아예 딱 잘라 말했다. 물론 계속해서 월섬은 이마로 밀어댔다. 월섬이 눈치껏 발을 좀 더 빨리했다.
“용모가 꼭 우리 스승님 같았는데요.”
하지만 제자는 집요하게도 발걸음까지 맞추어 따라오며 물었다.
아니, 설령 내가 확실하다고 여겨져도 이쯤 되면 그냥 ‘아닌가?’ 하고 떠나야지!
“난 그쪽 스승님을 모르오.”
차갑게 반응해도 제자는 물러나지 않았다.
월섬의 등 근육이 연이어 움찔거렸다. 이 상황이 난처한 듯했다.
미안해 월섬아. 하지만 이렇게 예쁜 모습으로 제자랑 마주치고 싶지 않아.
“이런. 그러십니까?”
다행히 계속 우겨대자 제자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했다.
“그러오. 그러니 얼른 가시오. 낯선 사내가 옆에서 말을 거니 내 마음이 좋지 않소. 나는 낯선 사내랑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소.”
나는 마지막 공격을 날리고서 월섬에게 옆으로 틀자고 신호했다. 월섬이 길 방향을 바꾸었다.
“그렇군요. 실은 낭자는 제 스승님과 닮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계속해서 따라왔다. 아까와는 말을 좀 바꾸면서.
“그러면 왜 따라오시오?”
짜증이 나서 매몰차게 묻자 제자가 듣는 귀가 편안해질 만큼 다정하게 말했다.
“제 스승님은 낭자만큼 아름답지 못하지요. 제 스승님은 못났거든요.”
뭐 이 자식아?
“아 근데 왜 날 따라오시오?”
“낭자가 마음에 들어서요.”
이제 월섬의 등 근육은 긴장한 고양이 등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도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그걸 의식한 건 일단 표정을 구긴 후였다.
“무엄한 사내로군. 얼른 꺼지시오!”
나는 이틈을 타서 제자에게 막말을 쏟은 다음 월섬에게 또 옆으로 가자고 신호했다.
월섬이 다시 방향을 틀었다.
“아니 저 소저는 왜 저러고 다닌대? 염소야?”
누군가 날 보고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고개도 들지 않았다.
“낭자, 고개를 들고 날 한번 보는 게 어떤가요?”
제자는 계속 능글거렸다. 그는 치가 떨릴 만큼 고집스러웠다.
“저리 가요.”
“낭자도 날 보면 마음에 들 겁니다. 내 용모는 낭자보다 뛰어나거든요.”
사람들은 자꾸 날 비웃지, 제자는 옆에서 자꾸 신경질 나게 말해대지, 허리는 아프지, 월섬은 난처한 듯하지. 점점 나도 성질이 났다.
특히 제자가 ‘나랑 다르게 아주 아리따운’ 여인을 체면도 없이 쫓아다니면서 이리 구애하는 게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나한테는 독사발을 주고서 다른 여인들 뒤는 이리 채신머리없이 쫓아다니다니!
“우리 혼인할까요? 낭자, 혼인하지 않았지요?”
그러다 제자가 초면인 여인에게 구혼까지 하자, 그의 정혼자로서 나는 참지 못하고 휙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 맨날 가볍다고 타박하더니 자기가 더 가볍네!
‘나다 이놈아!’
하지만 고개를 들자 보인 건 입가에 조롱하는 미소를 띤 제자의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쳤으나 제자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제자는 내가 나인 걸 알면서 일부러 쫓아오면서 놀려댄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스승님.”
제자가 빙그레 웃었다.
“너무하십니다!”
그에게 놀림 받은 걸 인지하자 나는 화가 나서 작게 소리쳤다. 얼굴에 열이 화끈화끈 올라왔다. 완전 멍청이 취급을 당했잖아!
“너무한 건 스승님이십니다.”
제자는 미소를 거두고서 느긋하게 대답했다.
“제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도 먼저 모른 척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사람을 가지고 노는 법이 어딨습니까?”
