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자네 동생 미쳤나?
(68/159)
68화. 자네 동생 미쳤나?
(68/159)
68화. 자네 동생 미쳤나?
2022.10.24.
9황녀의 궁녀가 린화가 준 찻잎으로 차 두 잔을 우려왔다.
9황녀는 찻잔을 받고서 향을 맡더니 까르르 웃었다.
“향이 정말 좋네요. 요 이국사한테서 나는 향이랑 좀 비슷하기도 하고.”
“오라버니가 그 차를 제일 좋아하거든요. 찻잎으로 쓰지 못할만한 건 따로 모아서 방 안에 걸어두고 옷장 안에도 넣어두고 그래요.”
린화는 자신의 찻잔을 집고서 올라오는 수증기를 불었다.
“요 이국사는 정말로 멋진 사내예요.”
9황녀는 요요화 이야기가 나오자 볼이 만두처럼 보이게 웃었다.
“우리 오라비들이 요 이국사 반의반만 됐어도 나와 사이가 좋았을걸요.”
린화는 대꾸하지 않고 차만 마셨다.
월미는 린화에게 살살 부채질을 해주면서 연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린화가 울면서 요화와 황제에 대해 떠들던 모습이 아직도 그녀에게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하필 그 뒤에 찾아온 게 9황녀라 린화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어 불안했다.
9황녀는 차를 마시면서 발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물었다.
“요 이국사는 집에서는 어떻게 지내나요?”
린화는 어깨를 으쓱했다.
“평범하게 지내요.”
9황녀는 고개를 가로젓고서 린화에게서 좀 더 가까운 자리로 옮겨 앉으며 말했다.
“그 평범한 게 궁금해요.”
9황녀가 옆자리로 다가오자 린화는 약간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웃었다.
“오라버니에게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은인이니까요!”
“그래도 계속 제 오라버니에게 관심을 보이면 선안 공자께서 질투하실 거예요.”
린화의 뼈 있는 말에, 그녀가 선안을 사모하는 걸 아는 월미는 심장이 발바닥까지 내려갔다. 부채질하는 손길이 자꾸 떨렸다.
그러나 9황녀는 아무것도 모르고서 까르르 웃기만 했다.
“그것도 좋지요.”
월미는 9황녀가 놀랍도록 해맑다는 데 감탄했다. 황궁 사람들은 모두 암투에 밝다던데.
9황녀는 평범한 사대부 사람들보다도 암투에 문외한으로 보였다. 황후의 친딸이기 때문일까?
9황녀는 반쯤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런데 요 귀인은 내게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요?”
린화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방어할 말부터 꺼냈다.
“기분 나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기분 나빠할 게 뭐가 있어요?”
“9황녀 전하께서 제게 잘 대해 주시고…… 또 이런 이야기는 오라버니가 직접 하기고 힘들고…… 그래서 어려운 자리지만 제가 나서기로 한 거거든요.”
내내 웃고만 있던 9황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변했다.
“요 이국사가 내게 전해달라 한 말이 있나요?”
린화는 바로 말하는 대신 궁녀들에게 눈짓했다. 월미는 얼른 부채를 탁자에 내려놓고 나갔다.
그걸 본 9황녀도 자신의 궁녀에게 지시했다.
“너도 나가보거라.”
자신의 측근 궁녀까지 나가자 9황녀가 재촉했다.
“이제 말해봐요. 무슨 일인데요?”
린화는 두 손을 꼭 모아 잡고서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 9황녀 전하께선 우리 오라버니가 은인이라 하셨지요?”
“그럼요. 아니었으면 내가 크게 다쳤을 거예요. 게다가 요 대인 덕에 선안 공자를 만나기도 했고요.”
“이 일이 흘러나가면 저희 오라버니는 정말 큰일 나요. 그러니 꼭 약조를 지켜주실 거지요?”
린화가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9황녀는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다가, 허리를 펴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말을 바꾸었다.
“아니, 아니다. 그냥 말하지 말아요.”
“!”
“내게 꼭 해야 할 말이에요? 그런 게 아니라면 듣지 않는 게 낫겠어요. 비밀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안 하는 게 나아요.”
9황녀는 고귀한 자리에 있었지만, 위로는 어머니의 총애를 받는 두 언니가 있었고 아래로는 철부지인 동생이 있었다.
