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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늘 유령처럼 나타나는 (80/159)


80화. 늘 유령처럼 나타나는
2022.12.05.



 
황후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그녀가 썼을 터였다.

물론 그런 방법으로 13황자의 혼담을 엎더라도 보문 공주는 13황자와 혼인하지 못할 터이지만.


“정혼한다고 해서 다 혼인하는 건 아니지.”

속내를 감추고 황후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우리나라는 자녀들이 나이가 많은 순으로 혼인한다네. 그리고 이 때문에 3황자 밑으로는 혼사가 다 막혀 있어. 3황자가 몸이 많이 안 좋거든. 어쩔 수 없지. 황자비를 낼 만한 가문에서 여식을 과부로 만들고 싶겠나? 이미 자네도 아는 이야기지?”

보문 공주가 처음 듣는다는 듯 입가를 가리며 탄식했다.


“위로 줄줄이 형과 누나들이 많으니 빨리빨리 혼사를 진행하더라도 13황자가 혼인하려면 최소 몇 해는 지나야 할 걸세. 몇 해 사이면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지.”

황후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보문 공주에게 눈을 찡긋했다.

보문 공주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자네 말처럼 요요화는 남장한 여인이니 특히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 가만히 두어도 파혼할 수 있으니 공주는 함부로 나서지 말고 기다려보게.”

황후는 잠시 생각하다가 슬쩍 덧붙였다.


“13황자에게 호감을 사면서.”

보문 공주가 나가자 황후의 상궁이 다가와서 코웃음 쳤다.


“태월 여인들은 정말로 부끄러움도 없군요. 마마와 자기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라고 그런 부탁을 다 하고 간답니까?”

황후는 그 말에 동조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서 아까 15황녀가 가지고 놀다가 구석으로 굴러간 공을 주워왔다.


“위려는?”

“지금쯤은 방에서 놀고 계실 겁니다, 마마.”

“그래.”

황후는 아이가 가지고 놀던 공을 만지작거리다가 상궁에게 건넸다.


“이따가 가져다주거라. 맛있는 간식도 주고.”

“예. 한데 마마. 왜 보문 공주에겐 13황자와 가까이하라 조언하셨습니까? 소인은 마마께옵서 그 여자를 싫어하는 줄 알았습니다.”

“태월 여인들은 적극적이지.”

“?”

“이렇게 말해두면 자기가 알아서 13황자에게 다가갈 거네.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수준으로. 그 공주와 13황자가 얽히면 염문설 때문에 혼담이 깨질 수 있지. 그런 추문으로 혼담이 깨지면 폐하께서 그 공주와 13황자를 혼인시키려 하시겠나?”

 

* * *

수업이 없는 날이라 나는 방 안에서 아침부터 뒹굴었다.

요 며칠 동안 이국사 자리에서 쫓겨나니 마니 하면서 너무 많은 정신을 소모했다. 이제 게으름을 부리면서 열심히 지친 마음을 다독여주어야 했다.

소중한 나. 내가 아껴 주어야지.


“도련님, 아니, 소가주님!”

그런데 오시 말경, 내 사내종인 월강이 들어와 알렸다.


“난균이란 도령이 찾아와서 도련님, 아이구, 죄송합니다. 부르던 게 습관이 돼서 잘 고쳐지질 않네요. 난균이란 도령이 소가주님 뵙고 싶다 하시는데요?”

난균. 내가 린화와 혼인시키려고 했던 새끼. 회귀 전엔 실제로 내 매부였지. 이제 왔구나.


“난균이라면 그 사람 아닌가요? 소가주님이 린화 아가씨랑 맺어주려 했던 그분이요.”

시비인 월섬이 침상에서 조금 떨어진 탁자에 앉아 꽃꽂이를 하면서 물었다.


“아아!”

월강도 이름이 기억났는지 바로 입을 벌렸다.


“맞아.”

나는 침상에서 마지못해 일어났다. 너무 늦게 와서 이미 소용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내가 불렀으니 만나보긴 해야겠지.

나는 겉옷을 걸친 다음 월강을 따라 대문가로 걸어갔다.

그곳에 내 회귀 전 매부인 난균이 뒷짐을 지고서 흔들림도 없이 서 있었다.


“요 공자.”

내가 다가가자 난균이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직 내가 여인이란 소문을 못 들은 모양이었다. 내가 남장을 안 풀고 있기도 하고.


