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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혼담을 깨고 싶으세요? (75/159)


75화. 혼담을 깨고 싶으세요?
2022.11.17.



 
황후는 궁녀들에게 간식을 들려 황제의 서재를 찾아갔다.


“폐하. 내내 일하느라 바쁘시지요. 좀 한숨 돌리고 간식도 잘 드셔야지요.”

황후가 눈짓하자 궁녀들이 황제의 책상 변두리에 가져온 간식을 내려놓았다.


“고맙소. 짐을 챙겨 주는 건 황후뿐이로군.”

황제가 하얀 도자기 뚜껑을 열자 계란으로 만든 요리가 드러났다.


“신첩은 폐하의 아내니까요.”

황후가 숟가락을 건네자 황제가 한 숟가락을 떠서 후후 불어먹었다.


“맛있군.”

송 태감이 의자를 가져다 황후 뒤에 놓아주었다.

황후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황제가 계란 요리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식사가 끝날 때쯤 황후는 다정한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폐하. 미려 때문에 속이 상하셨지요?”

송 태감이 황제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최근에 9황녀가 사고 친 일이 있던가.”

황제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면서 남은 음식을 물리라 손짓했다.

궁녀들이 음식을 가져가자 송 태감이 차를 내왔다.

황후는 송 태감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고 눈짓했다.


“요 귀인이 미려에게 한 말 때문에 요 이국사가 곤경에 처했다고 들었습니다.”

송 태감이 자리를 비키자 황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어디 9황녀 탓이겠소.”

“요 귀인은 입궁한 지 얼마 안 되었지요. 9황녀는 날 때부터 궐에서 살았으니 요 귀인에게 해선 안 될 행동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어야 했습니다. 요 귀인이 실수하더라도 자기가 막아주어야지요.”

황제가 손수건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즉, 황후는 이 일이 요 귀인이 입단속을 못 해서 일어난 일이라 여기는 거로군.”

“요 귀인과 9황녀가 둘 다 실수한 거지요. 괜히 요 이국사만 고생하였네요.”

황후는 한숨을 내쉬는 척하며 황제를 살폈다.

황제는 먹물이 옅다고 생각하는지 먹을 꺼내 종이를 벗기고 있었다. 표정만 보아서는 무슨 생각인지 알기 어려웠다.


“어쨌든 일은 터져버렸고 요 이국사가 여인인 걸 모두가 알아 버렸습니다. 폐하.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황후는 손을 뻗어서 황제가 꺼낸 먹을 가져가 벼루에 대고 문질렀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 하지만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간다면 요 귀인도 입을 조심해야 한다는 걸 모르겠지.”

“요 귀인을 벌하실 건가요?”

“요 귀인과 우혜전의 궁인들, 화중전의 궁인들 녹봉을 감할 생각이오.”

황후는 열심히 먹을 갈다 말고서 멈칫했다. 화중전은 9황녀가 머무는 전각 이름이었다.


“9황녀의 궁인들까지 녹봉을 감하신다고요?”

황후가 당황해 묻자 황제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요 귀인은 소문의 시작점이니 벌을 받아야 하오. 그럼 거기서 시작된 소문은 어디서 퍼져 나갔겠소? 우혜전과 화중전의 궁인들 사이에서일 거요. 당연히 그들도 벌을 받아야지.”

황후는 먹을 놓고 의자에 앉아 치맛자락을 다듬었다. 황제가 9황녀의 궁인들까지 처벌하는 건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요 귀인이 이번 사태의 원흉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부러 9황녀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녀는 9황녀와 그녀의 궁인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고 믿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건 소문을 시작한 사람이 잘못 아닌가.


“참으로 공정하십니다.”

하지만 황후는 이에 대해 항의하는 대신 웃으면서 넘어갔다. 어차피 진짜 목적은 이게 아니었다.


“한데 폐하. 요 이국사와 13황자의 혼인은 어찌하실는지요?”

