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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여인이란 이야기 (69/159)


69화. 여인이란 이야기
2022.10.27.



 
선안은 제대로 말을 마무리 짓지도 못했다.


“아니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나는 선안의 팔을 툭 치고서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얘기를 전해줘서 고맙네.”

아무렇지 않게 굴기. 아무렇지 않게 굴기!


“그래. 아니지? 그래. 온갖 여인들과 염문을 뿌려대는 자네 같은 바람둥이가 여인일 리가 있나.”

내가 태연하게 대하자 선안은 그제야 안도해 문간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동생은 한번 혼내게.”

나가기 전 선안은 한 발만 밖으로 빼고서 내게 충고했다.


“배웅은 하지 않겠네.”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침상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요린화 요린화…… 이 망아지! 결국 네가 사고를 치는구나!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머리를 쥐어뜯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선안이 나를 황망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나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며 외쳤다.


“진짜였다고?!”

저놈이…… 머리를 썼어!

* * *

수길 어멈이 나무 소반에 밥과 국, 반찬 두 종류를 가지고 들어왔다.


“많이 잡수셔요.”

수길 어멈이 나가자마자 선안은 나를 심란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자네가 여자인 걸 알게 된 이상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물어야겠네.”

“뭐.”

“자네…… 여인을 진짜로 좋아하는 건가 좋아하는 척한 건가?”

선안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나는 그에게 베개를 집어 던졌다. 선안은 얼른 베개를 잡아 옆에 내려두었다.


“아 왜 나한테 화내는가! 내가 뭘 어쨌다고!”

그의 말대로였다. 선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꾀를 써서 내가 여인인 걸 확인하고 충격받아 주저앉긴 했지만, 이후로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도로 내 방에 들어온 다음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자꾸 고개를 저어댔을 뿐이다.


“그게 중요한가?”

내가 구박하자 선안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 자네가 제일 인기 좋은 사내 아닌가. 당연히 궁금하지.”

“그거 외엔 궁금한 거 없나?”

그 반응에 내가 더 신기해서 묻자 선안은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되물었다.


“더 궁금해야 하나?”

“내가 남장한 이유라거나.”

“그건 궁금하지도 않은데. 이유야 뻔하지 않나. 가문 문제.”

내가 놀라 쳐다보자 선안이 숟가락을 들며 거들먹거렸다.


“자네랑 같이 지낸 게 몇 해인데 자네 집 사정을 모를까. 자네 부모님에겐 아들이 없고, 자네의 숙부들 역시 모두 딸뿐이지. 심지어 서출까지도.”

그렇구나. 내가 남장했다고 하면 모두가 다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한숨이 나온다.


“왜 한숨인가?”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 아닌가. 다들 우리 가문이 사기극을 벌였다고 생각할 거고.”

사실이긴 하지만.

선안은 밥에 국을 말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뭘 걱정인가. 염려 말게. 우리 황녀 전하는 입이 아주 무거워. 내게도 서신을 보내면서 몇 번이나 비밀이라고 당부하셨네.”

“황녀 전하는 입이 무거우시지. 하지만 내 동생은? 그 애가 황녀 전하한테만 말했겠나?”

“그러지 않을까? 황녀 전하가 서신에서 말하길, 자네 동생도 이 일은 비밀이라고 신신당부했다 하거든.”

말을 마친 선안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는지 후후 불어가며 국을 먹기 시작했다.


“자네 집 찬모는 정말 요리를 잘해.”

선안은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는 점잖게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물었다.


“황녀 전하께는 어떻게 할 건가? 비밀로 할 건가, 아니면 비밀로 해 달라고 할 건가?”

 

* * *

다음날 궁전으로 걸어가는 내내 평소보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필 싸락눈이 내려서 가는 길은 더욱 추웠다.

어머니가 안에 솜을 두둑하게 넣어 도톰하게 만들어준 피풍의를 최대한 끌어모았는데도 가리지 못한 볼과 귀가 떨어져 나갈 듯했다.


“오셨습니까.”

9황녀가 지금까지는 정말로 입을 다물고 있는지, 나를 본 13황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내 머리 옆쪽을 곁눈질했다.


‘안 했다. 목련도 갈매기도 안 했어. 봐봤자 아무것도 없다!’

수업이 끝났을 때 그는 내게 자신의 하얀 우산을 건넸다.


“쓰고 가시지요. 눈이 찹니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대화원으로 들어가 야외에 설치된 긴 의자에 앉아 아직도 내리지 못한 고민을 곱씹었다.

어제 선안은 내게 ‘9황녀에게 사실을 밝힐 건지 아니면 거짓말이라 하고 넘어갈 건지’ 물어보았다. 나는 며칠 좀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린화가 굳이 9황녀에게 내가 여자란 이야기를 한 건 내가 9황녀랑 선안이랑 사이좋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하며 그 이야기를 했을 거다. 내가 가장 절친한 친구를 잃기를 바라고서.

내가 9황녀에게 여자가 맞다고 인정했는데,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버리면 어찌 될까?

혹은 9황녀에게 여자가 아니라고 부인했는데, 린화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이야기를 해서 결국 들통난다면 어찌하나? 9황녀는 두 번 속았다는 데 더욱 분개할 것이다.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았다. 9황녀에게 내 비밀을 알리는 건 신중하고 신중해야 했다.

그럼 일단 린화를 찾아가야 하나? 찾아가서 지금이라도 입을 다물게 해야 하나? 하지만 린화는 내 얼굴을 보면 더 흥분해서 날뛰면 날뛰었지 가라앉을 애가 아닌데.


“요 이국사?”

