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용포와 하얀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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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용포와 하얀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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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용포와 하얀 우산
2022.11.07.
“요 이국사는 단명하는 사주다.”
머리를 감싼 7황자에게 황제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7황자가 머리에서 손을 내렸다.
“잘 맞는 남편과 혼인해야지만 명이 길어지지. 그래서 짐이 혼인 전까지 남장하고 지내게 허락해주었다. 그러면 임시 처방이 된다고 하길래.”
“예에?!”
7황자의 언성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14황녀가 눈을 벽돌 모양으로 떴다.
9황녀 역시 황제를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쳐다보았다.
황제의 변명은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사주는 웬 사주?
“아바마마. 진심이십니까?”
7황자가 다시 물었다.
황제의 무던한 표정을 보자, 나는 그가 왜 사주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아차렸다.
가문 가주 자리나 가산 문제로 남장한 거라고 둘러대면 법을 기만한 사기가 되어 버리고 일이 더 커지게 된다.
그러니 사주 문제라고 못을 박아 버리면서 가문 전체의 문제로 번지지 않고 나 개인의 일이라고 축소해버리는 것이다.
“맞습니다, 형님.”
문가에서 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와 함께 온 태감들과 3황자가 양옆으로 비켜주었다. 제자가 그사이를 비집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7황자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맞다니?”
“스승님의 사주 말입니다. 형님께선 이전에도 스승님의 성별과 제 혼사 문제를 두고 문제를 일으키려 하셨지요. 제가 그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와 스승님의 혼사는 아바마마께서 허하신 일이라고요. 왜 허하셨겠습니까.”
“설마……!”
“스승님의 사주와 제 사주가 잘 맞기 때문입니다. 스승님은 저와 혼인하면 장수하는 사주십니다.”
줄줄 거짓말을 잘도 지어낸 제자는 황제에게 공손히 읍하며 덧붙였다.
“부황께서는 감읍하시게도 충신의 여식을 살리기 위해 남장을 허하신 건 물론, 그로 인한 뒤처리까지 맡으려 자식 중 가장 스승님과 사주가 잘 맞는 저와 정혼하도록 해 주셨지요.”
황제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13황자와 황제가 둘이서 짜고 온 건 아닌가 보다.
14황녀가 다급히 나섰다.
“그럼 열셋째 오라버니는 이국사가 여인인 걸 알았어?”
“정혼 이야기가 나올 때 알려주셨다.”
13황자의 덤덤한 이야기에 내 심장은 철렁거렸다. 내가 여인인 걸 알았다고?!
물론 그가 그냥 거짓말로 둘러대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기엔, 이전에도 ‘쟤 혹시 내가 여인인 거 아나?’ 의심 가는 구석이 있었다!
“저희가 아버님과 이국사에게 감쪽같이 속았군요!”
9황녀가 토라진 목소리로 외치더니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허허.”
7황자는 나이 많은 사람인 양 헛웃음을 뱉으면서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14황녀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서 빠져나갔다.
“혼인한 후에야 남장을 그만두게 하려 했는데. 너 때문에 짐의 계획이 망가졌구나.”
황제의 냉랭한 말에 7황자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송구합니다, 아바마마. 소자는 이국사가 나라와 황실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해 너무 화가 났습니다.”
황제가 무어라 더 말하려는데, 3황자가 나서서 부드럽게 말했다.
“아바마마. 일곱째도 나름대로 좋은 뜻에서 나섰을 겁니다. 젊은 혈기에 일을 키운 거지요. 모두 다 아바마마를 위한 행동이니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지요.”
황제는 너그럽게 용서하기 싫은 듯했다.
하지만 3황자가 손수건을 꺼내서 피를 토해낼 기세로 기침하기 시작하자, 포악한 황제도 결국 두 손을 들어야 했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너한텐 무슨 소리를 못 하겠구나.”
“황송합니다.”
3황자가 그래도 기침을 계속하자 황제가 3황자의 뒤에 선 태감에게 지시했다.
“얼른 황자를 모시고 가라. 찬 바람을 쐬니 몸이 더 안 좋아졌나 보다.”
“가시지요, 전하.”
3황자가 태감의 부축을 받아 나가자 황제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 용포 돌려드려야 하나? 아니면 빨아서 돌려드린다고 해야 하나?
