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자기 마음을 분석하면 오류가 발생
(79/159)
79화. 자기 마음을 분석하면 오류가 발생
(79/159)
79화. 자기 마음을 분석하면 오류가 발생
2022.12.01.
“대단해. 아주 대단해.”
황제가 대신 몇 명에게 그들이 투표한 용지를 퍽 밀쳐냈다.
“경들이 만장일치로 한 사람을 뽑았어.”
종이가 팔락거리면서 대신들의 앞으로 흩어져 떨어졌다.
“모두가 요요화를 뽑다니. 경들은 요요화를 이국사로 삼지 말자면서 다들 요요화를 이국사로 하자고 고르는군. 짐을 기만이라도 하는 건가?”
대신들은 민망해서 입을 다물었다. 이들 대다수는 자신들이 뽑은 답안지가 요요화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요요화의 답안지라고 생각한 이들도 그 답안지를 두고 차마 다른 답안지를 고를 수가 없었다. 차이가 너무 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뽑은 답안지의 주인은 서책에 있는 모든 내용을 살짝 압축해서 다 적어놓았다. 그 내용을 전부 외고 있단 것이었다.
거기에 한두 마디씩 부연으로 붙은 문구들 역시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빼어난 관점이 깃들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하나는 100점이고 나머지들은 50점이라면, 어떻게 다른 걸 고를 수 있을까. 그들이 50점짜리를 고른다면 그들의 안목이 형편없단 취급을 받을 터였다.
“폐하. 요 이국사는 계속 13황자 전하를 가르쳐왔습니다. 늘 보던 서책만 보고 또 보다 보니 시험을 잘 치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맞습니다. 계속 수업을 해왔으니 유독 그 서책들만 잘 아는 거지요. 그걸 두고서 요요화가 다른 후보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면 안 됩니다.”
“다른 서책들로 다시 시험을 보게 해야 합니다. 좀 더 공정한 서책으로요.”
몇몇 대신들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애써 요요화를 깎아내리려 시도했다.
황제는 옥좌에 몸을 깊숙하게 기대며 코웃음 쳤다.
“어차피 수업은 다 그 서적들로 하지. 그러면 그 서적들에 대해 잘 알면 되는 거 아닌가. 유독 그 서적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그 서적에 관해 가르치는 데 문제가 있나? 국사라면 두루두루 능통해야겠지. 하지만 지금 뽑는 건 국사가 아니라 이국사다.”
송 태감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요화를 황제에게 데려간 적이 여러 번 있는 황제의 측근 태감은 황제에게 벼루를 맞고서도 침착하게 대응하던 요요화가 꽤 대단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남녀가 유별하지 않습니까, 폐하. 계례를 치른 미혼 사내와 여인들은 그리 딱 붙어 지내면 안 됩니다.”
다른 대신 하나가 머리를 숙이며 관점을 돌렸다.
“맞습니다!”
그 옆의 대신이 덩달아 동의했다.
“그 둘은 이미 사주단자까지 교환한 사이다. 혼수품과 예물을 정하고 있어. 3황자 문제만 없었더라면 진즉에 혼인했을 사이인데 무엇이 문제란 말이냐.”
대신들은 더 입을 열려고 했으나 황제의 손길이 조금씩 조금씩 벼루 근처로 이동하자 입을 다물었다.
* * *
대신들이 물러나자 송 태감은 소리 죽여 웃었다. 시립하고 있던 다른 태감들이 다가와 바닥에 떨어진 종이들을 차곡차곡 주워 황제의 책상 위에 다시 올려두었다.
“잘 되었습니다, 폐하. 이제 요 이국사가 혼인하기 전까지 무사히 관직에 머물 수 있겠네요.”
송 태감은 조금 삐뚤빼뚤하게 쌓인 종이들을 착착 두드려 맞추며 흐뭇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도 요 이국사를 자주 보실 수 있구요.”
그러다 송 태감은 황제의 표정이 의외로 그리 좋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송 태감은 ‘요 이국사를 자주 볼 수 있으니 좋으시겠다’라는 말은 괜히 덧붙였다고 후회했다.
“역시 폐하께오선 참으로 영명하십니다.”
송 태감은 눈치 빠르게 다른 말은 다 걷어치우고 얼른 아부만 했다.