“스승님도 다른 사람인 척 제게 꺼지라 하지 않았던가요?”
“제가요? 제가 언제요?”
“오호라. 발뺌도 잘하시네요.”
월섬도 대화를 듣고서 눈앞의 사내가 13황자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내가 자기 등에서 이마를 뗐는데도 등 근육이 계속해서 펄쩍거렸다.
“왜 자꾸 절 쫓아오셨어요?”
나는 제자를 너무 노려보지 않으려 애쓰며 항의했다. 화내면 안 돼. 쟤는 내 목숨줄을 쥐고 있어.
“스승님이 제자를 무시하고 가셔서요.”
“이럴 땐 좀 모른 척해주시면 안 돼요?”
내가 발끈해서 묻자 제자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내 머리에 달린 방울을 톡 건드렸다. 머리에서 찰랑이는 소리가 나자 그가 픽 웃으며 물었다.
“이런 복장은 왜 하고 다니십니까?”
“장 보러 나왔어요.”
“평소처럼 다녀도 장은 볼 수 있으실 텐데요.”
“전 바빠요.”
나는 휙 돌아서서 걸었으나 제자가 나란히 따라왔다.
“마님께서 애기씨께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월섬이 주춤주춤 뒤로 빠지면서 대신 설명해주었다.
“애기씨.”
제자가 풋 소리 내어서 그 단어를 비웃는 바람에 월섬도 곧 조용해졌지만.
“정말 스승님과 안 어울리십니다.”
“…….”
나와 월섬이 모두 침묵하자 제자가 말을 돌렸다.
“무슨 심부름인가요?”
“숙부님들이 온다고 해서 대접할 만한 것들을 사러 나왔어요.”
계속 무시할 수는 없어서 뚱하게 대답하자, 제자가 핵심을 짚었다.
“그걸 왜 굳이 ‘애기씨’가 보러 나오는지요?”
“저…… 마님께서요.”
월섬은 내가 대답할 것 같지 않은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면서 자신이 나섰다.
“애기씨가 혼인하면 집안을 이끌어야 하니 미리미리 집안 다스리는 법을 배워두라고 하셔서요. 애기씨는 그런 건 배운 적이 없으시거든요.”
혼인 이야기나 집안을 이끈단 이야기를 예비 정혼자 앞에서 하자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나는 끼어들지 않고서 남 이야기를 듣는 척 빠르게 걷기만 했다.
나나 월섬이 뭐라고 하든 교묘하게 조롱하고 비꼬던 제자도 이번에는 침묵했다.
월섬까지 조용해지자 완전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얼마나 계속 걸어갔을까. 어느새 우리는 시장의 끄트머리쯤에 와 있었다.
“제자가 도와드리지요.”
어쩔 수 없이 돌아서는데 거의 동시에 제자가 말했다.
“도와주신다니요?”
더 피할 수도 없어서 무뚝뚝하게 묻자 제자가 태연히 물었다.
“뭘 사실 건지요?”
“과일이요.”
“과일은 왜요?”
“숙부님 셋 중에 한 분은 좋아하실 거 같아서요.”
“같아서요?”
“……확실하진 않아요.”
제자의 입가가 씰룩였다. 그는 못된 미소를 잠깐 지었다가 얼른 풀면서 말했다.
“안 좋아하면 어쩌지요?”
“제가 좋아하니 괜찮아요.”
제자에게 놀림 받는 기분이 들어서 딱 잘라 말하자, 제자의 입꼬리가 의뭉스럽게 올라갔다.
“아하. 그러면 문제없지요.”
월섬이 입가를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월섬에게도 제자가 나를 놀리는 것처럼 보이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면 과일을 사지요.”
사람을 멋대로 놀려 놓고서, 제자는 우리가 같이 가기로 결정이 된 것처럼 말했다.
“안 도와주셔도 돼요.”
나는 제자에게 딱 잘라 말했다.