나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멍하게 황제를 같이 마주 보았다.
“황송합니다, 전하.”
그래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결국 용포 이야기는 생략하고서 일단 감사 인사를 다시 했다.
“네 탓이겠느냐.”
황제는 내 머리통에 벼루를 던지던 사람답지 않게 말하고는 혀를 찼다.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집에 돌아가서 좀 푹 쉬도록 하라. 차후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의논하지.”
그 ‘차후 문제’란 내가 계속 이국사에 있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겠지. 나는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용포 이야기는 하지 않고 가버렸다.
황제가 가버리자 남게 된 건 용포를 걸친 말단 이국사 하나와 이국사랑 사주가 잘 맞는 황자, 이국사를 잡으려다가 물 먹은 황자, 그리고 기타 궁인들뿐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나한테 미리 말해주었으면 이런 소동도 없지 않나!”
황제 앞에서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던 7황자가 버럭 소리질렀다.
“송구합니다, 전하.”
그래도 마지못해 사죄하자, 7황자는 혀를 차고서 축객령을 내렸다.
“가보게.”
용포가 아직 방패 역할을 톡톡히 하는 듯했다.
“그럼…….”
나는 꾸벅 인사를 올린 다음 7황자에게 아직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제자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
제자는 잡힌 자기 팔을 보더니 순순히 따라 나왔다.
* * *
제자를 잡고 밖으로 나가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다. 월무궁이 사람이 제일 없어서 월무궁 쪽으로 걸어갔다.
제자는 태감 한 명 데리고 오지 않았기에 길을 걸어가는 건 나와 제자 둘뿐이었다.
월무궁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반절 정도 왔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제자의 손을 놓고 항의했다.
“제가 여인인 걸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제자는 정혼 소식을 듣고 알았다고 했지만 그 말을 믿진 않는다.
“처음부터요.”
제자 역시 숨기지 않았다.
충격을 받아서 멍하게 쳐다보자, 제자는 흘러내리는 용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잘 어울리십니다, 스승님.”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서자 그는 돌아서며 말했다.
“날씨가 춥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정말로 감기에 크게 걸릴 겁니다. 들어가시지요.”
월무궁에 돌아와서 내가 자주 사용하는 곁방에 들어가 용포를 벗자 뒤늦게 한기가 밀려왔다. 나는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제자가 옷가지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제 옷입니다. 클 테지만 적당히 접어 입으시지요.”
제자는 이불 위에 옷을 내려놓았다.
나는 목만 내밀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몇 번째 회귀 때 내가 여인인 걸 알게 되었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절대로 그럴 수 없겠지.
어쨌든 제자가 내가 여인인 걸 알고 있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달라질 일은 없고…….
“처음 언제요?”
하지만 그냥 넘어가자니 괜히 신경질이 나서 나는 모른 척 물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요.”
“거짓말하십니다.”
“왜 거짓말이라 여기시는지요?”
“저는 날 때부터 사내로 커왔습니다. 이 나라에서 여인에게 요구되는 그런 관습이나 행동거지를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모릅니다. 그런데 전하가 무슨 수로 제가 여인인지 사내인지 아십니까?”
“스승님은 제 얼굴을 보고 얼굴을 붉히셨습니다.”
이 자식이 큰일 날 소리를! 내가 언제! 내가 언제!
“아닌데요!”
“그걸 보고 알았습니다.”
“아니라니까요!”
제자는 내 이마를 자기 손으로 짚어보더니 혀를 찼다.
“열이 나시는군요. 어의를 불러야겠습니다.”
나는 씩씩거렸으나 제자가 내 이마에서 손을 떼지 않자 씩씩거림이 저절로 잦아들었다.
이불을 붙잡은 채 나 죽었소 하고 가만히 있자 제자가 그제야 손을 떼었다. 그러더니 무릎을 굽혀 침상에 누운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시선을 맞추고 싶지 않아서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으나 이렇게 해도 제자의 목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 스승님과 제가 정혼하게 되겠군요.”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체면 때문에라도 정혼 시켜주실 겁니다. 그러니 부인. 장차 부인의 지아비가 될 사람으로서 한마디 할까요?”