“그렇지. 영명하지.”
황제가 중얼거렸다.
“그럼요.”
송 태감은 얼른 동의했다.
“13황자가 의외로 영명해.”
그러나 황제가 영명하다고 하는 건 본인이 아니라 열셋째 황자였다.
“예?”
송 태감은 어리둥절해서 황제를 쳐다보았다. 난데없이 왜 13황자 칭찬을 하시나?
“왜 그러시옵니까, 폐하?”
정리를 끝낸 궁녀와 태감들이 뒤로 물러나 벽 부근에 나란히 섰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책상을 콕콕 손톱으로 두드렸다.
“이상하게 13황자한테 놀아난 기분이 든단 말이지.”
“하하 그럴 리가요.”
“…….”
“13황자 전하가 폐하께 시험을 추천해 드려서 그러십니까?”
* * *
운귀는 황제가 이국사를 다시 뽑겠다며 치른 시험에 요요화가 만장일치로 뽑혔다는 소식을 듣자 눈치껏 월무궁을 찾아갔다. 운귀는 13황자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결과를 보고 받은 13황자는 어째 표정이 좀 미묘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기쁘지 않으십니까?”
운귀는 의아해서 물었다.
“내 스승은 ‘원래는’ 이 정도까지 빼어나지 않았지.”
13황자가 다리를 꼬고 앉으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예?”
운귀는 13황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긴 했다. 13황자는 때로 그가 불러들인 부하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으니까.
13황자는 그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그들이 계획 중인 사안에 관해서만 몇 가지 더 질문했다.
6황자의 처소로 돌아가는 길. 운귀는 13황자가 자기 스승을 신뢰하고 있다는 첫 평가를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전에 요요화가 7황자에게 불려갔을 때도 황자의 반응은 이상했다. 시간을 끌다가 느긋하게 일어나는 걸 보고서 ‘따로 생각이 있으셨구나’ 하고 넘어갔지만.
그런데 이번에도 영 반응이 요상한 걸 보자 의아한 마음이 깊어졌다.
황제가 13황자를 불러서 ‘요요화는 이국사에 머물고 싶어 하는데, 대신들은 반대한다.
하지만 격일사와 황후가 요요화를 두둔하고 나오니, 네가 원한다면 조금 밀어붙여서라도 요요화를 이국사에 둘 수 있다. 넌 어쩌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13황자는 요요화를 스승으로 계속 두어 달라고 하는 대신 요요화와 다른 이들 몇 명을 모아서 공개적으로 시험을 쳐보라고 제안했다.
개중 가장 빼어난 사람을 반대하는 대신들이 직접 뽑게 한다면 누가 뽑히든 낯부끄러워 더 반대하진 못하리란 이유였다.
무작정 우기는 것보다는 그편이 황제도 자신의 체면을 지킬 수 있기에, 황제는 바로 13황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운귀는 13황자가 요요화의 실력을 믿고서 그런 제안을 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저 미묘한 표정과 애매한 반응을 보니 그런 짐작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어쩌면 요 이국사를 대하는 13황자의 감정은 좀 복잡한 게 아닐까?
* * *
다음날.
나는 월무궁에 가서 제자를 보자마자 나의 성과에 대해 자랑했다.
“소식 들으셨어요?”
“소식이라니요?”
“전하가 안 도와주셨는데도 제가 밥그릇을 지켜낸 소식이요!”
나는 턱을 치켜들고서 제자를 바라보았다.
제자는 느긋하게 보던 서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럼요. 들었지요, 스승님. 제자는 기뻤답니다.”
흥! 기쁘기는 무슨! 어디서 빈말이야? 내가 도와달라고 할 때 힘내란 소리조차 안 해주었으면서!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내 자리에 장군처럼 앉았다. 그러다가 너무 과했나 싶어 확인하니 제자는 또 서책을 들고 있었다.
“…….”
너무하네 너무해. 진짜로 내가 이국사이건 아니건 아예 관심이 없나 보다. 괜히 서운한 마음이 솟아나서 나는 책을 퍽퍽 소리 내며 펼쳤다.
하지만 제자가 화를 내면 안 되니까 너무 큰소리는 내지 않았다.