 

 
멍한 정신을 뚫고 3황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나는 우산을 내리고 얼른 일어났다. 언제 온 거지? 3황자는 바로 앞에 청색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웃으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불러도 듣지 않나.”

“송구합니다. 좀 골치 아픈 문제를 생각해야 해서요.”

나는 얼른 둘러대고서 내렸던 우산을 다시 주춤주춤 올렸다.

3황자가 내가 앉아 있던 의자 가에 앉으며 웃었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문제인가?”

나는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3황자는 더 재촉하거나 묻지 않았다. 내가 대답을 오래 끌자 허공에 입김을 불기만 했다.


‘아 귀여워. 정말 귀여우시구나. 세상에서 제일 귀여우시다.’

거기에 홀려 너무 빤히 쳐다보았나. 3황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저하다가 나는 그의 무거운 입을 믿고 털어놓았다.


“실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동생이 내게 화가 나서 9황녀에게 내 비밀에 대해 털어놓은 일, 9황녀가 서신으로 선안에게 진짜인지 물어본 일, 선안이 그 서신을 받고 내게 온 일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3황자는 어차피 내가 여인인 걸 알기에 비밀은 털어놓았지만, 동생이 내게 화를 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남사스러워.


“그래서 고민입니다.”

3황자는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 하소연이 끝나자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여장하고 살아본 적이 없어서 요 이국사의 어려움을 다 알진 못하네. 하지만 힘들었으리란 짐작은 할 수 있어.”

“예? 별로 안 힘든대요?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살았는걸요.”

정말로 몸은 힘들지 않았다. 힘든 게 있다면 오히려 압박감이었다. 가문 전체가 걸린 비밀을 내가 평생 간직하고 지켜내야 한다는 그런 압박감.

3황자는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그래야 우리 용감한 이국사지.”

“!”

3황자가 칭찬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다리가 떨리고 손바닥이 간지러워졌다. 숨소리도 내기 부끄러워서 나는 호흡도 멈추었다.

3황자는 옆으로 기울어진 내 우산을 바르게 세워주며 덧붙였다.


“내가 하나 조언을 해주자면, 이국사. 아홉째 누이는 성정이 불같긴 해도 나쁜 성품은 아니라네. 이국사의 동생이 소문을 더 퍼트리지만 않는다면 아홉째 누이가 먼저 입을 열진 않을 거야.”

 

* * *



“소주 소주!”

멀리서부터 정신없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린화는 황후가 새로운 후궁 셋에게 나누어준 황실 여인들의 덕목에 관한 서책을 외다가 문 쪽을 쳐다보았다. 곧 문이 열리고 월미가 뛰어 들어왔다.


“소주!”

달려온 월미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인데 이 난리야?”

린화는 서책을 덮어 옆에 놓으며 물었다.

입궁한 후로 월미는 내내 조심조심 행동하며 주위를 잘 살폈다.

궁궐에서는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늘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고 상궁이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가에 있을 때처럼 이렇게 호들갑을 떨다니.


“소수, 소주, 혹시 소가주님이 여인이란 말을 하고 다니셨어요?”

월미의 질문에 린화는 심장이 철렁해서 버럭 소리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요!”

월미가 눈시울이 붉어져서 외쳤다.


“자세히 좀 말해봐!”

린화는 잔에 물을 따라서 건넸다. 월미는 그걸 세 모금 마시고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무부에 직접 물건을 받으려고 갔을 때예요. 거기 태감이랑 궁녀들이 모여서 요 이국사 이야기를 하면서 수군거리는 거예요. 요 이국사라면 우리 소가주님이잖아요? 내무부에 보통 물건을 받으러 가는 건 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은 제 얼굴을 모르는지 제가 가까이 가는데도 계속 그 이야기를 했어요.”

“무슨 이야기?”

“아가씨, 아니, 소주가 9황녀 전하에게 요 이국사가 여인이란 말을 했단 이야기요!”

린화는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옆에 둔 서책을 떨어뜨렸다. 당시 사람들을 다 물렸는데. 그 이야기가 어떻게? 어떻게 퍼져나간 거지?

9황녀? 9황녀가 그 이야기를 여기저기 다 퍼트리고 다닌 건가?


“9황녀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닌대?!”

린화가 버럭 외치자 월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그냥 그 사람들은 소주가 9황녀 전하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만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

“소주, 소주는 그런 얘기 한 적 없으시죠?”

월미가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린화는 말문이 막혔다. 린화는 9황녀가 선안을 위해서라도 그 이야기를 퍼트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설마 이틀 만에 이렇게 소문이 날 줄은…….


“아니, 사람들은 그런 헛소문을 믿어?”

“예전에도 그런 비슷한 소문이 났다가 황후마마가 노하셔서 급하게 가라앉은 적이 있나 봐요. 황후마마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게 하셔서요.”

린화는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일어나서 서성거렸다.

월미는 겁먹은 린화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덩달아 두려워졌다.

린화가 화를 내면서 아니라고 부정하러 가는 게 아니라, 저렇게 초조한 반응을 보이자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소문이 진실인가?


“소주. 정말인가요? 정말 우리 도련님이…….”

“시끄러우니 입 좀 다물어보아라. 생각할 수가 없잖아!”

“차를 가져올게요.”

월미가 조용히 나가자 린화는 손톱을 마구 깨물었다. 요화의 친분을 망쳐놓고 싶었지만 일이 그 이상 커지길 바란 건 아니었다.


‘아니야. 그냥 소문일 뿐이잖아. 괜찮을 거야. 전에도 소문이 났다가 가라앉은 적이 있다며. 이번에도 황후가 뭔가를 해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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