“저와 월섬 둘이서도 충분해요. 과일 하나 못 살까 봐요?”
“그럼 스승님의 모친은 스승님이 과일 하나도 못 산다고 생각하셨을까요?”
“예?”
“과일을 서너 개 사들이는 것과 대규모로 거래하는 건 다릅니다, 스승님.”
나는 월섬을 쳐다보았다. 월섬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어쩌면 황궁에서 태감과 궁녀들이 해주는 대로만 살아온 귀한 황자가 어떻게 저런 걸 아나 궁금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회귀 전에도 그가 시장에 나와 거래할 일은 없었다. 그 이전 삶에서는 그럴 일이 있었을까?
“따라오세요.”
제자는 꽤 커다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자판대에 진열된 과일의 종류가 아주 다양했으나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과일 개수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 가게였다.
“중요한 가족 손님 스무 명쯤을 스무일 정도 대접하려 하는데.”
제자는 막 일어서는 주인에게 가자마자 바로 그렇게 말했다.
“손님은 세 명인데요?”
내가 놀라 끼어들자 제자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다시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스무 명.”
제자는 과일 품목과 개수, 들어오는 날짜, 하루에 몇 개씩 가져다줄지를 주인과 상의해 정했고, 가게 주인의 조수가 다가와 그걸 작은 종이에 기입했다.
조수가 먹물이 마르도록 종이를 흔드는 사이 월섬이 멍하게 서 있다가 얼른 나서서 물었다.
“약조금은 얼마를 내면 될까요?”
월섬이 약조금을 내고 나서 우리는 가게를 나왔다.
제자는 월섬에게 가게 주인이 건넨 종이를 건넸다.
“왜 손님이 스무 명이라 하셨습니까?”
나는 가게에서 멀찍이 떨어졌을 때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자가 날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사람 수를 늘린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이 부분은 확실히 해야 했다.
“스승님이 남은 열일곱 명 분을 먹으면 되겠구나 싶어서요.”
“예?!”
“농입니다.”
제자는 내가 펄쩍 뛰느라 뒤집어진 머리 장식을 슬쩍 제대로 뒤집어 주었다.
“아무 행사도 없는 시기에 스승님의 숙부들이 모두 다 온다는 건 필시 소가주 건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서이겠지요.”
“!”
“그런 중요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숙부 셋만 오진 않을 겁니다. 가족들을 데리고 오겠지요. 그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이 스무 명이 안 되더라도 요씨 가문에서 데리고 있는 식솔들이 많으니 과일 몇 개가 넘는 정도는 알아서 처분할 수 있을 겁니다.”
제자가 나와 월섬을 번갈아 보더니 눈매가 휘어지도록 웃으며 덧붙였다.
“청을 만들어도 좋고 말려 먹어도 좋고, 과일 좋아하는 스승님이 여러 개 먹어도 좋고, 스승님이 방패로 사용하는 저 시비에게 줘도 좋겠지요.”
월섬이 입을 쩍 벌렸다.
나도 할 말을 찾지 못하고서 제자를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회귀의 어느 시점에서 저런 걸 알게 된 건지, 아니면 유동백과 있다 보니 알게 된 건지 궁금해졌다.
회귀 전 제자는 궁궐 안에서만 살았다. 혼인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궁궐 안에서 자신의 거처를 조금씩 바꾸어 가다가 결국 황제의 침소를 차지했지. 그가 과일에 신경 쓸 일이 뭐가 있었겠나.
그 순간 제자가 나와 월섬을 동시에 끌어당겼다.
월섬은 제자의 옆으로 허우적대며 나갔고 나는 제자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품과 내 코가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요란스럽게 마차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제자의 옷에서는 자기 방에서 나던 은은하고 좋은 먹 냄새가 났다. 나는 놀라서 그를 밀려 했으나 그의 심장 박동을 듣는 바람에 바로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빠르다.’
내 심장도 만만치 않게 빠르긴 했는데. 제자의 심장 역시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