지아비래! 부인이래! 나는 놀라서 이불 안으로 머리까지 파고 들어가 버렸다.
심장이 요란스럽게도 울렸다. 손바닥이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지아비라니! 부인이라니!
“이불 안에서 꿈틀거려 보아야 체통만 상할 뿐입니다, 스승님.”
말을 저따위로 하는 지아비가 어디 있다고! 이를 악물고서 나가지 않고 버티자 제자가 결국 그 상태로 말을 이었다.
“옷은 빨리 갈아입는 게 좋을 겁니다. 이불까지 축축해져서 감기에 걸리기 싫으시다면요.”
“!”
이불 밖으로 손만 뻗자 부드러운 옷가지가 손에 올려졌다. 옷가지만 이불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자 잠시 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슬쩍 머리를 이불 밖으로 내밀어 보니 제자는 나가고 없었다.
안도해서 나도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젠장. 살다 보니 용포도 입어보네.
* * *
침소로 돌아온 9황녀는 방 안을 원을 그리며 돌아다녔다.
“생각해보니 이상한 구석이 있긴 했다.”
이 사건의 발단 중 하나인 궁녀 화린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누르고 있다가 괜스레 퍼뜩 놀랐다.
“예?!”
“뭘 놀라느냐.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말이다.”
“그런가요?”
“요 이국사라면 빠지는 게 없는 사내인데, 나와 절대로 맺어주지 않으려 하셨잖아. 이미 여인인 걸 알고 있으니 그랬던 거였어.”
화린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수긍했다.
“아아. 듣고 보니 그러네요.”
“…….”
말을 마친 9황녀가 다시 제자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기분이 상하셨나 봅니다, 전하.”
“속았다는 기분이 든다. 요 이국사가 아니라…… 선안 공자한테!”
* * *
어의 초감이 와서 나를 진료한 후 한숨을 푹푹 내쉬며 처방전을 써주었다.
“자주 아프시군요.”
“내가 또 아픈가요?”
놀라 묻자 초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직 증세가 나타나지 않은 듯하지만 숨소리가 흐트러져 있습니다. 저녁 때쯤이면 기침이 나고 열이 더 오를 겁니다. 이삼 일은 푹 쉬십시오. 약도 잘 드셔야 합니다.”
초감이 나가자 제자는 이번에도 마차를 불러주었다.
“업히십시오.”
하지만 태감을 불러 업게 하는 대신 직접 자기 등을 내밀었다.
“어떻게 그럽니까.”
내가 수줍은 척 등짝을 퍽 때리자 날카롭게 쳐다보긴 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스승님과 제자가 이 일로 싸우지 않았다는 걸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아바마마와 제가 한 변명을 남들도 믿을 겁니다.”
“…….”
어쩔 수 없이 나는 주춤주춤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침상에서 그의 등으로 올라가 두 팔로 목을 감자 제자는 나를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아이고오.”
그의 목과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자니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뛴다. 작게 탄식을 뱉자 제자는 나를 고쳐 업더니 흘러내리는 용포를 뜻밖에도 내 등에 둘러주었다.
“덮, 덮고 가도 될까요?”
당황해서 묻자 제자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딴소리를 못 하게 막아줄 겁니다.”
막 밖으로 나가려고 보니 눈발이 또 휘날리고 있었다. 제자는 전에 내게 빌려주었던 그 하얀 우산을 챙겼다.
“제가 들게요.”
가만히 업혀 있자니 민망해서 나는 얼른 손을 내밀었다.
“찌르지 마십시오.”
제자는 당부하면서 우산을 건넸다.
우산을 한 손에 높이 들어서 제자의 머리에 눈이 닿지 않도록 해주자 그가 몸을 움찔했다.
그 상태로 제자가 걸어갔다. 월무궁의 좁은 길을 지나 정문으로 걸어가고 있자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우리 쪽을 힐긋거리는 게 보였다.
그들이 선한궁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문을 듣고 쳐다보는 건지 아니면 용포 때문에 쳐다보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몹시 민망했다.
나는 우산을 기울여 들고서 제자의 목덜미 위로 얼굴을 가렸다. 열이 더 올라오는가. 얼굴이 뜨끈거렸다.
“스승님. 우산 더 높게 드세요. 앞이 안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