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비밀 지키란 사람 치고 비밀 지키는 사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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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비밀 지키란 사람 치고 비밀 지키는 사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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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비밀 지키란 사람 치고 비밀 지키는 사람 없다
2022.10.31.
“이국사, 자네가 여인이란 말이 있던데.”
어제 내린 눈으로 길이 미끈거렸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걸어가느라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난데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미소 띤 얼굴로 우두커니 선 7황자가 보였다.
“7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나는 얼른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정말인가?”
7황자는 내 인사에 대답을 생략하고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코앞에 선 그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럴 리가요.”
나는 얼른 대답하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7황자가 내 턱을 들어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만들었다.
“늘 생각했지. 자네 얼굴이 너무 어여쁘다고 말이야.”
7황자는 여느 때보다도 밝게 웃고 있었다. 참으로 속이 좁기도 하지! 말 한 마리 못 빌렸다고 나를 아주 잡아 죽이려 하는구나.
젠장, 린화는 대체 누구누구에게 내가 여인이란 소리를 하고 다닌 거야? 7황자에게 린화가 직접 말할 리는 없으니 소문이 퍼지고 퍼져서 7황자 귀에까지 들어간 건가?
“말해보게 이국사. 응? 자네, 여인인가?”
7황자가 나를 재촉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던가요?”
나는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허탈한 척 웃으며 물었다.
“글쎄. 내가 누구한테 들었는진 중요하지 않지. 하지만 첫 출처가 자네 누이라는 건 꽤 중요한 듯한데.”
역시 린화 그 망아지 짓이구나. 이번에는 정말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갔다.
“얼른 대답해보게, 이국사. 응? 자네가 남장을 하고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건가? 여인의 몸으로 황자의 스승이 되었냐 이 말이네.”
7황자가 내 턱을 놓아주며 재촉했다. 아주 희열에 들뜨셨구먼. 이자도 참으로 못된 놈이다. 화는 13황자한테 났으면서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 아닌가.
“이국사. 왜 대답을 하지 않나?”
“대답은 아까 드렸습니다, 전하. 처음에요.”
“그렇지. 하지만 그건 거짓 아닌가.”
“전하께서 원치 않는 대답이었을 뿐이지요.”
“이국사. 잘 말해야 하네. 자네가 지금 또 하나의 기만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거든.”
7황자의 눈이 밤에 만난 조류처럼 번쩍거렸다.
“이국사?”
그가 나를 놀리는 투로 한 번 더 불렀다.
“정말 대답 안 할 건가?”
“대답은 아까 드렸습니다.”
애써 태연하게 말해보았으나, 그는 아주 작정하고 온 모양이다.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게다가 칼같이 13황자와의 혼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전에 혼인 이야기를 같이 꺼냈을 때 13황자가 황제와 황후를 끌어들여 버렸지. 그 때문에 7황자는 더 추궁하지 못하고 물러가야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피하기 위해 혼인 이야기는 생략하고 내가 여인인지만 캐묻는 게 분명했다.
‘젠장. 어쩌지.’
* * *
9황녀는 다리는 따스한 난롯가에 두고 몸은 최대한 옆으로 뺀 채 궁녀가 가져다준 얼음 뭉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전하, 전하.”
그러다 측근 궁녀인 화린이 다급히 들어오며 부르자 멀뚱히 고개만 돌렸다.
“왜 그래?”
화린은 9황녀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무릎을 굽히고서 목소리를 죽여 외쳤다.
“7황자님께서 월무궁에 가는 요 이국사를 자기 처소로 데리고 가버리셨어요!”
9황녀는 눈살을 찡그리고서 제대로 고쳐 앉았다.
“일곱째 오라버니가 왜?”
9황녀는 7황자가 요요화와 13황자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7황자가 친하지도 않은 요요화를 자기 처소로 데려갔다니 필시 좋은 일은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서둘러서 달려오다니. 9황녀는 혹시 화린이 요요화를 좋아하는지 의심했다.