황후가 13황자와 요요화를 짝지어 주려고 한 건 그들이 관습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혼인을 하게 만들어 13황자의 체면을 한 번 깎고, 이후 요요화가 여인인 걸 뒤늦게 밝혀서 그 부부에 대한 대신들의 인망을 없애버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사주 운운하면서 혼인 전에 요요화가 여인임을 밝혀버렸다. 황후가 13황자를 쳐내려 세운 계획은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13황자와 요요화의 혼인을 막지 못한다면 그녀는 외가조차 없는 구박덩어리 황자에게 요씨 가문이란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될 터였다.

요요화가 소가주 자리에서 쫓겨난다고 한들 지금 요씨 가주가 가주 자리에서 바로 쫓겨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요씨 가주는 가산을 물려받지 못할 딸을 위해 자신이 가주 자리에 머물고 있을 때 최대한 딸과 사위에게 많은 걸 건네주려 할 것이다.


“글쎄. 어떻게 할까.”

황제는 붓에 먹물을 고르게 묻히며 물었다.


“황후는 어찌하고 싶소?”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두 사람을 혼인시킨다면 요 가주에게 너무 못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황후는 조심스럽게 말해보았다.

일전에 둘을 혼인시킬 때 요요화가 13황자를 사모한다고 주장한 그녀로서는 당시와 앞뒤가 달라진 말이었다.

그러나 황후는 황제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크게 잡았다.


“열셋째는 본인만 보면 빼어난 황자지만 외가가 없으니까요. 요요화는 요씨 가문을 물려받기 힘들 테니 더 의지할 수 있는 사내에게 시집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황후는 여전히 새까맣고 부드러운 황제의 머리카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황제가 요요화에게 주었다는 목련 머리 장신구를 떠올렸다. 돌연 요린화와 13황자를 혼인시키고 요요화를 곁에 두려던 모습도.


“그렇지.”

황제는 관심 없는 듯 말하고서 붓을 내려놓았다.

황후는 황제가 종이에 목련 그림을 그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13황자가 이미 사람들 앞에서 자신과 요요화의 사주가 잘 맞다고 말해 버렸는데. 갑자기 둘의 혼담을 깨도 괜찮을지 모르겠군.”

그러나 황제는 생각보다 빨리 넘어오지 않았다. 최근에 후궁을 세 명 들였기 때문일까? 황후는 좀 더 강수를 두어 보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요 이국사가 후궁으로 들어오는 게 좋을 뻔했어요.”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슨 그런 농담을.”

황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신첩이 요씨 가문에 사람을 보내어 혼담을 어찌하고 싶은지 물어보도록 하지요. 요 가주도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요요화에게 좋은 혼처를 찾아주고 싶을 테니까요. 사주야 더 잘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하면 그만이지요.”

 

* * *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어서 나는 아침을 먹자마자 선안을 찾아갔다.

집에 있어 보아야 부모님이 린화 이야기만 할 테니 괴로운 데다가, 선안에게도 9황녀 이야기를 해주어야 했다.


“이미 황녀 전하께서 내게 서신을 보내셨네.”

선안을 나를 보자마자 울상을 짓고서 말했다.


 


“자네가 여인인 걸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자기를 속일 수 있냐고, 자기는 자네를 두둔하러 7황자를 찾아갔다가 아주 바보가 되었다면서 말이야. 어쩌지?”

선안은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가 책상을 흔들자 9황녀에게 줄 거라며 조각해 놓은 조그만 동물 장난감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나한테 신뢰가 깨진 거 같아.”

고개를 드는 선안은 눈가가 퀭했다.


“내가 황녀 전하와 대화해볼까?”

내가 조심스레 묻자 선안은 식겁해서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안 되네 절대!”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해. 뭐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한 말일 뿐이네.”

선안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자기 처지를 하소연하는 말을 마구 내뱉다가 물었다.


“자네는? 자네는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자네가 지금 날 걱정할 처지가 아닐 텐데?”

선안의 말이 옳았다.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니, 집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 태감이 하나 돌아가는 중이었다.

태감이 내게 꾸벅 인사하고 나간 뒤에야 나는 그가 황후의 태감임을 알아보았다.


‘황후 태감이 여기에 왜 다녀갔지? 내가 제자 다음으로 경계하는 사람이 황후인데?’

미심쩍어서 문을 쳐다보고 있자니 수길 어멈이 다가와 말했다.


