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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만장일치 (78/159)


78화. 만장일치
2022.11.28.



 
수업하러 가던 도중 갑자기 불려와 황제 앞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다니. 아니,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나.


“자자, 떨어져 서시지요.”

송 태감이 좀 신이 난 목소리로 나와 관리들 사이를 오가며 거리를 벌렸다.


“서책 열 권을 앞에 늘어놓아라.”

황제가 지시했다.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지시에 따랐다.

나와 관리들이 서책을 눈앞에 다섯 권씩 앞에 늘어놓자 이관사가 말했다.


“지금부터 이 책들이 왜 황자님들의 교육 서적으로 채택되었는지, 무엇이 장점이고 무엇이 단점인지, 이 서적들이 주는 교훈과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적어라. 열 권에 대해 모두 적어야 하고, 책을 펼쳐보아서는 안 된다. 제목만 본다 제목만.”

과거에 붙으면 시험은 끝난 거 아닌가요? 나의 내면이 불만을 토해낸다.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까 서책을 나누어준 태감들이 다시 들어와서 시험에 사용할 종이와 붓, 벼루, 먹, 물, 서진 등을 두고 갔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나무 쟁반도.


“작성한 종이는 뒤집어서 쟁반 위에 놓고, 그 위에 종이를 한 겹 더 깔아라.”

시키는 대로 행하자 송 태감이 어디선가 사람 머리통만 한 종을 들고 나타났다. 진짜로 과거 시험 분위기였다.

힐긋 옆을 보니 불려온 관리들 대다수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딱 한 명을 제외하고.


‘저 사람은 태연하네?’

“시작한다!”

이관사가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가 나서 나는 붓을 집고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과거에 급제해서 가장 기쁜 건 또 과거를 안 보아도 된단 거였는데. 황제를 머리맡에 두고 시험을 또 치르게 되는구나.

인생은 시험의 연속인가!

* * *

서책 한 권당 네 문제씩 총 열 권에 관해 써야 하니 사실상 문제는 마흔 개였다. 이걸 다 서술로 쓰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졌다.

깔끔한 목재 향이 풍기던 서재 안에는 어느새 먹물 냄새가 가득해졌다. 무릎을 꿇고서 글씨를 쓰다 보니 종아리가 눌려 아팠고, 허리 역시도 욱신거렸다.

다리에 쥐가 나서 몇 번이나 자세를 바꾸었더니 이관사가 호통쳤다.


“요 이국사, 자꾸 꼼지락거리지 말게!”

나와 관리들이 난데없는 시험에 허우적거리는 동안 이관사와 황제는 같이 차를 마셨다. 궁녀들이 차를 석 잔째 가져올 즈음, 마침내 관리 하나가 종이를 챙겨 일어섰다.


“다 되었습니다.”

“두고 가게.”

이관사가 대답하자 관리가 앞으로 걸어가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곧 문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 사람을 시작으로 한 명 한 명 어전을 빠져나갔다. 나중에는 남은 사람이 나 하나라는 걸 대충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 멀었나?”

이관사가 지루함을 애써 감추려는 목소리로 물었다.


“예.”

 

 
궁녀가 다시 차를 가져왔고, 또 차를 물렸고, 다시 차를 가져왔다.


“아직 멀었나?”

이관사가 지루함을 감추지 않고서 물었다.


“예.”

“아니, 뭘 그렇게 많이 적나?”

“이관사. 조용히 하라.”

이관사는 내게 항의하다가 황제의 지시를 듣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꿋꿋하게 붓을 움직였다.

그리고 만족할 만큼 종이를 다 채운 다음 붓을 내려두고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황제와 시선이 마주쳤다.


“!”

옆에서 억지로 잠을 참아내는 이관사와 달리 황제는 신기한 걸 구경하듯 맑은 눈으로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다 되었습니다, 폐하.”

그 눈빛을 보자 다시금 불안한 마음이 치밀어서 나는 얼른 눈을 내리깔고서 말했다.


“고생했다.”