“내가 너무 늦게 왔지요. 미안합니다. 요 공자가 보낸 서신은 잘 받았습니다. 서신을 받고 바로 올라오려 했지만, 급히 처리할 일이 있는 데다 도중에 마차 사고가 나서 며칠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답니다.”

난균의 사과를 듣고 있는데, 아버지가 문 너머로 들어오며 물었다.


“요화야. 새 친구니?”

난균이 아버지를 돌아보더니 아까 내게 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공손하게 인사했다.

아버지는 난균의 이름과 소개를 듣자 그대로 돌덩어리가 되어버렸다.


“난균. 자네가 난균이라고?”

“예, 어르신.”

난균의 미소를 보며 아버지의 낯빛이 아예 하얗게 변했다.

회귀 전. 아버지는 난균을 아주 좋아했다. 우리 사위 우리 사위 노래를 부르며 내게 난균의 장점을 줄줄 늘어놓을 정도였다.

즉, 난균은 아버지가 원하는 사윗감에 정통으로 들이 맞는 150점짜리 이상형이었다.


“자네가 난균이었다고!”

아버지는 다시 소리 지르더니 난균의 얼굴과 자태를 이리저리 뜯어보기 시작했다.

난균이 멋쩍게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한참 뒤에야 시무룩해져서 똑바로 섰다.


“그래…… 자네가 난균이었군.”

난균이 내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멀리까지 와주었는데 미안합니다, 공자. 내 누이가 이미 후궁으로 들어가 버려서요.”

“아!”

난균이 탄식했다.


“아버지는 난 공자가 너무 훤칠하고 멋져 보이니 아쉬워서 저러시는 겁니다. 전 공자에 대해서 좋은 칭찬을 많이 들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공자에 대해 모르고 있었거든요.”

난균이 쑥스러운지 귓가를 붉히고 웃었다.


“과한 칭찬을 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요 낭자가 이미 입궁했다니 저도 아쉽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관심을 보이셨거든요.”

“아아!”

아버지가 괴로운 소리를 냈다.

난균이 몇 마디를 더 하다가 차 마시자는 걸 거절하고 돌아간 뒤. 아버지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쳐다보았다.


“저렇게…… 저렇게 대나무처럼 잘생긴 청년이었다고?”

아버지는 한참 만에야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아버지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포기하세요.”

“그 청년은 목소리까지 좋던데!”

“어쩌겠어요. 셋째가 태어나도 난균이랑은 혼인 못 해요. 포기하세요.”

“!”

“그런데 아버지는 왜 여기 계세요? 아직 퇴궐한 시간도 아니시잖아요?”

아버지는 얼마나 힘이 빠졌는지 내 질문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터덜터덜 내당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는 뒤늦게 심부름꾼에게 딸려 난균에게 보냈던 우리 가문 패가 떠올랐다.


“아. 패 돌려받아야 하는데. 까먹었다.”

“아직 근처에 있을지 모르니 제가 뛰어가 볼까요?”

월강이 얼른 물었다.


“그래. 그래라. 못 찾으면 그냥 오고.”

월강이 대문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있자니 나도 슬금슬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난균이 조금만 빨리 왔으면 좋았을걸.

* * *

수업이 없는 다른 날.

오늘도 침상에서 굴러다니면서 소중한 내 몸에게 안식을 주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어왔다.

린화 이야기를 꺼내면 당장 달아나기 위해 겉옷부터 집자, 어머니는 문 앞에 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네 숙부 셋을 부르셨어.”

“숙부들이요? 오셨어요?”

“며칠 뒤면 도착할 거야.”

“소가주 문제 때문에요?”

어머니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겉옷을 아직 붙든 채로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일을 의논하러 오셨어요?”

아직 어머니가 린화 일로 온 게 아니라고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어머니는 대답하는 대신 문 너머로 외쳤다.


“월섬이 들어오거라!”

어머니가 내 시비를 왜 부르시지? 나는 영 미심쩍어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예, 마님. 부르셨어요?”

월섬도 안으로 들어오긴 했으나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나와 월섬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요화도 이제 조금씩 남장 푸는 연습을 해야지. 소가주 일이 어떻게 되었든, 이미 여인인 게 알려졌고. 혼인하고 나면 여인의 모습으로 지내야 하니까.”

“근데 월섬이는 왜 부르셨어요?”

“남장만 풀어서 다가 아니야. 혼인하면 집안을 네가 꾸려가야 한다, 요화야.”

“!”