중간에 끼인 많은 자녀가 그렇듯 9황녀도 그 사이에서 처신하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화린아!”
9황녀는 소리 높여 내보낸 자신의 측근 궁녀를 불렀다.
“오라버니가 전하라고 했어요.”
린화는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문가에서 덜컥이는 소리가 났다.
9황녀는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물었다.
“요 대인이요?”
“마음이 너무 불편하대요.”
9황녀는 대체 뭘 원해서 린화가 저렇게 말을 돌리고 끄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9황녀는 저렇게 말을 비비 꼬아 하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도 요요화가 전하라 한 말이 있다기에 9황녀는 마지못해 물었다.
“뭔데요?”
린화가 또 물었다.
“비밀을 지켜줄 거지요?”
9황녀는 질려서 중얼거렸다.
“지키긴 하겠지만…… 그리 듣고 싶지 않은데.”
“오라버니는 실은 여인이에요.”
툴툴거리던 9황녀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게 무슨…….”
“오라버니가 9황녀 전하랑 선안 공자랑 모두 친하다 보니 속이기가 힘들다고, 하지만 오라버니가 따로 황녀 전하와 이야기할 시간을 가지긴 힘드니 말을 전해달라 했어요.”
9황녀는 대꾸하지 못하고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린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혹시 화나셨나요?”
9황녀는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고 이상한 사람 보듯 린화를 쳐다보기만 했다.
“화내지 마셔요.”
린화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는 9황녀의 눈치를 실파다가 살그머니 덧붙였다.
“사실 오라버니도 아주 힘들었어요. 9황녀 전하께서 자기가 여자인 걸 모르고 임신했니 어쩌니 하시니 얼마나 당혹스러웠겠어요?”
“!”
“그래도 그 덕에 친자매인 저보다도 더 가깝게 지내고 매일 붙어 다니는 선안 공자와 9황녀 전하를 맺어주게 되었잖아요. 결과적으로는 다 잘 풀렸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내내 조용하던 9황녀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천천히 물었다.
“둘이 늘 붙어 다닌다고요……?”
“네.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몰라요. 지금은 좀 낫지, 예전에는 둘이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적었다니까요?”
린화는 즐거운 과거 이야기를 회상하듯 하다가, 무슨 소용이냐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아. 어쨌든 어려운 심부름을 끝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
홀로 후련해진 린화의 모습을 9황녀는 다시 조용해져서 쳐다보았다.
린화는 찻잔을 들다가, 놀란 척 찻잔을 도로 내려놓고 물었다.
“어머. 황녀 전하? 괜찮으세요?”
“…….”
“혹시 화나셨나요? 죄송해요. 오라버니가 황녀 전하와는 우정이 있다고 해서…… 화나실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린화가 초조한 얼굴로 더 말하려 했으나, 9황녀는 바로 “화린!” 하고 외쳤다.
닫혀 있던 문이 바로 열더니 9황녀의 궁녀가 들어왔다.
“네!”
린화는 9황녀의 궁녀가 너무 바로 들어오는 바람에 흠칫했다. 어떻게 저렇게 빨리 들어왔지? 설마 문 바로 앞에 서 있었나? 그 정도 거리라면 대화가 들렸을지도 몰랐다.
9황녀는 린화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지시했다.
“요 귀인께서 돌아가신다니 배웅해드려라.”
“9황녀 전하…….”
“찻잎 고마워요, 요 귀인.”
* * *
9황녀의 처소를 나선 린화는 선한궁으로 이어지는 길을 조용히 걸어가다가 주위에 인적이 사라졌을 때 궁녀 월미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혹시 나랑 황녀 전하의 대화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어?”
월미는 바로 부인했다.
“네? 아니요. 들리지 않았어요. 문에서 거리를 두고 서 있었는걸요.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셨으니 문 옆에 딱 붙어 있으면 안 되지요.”
“다른 사람들은?”
“다 비슷하지요.”
월미의 야무진 대답에 린화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린화는 9황녀의 부름이 있자마자 지체 없이 열리던 문을 떠올렸다. 그럼 그 궁녀는 재빨리 달려와서 문을 열었던 건가?
괜한 걱정이겠지. 린화는 자신이 너무 걱정이 많다고 생각하며 걷는 데 집중했다.