이관사는 허리를 쭉 펴다가 황제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나를 힐긋 곁눈질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말하고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소신은 전하의 수업이 있어서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 * *

하도 한 자세로 오래 방 안에 머물렀더니 문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조차 반가웠다. 궁녀가 안으로 차를 나르다가 나를 보고서 가볍게 고개 숙였다.

덩달아 고개를 숙이고서 나는 계단을 내려가 월무궁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시험은 잘 치르셨습니까.”

제자는 이미 소식을 들었는지 내가 방 안에 들어서자 내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서 물었다. 내가 방 중간 즈음까지 와서야 그가 들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았다.

날 놀리려는 건가? 그가 든 서책은 방금 전까지 내가 열심히 장단점을 적고 온 그 서책이었다.


“전하께선 이 상황이 재밌으신가 봅니다.”

“스승님의 뛰어난 학문 성취에 대해 알 수 있게 되겠군요.”

“저한테 말 걸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런. 다리에 쥐가 안 풀려서 그런가. 책상으로 걸어가다가 나도 모르게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말실수라고 하자니 더 이상해서, 나는 의자에 앉으면서 뻔뻔하게 덧붙였다.


“전 전하와 좋은 사제 관계라 생각했는데요. 전하는 제가 도움을 청할 때 도와주지 않으셨지요. 신은 이제 전하와 칼 같은 사제 관계입니다. 앞으론 수업 이야기만 할 겁니다.”

나는 책상 위에 서책과 붓, 문진을 빠르게 늘어놓았다. 그러고서 슬쩍 눈을 들어 보니 제자는 꼭 황제 같은 표정을 하고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젠장. 아무리 부자지간이라지만 너무 닮은 거 아니야? 부담스러워서 나는 바로 시선을 내렸다.


“수업하겠습니다…….”

그러고서 기죽은 목소리로 입을 여는데,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제자가 책상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그가 이전처럼 책상에 손을 올리고서 나를 내려다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들어야 했다. 눈이 마주치자 제자가 나를 탐색하듯 바라보며 물었다.


“화나셨는지요?”

“아니요. 조금 서운했을 뿐입니다.”

“어째서요?”

“……저는 전하도 제 수업을 좋아하실 줄 알았거든요.”

작게 중얼거리고서 보니 내가 서운해하는 게 좀 웃기게 여겨졌다. 그래, 우리가 뭐 서운하고 그럴 사이는 아니지.

어쩌면 제자는 기가 막힌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를 증오하고 있지 않던가.

생각해보니 내가 웃겼다. 왜 제자가 날 도와줄 거라 여겼대?


“스승님의 수업은 좋아합니다.”

괜히 민망해서 종이 끄트머리를 만지작대고 있자니 제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다시 고개를 들자 그가 좀 더 허리를 숙였다.


“스승님의 목소리도 좋아합니다.”

비밀 이야기를 해주는 투였다. 하지만 이건 수업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안 도와주셨어요?”

나는 목소리를 낮춰서 소곤소곤 그에게 물었다. 그가 날 도와줄 이유가 없다고 조금 전에 생각했으면서 멍청이 같이!


“스승님은 저와 혼인하실 테니까요.”

제자가 또 속삭이는 것처럼 말했다. 그가 자꾸 저러니 나도 목소리를 덩달아 낮출 수밖에 없었다.


“몇 해는 더 지나야 하잖아요.”

작게 항의하자 제자는 혼자 잘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를 보자 깨달음이 왔다. 아, 얘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날 안 도와준 거구나.

정당한 이유가 있었더라면 이미 말하고도 남았을 인간이 계속 자기 얼굴로만 상황을 넘기려 하고 있었다. 제자는 그냥 내가 도움을 청하니 도와주기 싫었던 거였다.

그는 나를 최후의 순간까지 살려두고 싶어 하지만, 이국사를 못 하게 된다고 해서 내가 목숨이 위험해지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말씀하세요. 전하. 그냥 안 도와주신 거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네.”

“…….”

허탈해서 쳐다보고 있으려니 제자가 내 책상에 걸터앉았다.