다른 이국사들은 다 자기 제자들과 잘 지낸다는데. 내 제자는 저렇게 혼자 무뚝뚝 해가지고서는 자기 좋을 때만 미소를 뿌려대면서 고운 용모를 무기처럼 사용하고!
“스승님의 은혜, 스승님의 은혜!”
“오늘도 하루 종일 군사부일체를 배워야 합니까?”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다 들었는지 제자가 서책을 내려놓으면서 빈정거린다. 나는 대답 대신 210쪽을 펼쳤다.
“오늘은 210쪽 할 차례입니다.”
“군사부일체는 다 끝났나요?”
“예에.”
제자가 순순히 학습할 서책을 꺼내는 걸 보는데, 문득 스스로가 바보처럼 여겨졌다. 제자가 저렇게 나온다고 해서 내가 서운할 게 뭐가 있어?
제자는 날 싫어하니 돕지 않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제자가 내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건 좋은 징조였다. 미움도 증오도 모두 감정이었다.
그가 내게 감정이 줄어든다는 건 내가 도주하면 방관할 가능성이 높아진단 뜻이기도 했다.
‘맞아. 그러니 섭섭할 필요 없어. 암!’
* * *
황후는 15황녀가 마구 떠들어대는 소리들을 건성으로 흘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뜻밖의 방문을 받았다.
“보문 공주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상궁이 속삭였다.
“어쩔까요?”
황후는 15황녀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안에서 소리가 나는 공을 흔들고는 그 소리를 듣고서 까르르 웃고 있었다.
열세 살인 15황녀는 황자와 황녀 중에서 가장 어렸고, 9황녀만큼도 눈치가 좋지 못했다.
“위려.”
황후는 조용히 막내를 불렀다.
“어마마마! 여기서 재밌는 소리가 나요!”
위려가 얼른 황후에게 다가와 무릎에 머리를 기대며 떠들었다.
“위려.”
황후가 재차 부르자 15황녀는 그제야 입을 다물고서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왜요?”
15황녀가 사가의 어린아이들처럼 황후의 무릎을 베고 눕더니 몸을 이리저리 뒹굴었다.
“얼른 일어나라. 보문 공주가 왔다 하니 방에 돌아가.”
이를 본 황후가 낮게 지시하자 15황녀가 배시시 웃고 물었다.
“여기 있으면 안 돼요? 그 사람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지요? 나도 그 사람을 구경하고 싶어요.”
황후가 눈짓하자 상궁이 얼른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자, 얼른 돌아가시지요 전하. 가서 궁녀들에게 놀아달라고 하세요.”
아이가 떠난 뒤에야 보문 공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에게 인사를 건넨 보문 공주는 아까 15황녀가 뒹굴던 의자에 앉자마자 하소연했다.
“황후마마, 절 좀 도와주세요.”
몇 번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황후와 보문 공주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보문 공주는 이 나라로 오면서 황제가 아리따운 새 후궁을 맞이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황제는 다른 후궁 두 명까지 맞아들였다. 난데없이 밑으로 후궁이 셋이나 생긴 황후가 보문 공주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오자마자 도와달라니 무슨 소리인가?”
이런 속내를 감추며 황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보문 공주의 양쪽 눈썹이 축 아래로 내려갔다.
“처음 인사드릴 때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는 13황자와 혼인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눈 뜨고 전하를 뺏기게 되다니, 좀 당혹스럽습니다.”
“이런.”
요요화가 있건 없건 보문 공주와 13황자를 맺어줄 마음이 없는 황후는 건성으로 탄식했다.
보문 공주가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을 글썽이며 황후를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황후마마. 절 좀 도와주세요. 전하와 혼담이 오간다는 여인은 평생 남장하고 살아온 여인이라 들었습니다. 그런 여인은 다른 여인들이 집안을 이끌기 위해 어릴 때부터 배우는 지식을 하나도 못 배웠겠지요. 13황자가 왜 그런 여인과 혼인해야 하나요?”
“하지만 이미 거의 정해진 혼사를 내가 어찌하겠나.”
“13황자 전하가 가엾습니다, 황후마마. 13황자 전하는 외가도 없어서 외롭게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혼인까지 남장 여인과 하다니요. 혼담을 엎을 방법이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