“요 귀인이 전하께 요 대인이 여인이란 말을 했단 소문이 퍼져서요. 7황자 전하께서 대놓고 요 대인에게 ‘진짜 여인이냐’고 추궁했답니다!”
“뭐어?!”
9황녀가 가지고 놀던 눈덩이가 난로의 열기에 녹아서 뚝뚝 흘러내렸다. 이를 지켜보던 다른 궁녀가 얼른 대야를 가져와 9황녀에게 내밀었다.
9황녀는 남은 눈을 그쪽에 넣으며 물었다.
“그 말이 어떻게 새어나간 거야?”
화린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요린화가 퍼트렸나 보다! 나와 요린화만 아는 이야기이니 내가 아니면 요린화겠지!”
9황녀는 손수건을 꺼내 축축해진 손을 닦으며 지시했다.
“내 피풍의를 가져와라.”
“가시려고요?”
“선안 공자가 요 대인은 여인이 아니라고 서신을 보냈다. 난 선안 공자 말을 믿어.”
옆에 서 있던 궁녀가 얼른 두꺼운 피풍의를 가져와 걸쳐주었다.
9황녀는 손을 닦은 손수건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서, 피풍의 양 끝을 잡아 여미고 처소 밖으로 나갔다.
9황녀가 뛰쳐나가자, 화린은 따라 나갈 것처럼 하다가 뒤로 휙 돌아보았다.
9황녀에게 대야를 가져다준 궁녀가 그 매서운 시선에 뒤로 주춤 물러섰다.
화린은 그 궁녀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항의했다.
“네가 말했어?”
궁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화린은 바닥을 발로 구르며 소리쳤다.
“그걸 말하면 어떡해! 내가 너만 알라 그랬잖아!”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무린에게만 전했는데…….”
궁녀의 변명에 화린은 기가 막혀서 쏘아붙이려다가 자신이나 이 궁녀가 다를 게 없단 생각에 그냥 돌아섰다.
3황자 역시 엇비슷한 시각에 이와 비슷한 소문을 듣고 처소를 나섰다.
* * *
또 13황자가 끼어들까 봐 염려되었는지 7황자는 이번에는 나를 자기의 거처인 선한궁 소혜전까지 데려왔다.
본전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린화의 우혜전이 있는 걸 떠올린다면 참으로 교묘한 위치였다.
“얼른 말해보게.”
7황자는 강제로 나를 데려와 놓고서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물었다.
7황자의 태감들도 신나 실실 자기들끼리 웃어대면서 남이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주인이나 아랫사람이나 아주 똑같았다.
그중 7황자의 바로 옆에 선 태감은 낄낄 웃으면서 제안하기까지 했다.
“전하, 전하. 요 이국사에게 상의를 벗어보라 해보시지요. 사내들끼리라면 뭐 어떻습니까. 같이 목욕도 하고 하는데요!”
7황자는 그 태감의 말에 바로 웃어젖혔다.
“오호라. 그러면 되겠구나!”
아마 내 눈은 지금쯤 아주 퀭해졌으리라 생각된다. 머릿속이 그야말로 백지처럼 새하얘졌다. 사내란 걸 들킬 수도 없지만, 그들 앞에서 상의를 벗을 수도 없었다.
상의를 벗으면 여인인 것도 들통날뿐더러 완전히 내 자존심을 뭉개는 일 아닌가.
“상의를 벗어보게.”
7황자는 대번에 내게 지시했다.
“싫습니다.”
나는 바로 거부했다. 하지만 이 대답이 저들에게는 내가 여인이라는 수긍이나 다름없이 들리리라는 건 그도 나도 알았다.
7황자는 입꼬리를 올렸다.
“싫다고? 고작 상의를 벗는 것뿐인데?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상의를 벗어 보일 수 있다, 이국사.”
“전 아닙니다.”
“여인이라 그렇겠지.”
7황자는 이죽거리더니 자기 궁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궁녀들 때문에 그러나? 그럼 궁녀들은 내보내 줄까? 사내들끼리라면 벗어 보일 수 있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7황자에게 화가 나고 린화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린화는 이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건가?
그때. 쿵쿵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제자인가?’