월섬이 눈동자를 굴렸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왜 자기가 여기 서 있어야 하나 더욱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넌 어릴 때부터 사내들이 익히는 학문을 배웠지. 학당 동기 중에 과거에도 제일 먼저 붙었어. 하지만 넌 다른 여인들이 가문을 이끌기 위해 배우는 걸 하나도 배우지 못했잖니.”

어머니는 내가 넋이 나간 틈에 내 손에 들린 겉옷을 낚아채 뺏었다.


“과거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집안 이끄는 법은 전혀 달라. 요화야, 다른 큰 가문의 여식들은 어릴 때부터 가문 이끄는 법을 다 배운단다. 린화도 그랬고. 하지만 넌 몇 해 안에 그것들을 빠르게 익혀야 해.”

린화가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뭘 많이 배운 건 나도 알았다. 린화는 자신이 배우는 것보다 내가 배우는 데 더 관심을 보였지만 말이다.

아니,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그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그냥…… 적당히 하면 안 되나요?”

“집안을 말아먹으려고!”

“…….”

“귀찮아도 앞으로는 수업이 없는 날에는 집안 꾸리는 연습을 하자.”

단호하게 말한 어머니가 옆에 움츠리고 선 월섬을 휙 돌아보며 지시했다.


“월섬, 너도 요화랑 같이 공부해야 한다. 요화가 집안을 이끌게 되면 네가 수길댁 같은 역할을 해야 해. 네가 집안의 일꾼들을 통솔해야 한단 말이야. 알았니?”

월섬의 얼굴이 덩달아 해쓱해졌다. 수길댁은 권력이 컸으나 그만큼 책임도 막중했다.


“자, 오늘부터 시작하자.”

어머니가 내 등을 두드리더니 문밖으로 “수길댁!” 하고 외쳤다.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지 수길댁이 연한 노란색의 예쁜 의복을 안고 바로 나타났다.


“급한 대로 린화가 입던 옷을 길게 수선한 거란다.”

후궁과 규수들의 차림새는 전혀 다르기에 린화는 새로 맞춘 의복만 들고 가고 사가에서 입던 옷을 모두 두고 갔다.

난 어머니가 그 옷들을 다 보관하길래 그냥 린화가 보고 싶어서 그러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수선해두고 있었다니!


“설마 그걸 입으란 건 아니시죠?”

나는 월섬의 뒤로 몸을 감추었다.


“입거라.”

그러나 어머니는 단호했다.


“아 어머니!”

“숙부들을 대접하려면 뭐가 필요한지 스스로 생각해보고 장을 보고 오거라. 월섬이랑 같이. 물건을 직접 들고 올 필요는 없다. 언제까지 우리 가문으로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말한 다음 거래서만 받아오면 돼.”

 

* * *

13황자와 혼인을 하더라도 적당한 시기에 도주할 계획이었기에 나는 이런 부분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회귀 전에는 아예 상상해보지도 못한 일이고.

하지만 어머니가 빠르게 밀어붙이는 통에 거부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 팔랑팔랑한 노란 옷을 입고 사대부가의 규수처럼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세요?”

월섬은 내 뒤를 쫓아오면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힘없이 대답하자 월섬이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날 위로하듯 말하지만 월섬도 나름대로 심란해 보였다.


“저도 걱정이에요. 소가주님은 영민하시니, 배우면 바로바로 익히시겠지만 전 머리 쓰는 덴 정말로 자신이 없거든요. 소가주님만 잘 모시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게 뭔 일인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

월섬과 나는 의논 끝에 가장 가까운 시장으로 걸어갔다.


“뭘 사야 하지? 쌀은 집에 있지?”

“과일을 사야 할까요?”

“숙부들이 과일을 좋아하던가?”

“뭘 좋아하세요?”

“관심을 둔 적이 없어.”

“…….”

“과일 사자. 셋 중 한 분은 좋아하겠지.”

그런데 과일 파는 곳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자니, 멀찍이 제자가 보였다.


“!”

나는 놀라서 월섬의 뒤에 숨었다. 하지만 고개만 내밀어 제대로 보니 제자는 보이지 않았다.


“애기씨? 왜 그러셔요?”

“아니…… 뭘 잘못 봤나 봐.”

나는 얼른 월섬의 팔을 잡았다. 잘못 본 걸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 부근에서는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애기씨?”

“저리로 가자 저리로.”

그러고서 돌아서는 순간.


“스승님.”

코앞에 제자가 나타났다.


‘언제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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