우혜전에 돌아온 린화가 침전 안으로 들어가자, 월미는 린화가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뜨거운 물을 가지러 갔다.
월미는 미리 우물에서 받아 모아둔 물을 꺼내기 위해 뚜껑을 젖히고 바가지를 찾아왔다.
커다란 솥으로 물을 몇 바가지 옮겨 담으면서, 월미는 문득 9황녀의 궁녀 화린에 대해 떠올렸다.
화린은 처음에는 월미와 비슷한 위치에 새초롬하게 서 있었다. 같은 궁녀라도 자신과 다른 궁녀들의 처지가 전혀 다르다는 걸 보이려는 듯했다.
그러다가 9황녀가 ‘화린!’ 하고 한 번 부르자 얼른 문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9황녀가 들어오라고 부른 게 아니라 판단했는지, 안으로 들어가진 않고 거기에 서 있기만 했다.
이후 다시 9황녀가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화린은 문을 열어젖혔다.
그 이야기도 해야 했나? 월미는 솥뚜껑 문을 닫고 아래에 붙을 붙인 다음, 화덕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고민했다.
* * *
“도련님, 선안 도련님이 도련님을 찾아오셨습니다.”
침상에 드러누운 채 온몸에 힘을 빼고서 게으름을 부리고 있자니, 사내종인 월강이 다가와 알려주었다.
“어어 그래. 들어오라고 해.”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월강이 나가고 선안이 들어왔다.
“아이고 이 인간아.”
선안은 나를 보자마자 거친 소리를 뱉더니 머리맡으로 다가와서 내 이마를 찰싹 때렸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니 이 자식이? 나는 벌떡 일어나서 선안의 이마를 같이 찰싹 때렸다.
자기가 먼저 쳐놓고서. 선안은 자기 이마를 문지르면서 성질을 냈다.
“이 폭력배 같으니라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뛰어왔는데 이마를 때리나?”
“뭐래. 내가 맞은 건 이마가 아니라 뒤통수인가?”
선안은 입을 크게 벌렸다가 도로 다물더니, 내게 좀 조용히 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말은 자기가 혼자 다 하고 있으면서.
그러고는 문가로 다가가 귀를 대어보다가 다시 돌아와 목소리를 낮추었다.
“자네 9황녀 전하가 나한테 급하게 서신을 보내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나?”
“그걸 내가 알겠나?”
“나더러 자네가 여인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 물어보셨네.”
나는 너무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요요화가 여인이냐’고 물은 게 아니라 ‘요요화가 여인인 걸 너도 알았냐’고 물었다고? 내가 여인이라고 확신한 질문 아닌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왜?”
“자네 동생이, 아, 요 귀인이 찾아와서 그랬대. 자네가 여인인 걸 9황녀에게 밝혀달라 했다고.”
선안은 말을 잠시 멈추더니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내가 남의 가족 욕은 안 하자는 주의인데. 자네 동생 미쳤나?”
“그러게. 걔가 미쳤나.”
나는 선안을 따라 중얼거렸다. 하지만 머릿속에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린화가 9황녀에게 내가 여자란 말을 했다고? 린화가?
린화가 나에 한해 감정이 폭풍처럼 몰아치긴 해도 선은 지키는 아이였다. 그런데 린화가?
황제가 준 목련 장식을 손에 쥐고서 나를 죽일 듯 노려보던 눈길이 떠올랐다. 린화는 혹시…… 혹시…… 내가 황제에게 관심을 보인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걸까?
“요화?”
선안이 나를 불렀다.
“자네 괜찮나?”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선안이 내 팔을 두드리며 말했다.
“황녀 전하께 자네 동생이 헛소리한 거니 신경 쓰실 필요 없다고 했네. 하지만 한번 궁에 들어가서 동생을 좀 따끔하게 혼내는 게 낫겠네. 농을 해도 농이란 걸 알 수 있게 해야지. 뭘 어떻게 말했길래 9황녀 전하가 내게 그런 질문까지 한단 말인가?”
선안은 당연히 나는 사내이고 요화가 과한 거짓말을 한 거라 여기는 눈치였다.
그러다 선안은 내 표정을 보더니 낯빛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해서 입을 쩍 벌렸다.
“자네……? 자네……? 혹시……?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