나는 나타난 이가 제자이길 바라면서 다급히 돌아보았다.
그러나 나타난 사람은 제자가 아니었다. 14황녀였다. 14황녀는 나와 7황자를 번갈아 보더니 신이 난 얼굴로 외쳤다.
“내가 확인해줄게!”
아직 계례도 치르지 않은 어린 14황녀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얼굴로 그저 재밌어하기만 했다.
“우리 오라버니한테 들었어! 만약에 확인했는데 요 이국사가 여인이면 일곱째 오라버니도 곤란하잖아. 내가 해줄게!”
저 조그만 황녀한테까지 이야기가 들어갈 정도라면 정말로 소문이 죄다 퍼졌다고 봐야 하나. 젠장, 린화는 소문을 대체 어떻게 낸 거지?
7황자는 뒷짐을 지고 돌아서더니 어린 동생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열넷째 말이 일리가 있구나. 아주 똑똑해.”
7황자는 다시 나를 돌아보더니 커다란 배려를 하는 투로 물었다.
“이러면 되겠나 이국사?”
“…….”
나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때였다. 다시 쿵쿵 복도를 지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14황녀가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문을 닫지 않았기에, 복도를 지나온 사람이 누구인지 이번에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9황녀였다.
9황녀는 앞에 선 14황녀를 한 손으로 퍽 밀쳐내더니 7황자에게 다가서며 항의했다.
“일곱째 오라버니, 이게 무슨 짓이야. 미쳤어?!”
황후의 소생인지라, 동생이라도 7황자는 9황녀의 서슬 퍼런 호통에 살짝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나한테는 큰소리를 뻥뻥 치던 7황자는 9황녀에게는 미소를 지으면서 달래는 투로 말했다.
“미치다니. 요 이국사가 여인이란 말이 있어서 확인하려 한 거지. 요 이국사가 정말 여인이라면 그가 이국사 일을 하는 거나 소가주 행세를 하는 거나 다 문제가 되지 않니. 우리 화음의 질서를 생각해서 추궁하는 거란다.”
7황자는 나를 삿대질하며 덧붙였다.
“이국사 좀 보거라. 상의만 벗으면 여인이 아니란 걸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도 하지 않지 않니.”
9황녀는 그래도 호통을 쳤다.
“요 이국사가 왜 오라버니 앞에서 상의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럴 이유가 없으니 안 하는 거야!”
9황녀를 대놓고 응원하고 싶을 지경이다. 14황녀는 9황녀가 온 뒤로는 아예 입도 꿈쩍하지 않았다.
“요 이국사, 얼른 이리로 와요.”
9황녀는 내 쪽을 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얼른 9황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7황자가 내 팔을 잡더니 휙 자기 쪽으로 당겨버렸다. 끌려가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주었으나, 그 바람에 오히려 나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틈을 타 7황자의 태감 하나가 난롯가에 둔 물을 대야째 내게 끼얹어버렸다.
안 그래도 추운 날씨에 찬물을 덮어쓰자 대번에 오한이 덮쳤다.
“오라버니!”
9황녀는 버럭 외치고서 궁녀들에게 지시했다.
“얼른 부축해드리거라!”
9황녀의 궁녀들이 나를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7황자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가야겠구나. 이 날씨에 찬물에 젖은 옷을 입고 돌아다녔다가는 필시 크게 앓을 테니 말이다.”
9황녀는 7황자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이 일은 어마마마한테 다 이를 줄 알아.”
그러고는 7황자가 움찔하는 사이, 9황녀는 자신의 궁녀들에게 명령했다.
“어쩔 수 없구나. 요 이국사가 옷 갈아입는 걸 돕거라.”
그러고는 7황자에게 소리쳤다.
“오라버니는 옷 내놔!”
9황녀는 선안의 서신 때문에 내가 사내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 탓에 9황녀는 성별을 확인하기 위해 상의를 벗는 건 모욕이라 안 되지만, 옷이 물에 젖었을 때 갈아입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옷은 차가운데 얼굴에는 열기가 올라왔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나고 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