“소가주님. 마님께서 소가주님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불러오라 하셨어요.”

아아…….

괴로운 마음으로 내당에 들어가자 수길 어멈은 얼른 달아났다.


“이리 앉거라.”

의자에 앉자마자 나는 어머니가 린화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얼른 아까 본 태감에 관해 물었다.


“황후 태감이 여기에 왜 다녀간 거예요?”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 했다.”

“예? 제 얘기하고 갔어요?”

“황후마마께서 13황자 전하와의 혼담을 없던 거로 하고 싶은지 물어보시는구나.”

“!”

황후는 아주 제멋대로구나. 혼담도 자기 멋대로 진행하더니 거두는 것도 멋대로야.


“어떻게 하고 싶니?”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뭐라고 대답하셨는데요?”

생각을 정리할 겸 어머니에게 되묻자,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나는 괜찮지만 너와도 이야기해보겠다고 말했단다. 아직 네 아버지도 퇴궐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나를 유심히 살피다가 물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니?”

“웬일로 제 의견을 다 구하세요?”

린화 일로 화나서 너무 시비 걸듯 대꾸했나 보다. 어머니의 눈썹이 뾰족하게 위로 솟구쳤다.

나는 얼른 대답했다.


“저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나는 진심으로 둘러댔다.


“생각을 좀 해보고 싶어요.”

내당에서 나와 내 방으로 돌아간 뒤. 날씨가 춥지만 창문을 반쯤 열었다. 몇 겹 종이를 붙여두어서 찬 바람을 막아주던 방 안에 순식간에 냉기가 차올랐다.


“아휴 소가주님! 감기 심해지세요! 낫자마자 또 앓고 싶으세요?”

시비인 월섬은 그걸 보고는 들어오자마자 잔소리를 했다.


“생각할 게 있어서. 나중에 닫으마. 너는 추우니 나가서 따뜻한 방에 가 있어.”

월섬은 청정차를 가져다주고 나갔다.

나는 방 안에 혼자 남아서 13황자와 혼담을 깰 경우 벌어질 일과 깨지 않을 경우 벌어질 일을 차근차근 예측해보았다.

* * *

다음 날 아침. 입궐할 채비를 하고 대문을 나서려는데 아버지가 달려왔다.


“같이 가자.”

웬일이지? 입궐 시간이 다른 편이라 평소에는 우리 둘이 같이 대문을 나서는 일이 없었다.


“저랑 같이 가면 궁인들이 죄다 쳐다볼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떨떠름해서 물었지만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뭐 어떠냐. 내가 내 새끼랑 같이 간다는데!”

“그러세요.”

달아나는 것보단 낫지 싶어서 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말 없이 궁전의 측문 부근까지 걸어갔다.

측문 안으로 들어서서도 아버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갈림길에서 나와 헤어지기 전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요화야. 실은 아비는 말이다. 네가 전하와 혼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왜요?”

그래도 이유는 궁금하네.


“이번에 네가 곤경에 처한 일로 학을 뗐단다. 우리 가문은 힘이 있으니, 궐 밖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나와 네 어미가 널 지킬 수 있어. 하지만 궐 안에서 그런 소동이 벌어지니 우리가 널 돕기는커녕 한참이 지나서야 소식을 듣지 않았니.”

“…….”

“린화도 후궁으로 입궁해 있는데, 너까지 황자비가 된다면…… 이 아비는 너까지 황실에 시집 보내고 싶지 않구나.”

아버지에게도 생각을 좀 해보겠다고 둘러댄 뒤 나는 월무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직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와 혼담을 진행하는 게 나을까 엎는 게 나을까?

감정적으로 결정을 내리자면 엎고 싶다. 하지만 회귀하고서 지내보니 세상일은 내가 계획한 대로 잘 굴러가지 않았다.

게다가 회귀 전과 달리 지금은 여인인 게 밝혀졌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으니 앞일에 대한 계획도 신중하게 다시 다듬어야 했다.

* * *

그래서 결정을 내리기 전. 나는 우선 제자에게 물어보았다.


“전하. 저와 혼인하지 않을 수 있다면 혼인하지 않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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