“내려가세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자가 날 안 도운 거야 회귀 전 주고받은 독배 때문이라 이해한다고 쳐도, 멋대로 내 책상을 의자로 사용하는 건 허용할 수 없다.


“동생 일은 해결이 되었는지요?”

“전하가 무슨 상관이신데요? 전하는 저랑 별 상관없는 분이잖아요.”

“상관이 없다니요. 몇 해 뒤면 부부가 될 사이인데요?”

“몇 해 뒤면 부부가 된단 분이 제가 관직을 뺏기게 생겼는데 그냥 지켜보십니까?”

“스승님은 속이 좁으시군요.”

누가 할 소리를!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콧구멍이 두 개라서 숨이 쉬어지는구나!

제자는 책상에서 가볍게 내려가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가 서책을 펼쳤다.


“몇 쪽 펼까요, 스승님?”

“190쪽…… 군사부일체요.”

“!”

 

* * *

수업이 거의 끝나갈 즈음. 제자의 표정에는 생기가 사라졌다. 내가 190쪽의 군사부일체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들려주고, 해석하고, 사례를 말해주어서 그렇다.

나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서 소심한 복수를 계속해 나갔다. 제자에게 잘 보여야 한단 건 안다. 하지만 아직 제자가 날 싫어하고 있으니 이 정도 복수는 돌려줘도 되겠지.

그런데 수업이 거의 끝나갈 즈음.


“전하! 전하!”

궁녀 기양의 밝은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들어오라.”

제자가 허락하자 기양이 안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양은 멋쩍게 웃고서 제자에게 말했다.


“전하, 대신들이 답안지를 골라서 폐하께 올렸다고 합니다! 송 공공이 밖에서 요 대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업하는 몇 시진 사이에 내가 관리 몇 명과 함께 이국사 시험을 치렀다는 걸 궁인들도 거의 아나 보다.


“전하. 오늘 수업도 끝났으니 하면 신은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 * *



“누가 뽑혔는가?”

송 태감을 따라 걸어가면서 나는 슬쩍 물어보았다.

송 태감은 종종걸음으로 비스듬히 앞서 걷다가 내 질문에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누가 뽑히셨을 것 같습니까?”

“나.”

솔직하게 대답하자 송 태감이 공이 터지는 소리를 냈다.


“실례했습니다.”

송 태감은 입가에 손을 올리며 사과하고는 낄낄 웃으며 물었다.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야 나는 답을 정말 잘 적었으니까?”

이번에도 솔직하게 대답했을 뿐인데 송 태감은 마구 웃어댔다.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내가 뽑히지 않았다면 비리가 있는 거네.”

“그 정도입니까?”

“내가 안 뽑혔나?”

그럴 리가 없는데, 싶어서 묻자 송 태감이 털어놓았다.


“실은 소인도 모릅니다. 폐하께서는 관리들을 모두 불러오라고만 하셨지요.”

황제의 서재 안으로 들어가자 송 태감의 말처럼 다른 관리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황제와 이관사까지 모두 한 자리에 오전처럼 모여 있어서, 당연히 내가 뽑혔으리란 생각을 하고 왔는데도 심장이 덜컹거렸다.


‘진짜로 비리가 있어서 내가 안 뽑혔으면 어쩌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관리들 옆으로 나란히 섰다.


“모두 모였군.”

내가 다리를 멈추자마자 이관사가 입을 열었다.


“요 이국사가 가장 마지막으로 왔으니까.”

그야 내가 가장 멀리서 왔을 테니까!

이관사는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하고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무심한 척 붓을 움직이다가, 벼루에 붓을 두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제출한 답안지는 이국사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 대신들에게 주었고, 이중 가장 황자의 스승이 되기 적합한 자를 직접 뽑게 하였다. 이관사는 경들이 시험을 치는 모습을 보았기에 제외했고.”

그의 책상 한쪽 옆에는 우리의 시험지가 쟁반에 쌓여 있었다. 개중 내가 낸 시험지는 혼자 수북하게 올라와 있어서 눈에 띄었다.


“생각보다 결과가 손쉽게 나왔지. 만장일치로 한 명을 뽑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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