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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머리 좋은 사람과 눈치 좋은 사람 (67/159)


67화. 머리 좋은 사람과 눈치 좋은 사람
2022.10.20.


난 제자가 내게 무어라고 말을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불편한 침묵 뒤. 제자는 말없이 돌아서서 먼저 월무궁으로 걸어갔다.


“전하? 왜 그러세요?”

옆으로 따라붙으며 물었으나 제자는 빠른 속도로 걷기만 했다.

방 안에 들어서서도 그는 말없이 서책만 펼쳤다. 자기가 착실한 제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맞은편에서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머리에서 장신구를 떼내어 책상 구석에 두었다.


“110쪽 할게요…….”

제자를 떠보기 위해서 나는 일부러 전에 학습한 부분을 한 번 더 불렀다.

제자는 반응 없이 책장을 뒤로 넘겼다.


‘너무하네!’

내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내 자존심을 지키려면 나는 제자가 날 무시할 때 같이 그를 무시하고 바로 수업을 해버려야 한다.


“전하.”

하지만 나는 자존심보다는 목숨이 더 소중했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자의 책상 맞은편으로 갔다.

그러고서 일전에 그가 나를 놀릴 때처럼 그의 책상을 손으로 짚고서 허리를 조금 숙였다.


“무얼 하시는 겁니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제자도 더 무시하지 못하고 물었다.


“돌아가세요.”

“하지만 전하가 자꾸 절 무시하시잖아요.”

제자의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나는 버티고서 제자리를 지켰다.


“머리 장식 때문에 그러십니까?”

“!”

“이거 보세요. 벌써 뺐어요. 빼서 저기 구석에 던져두었습니다.”

손가락으로 내 책상을 가리켰다.

제자는 무표정하게 있었지만,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예전에 9황녀에게 거칠게 그녀를 구한 걸 용서해 달라며 지은 표정으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9황녀는 내 이 표정을 보고서 한 번에 넘어왔다. 제자도 9황녀와 반은 피가 같으니 이 표정에 넘어올지도 모른다.


“…….”

음. 안 넘어오나. 어이없다는 듯 비웃는 걸 보니 내가 아주 가소롭기만 한 모양이네.

나는 시무룩하게 내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저 제자놈의 비위를 맞추다가 명이 찔끔찔끔 짧아지겠어.

* * *



“스승님.”

수업을 마치고서 조심조심 책을 정리하며 머리 장신구를 도로 달고 가야 할지 들고 가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제자가 날 부르더니 자기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다가왔다. 제자는 내 머리카락에 그걸 달아주었다.


 


“뭐, 뭔가요?”

손을 올리자 차가운 금속 재질과 동글동글한 구슬 같은 게 느껴졌다.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당황해서 계속 더듬거리고 있으려니, 제자는 안쪽 곁방에 들어가 자기 머리통만 한 거울을 들고 왔다.

거울에 비추어보니 쌀알 같은 진주가 방울방울 달린 머리 장식이었다.

가관인 건 그 쌀알 사이에 뭐 갈매기 같은 새가 한 마리 있는데, 내 머리카락이 그 새 발가락에 잡혀 있단 점이었다.

뭐야 이 파격적인 취향은.


“어떻습니까?”

“진주는 갈매기 밥이고 제 머리카락은 갈매기 집이에요?”

제자가 들고 있는 거울이 흔들렸다.

당황해서 올려다보니 제자가 턱에 힘을 꽉 주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제자는 거울을 치우며 정정해주었다.


“두루미입니다. 진주는 거품이고요.”

이게 어딜 봐서……라고 하고 싶지만 그런 거로 하자.


“아하. 그렇군요.”

애써 납득한 척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자니 제자가 책상 끄트머리에 놓인 목련 머리 장식을 흘겨보며 말했다.


“저런 건 하고 다니지 마시지요. 안 어울리는군요.”

“안 어울리지 않던데요.”

“스승님.”

“그럼요. 전 꽃보단 새지요.”

다 큰 제자 비위 맞추기가 이리도 어려울 수가 있나. 억지로 웃으면서 말하자 제자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이 머리 장식이 잘 어울립니다.”

“저…… 그런데 폐하께서 또 저 머리 장식을 하고 오라 하시면…….”

“제자가 밟아서 박살 났다고 하십시오.”

“그랬다가 폐하가 또 벼루를 던지면 어쩌지요?”

제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제자리로 가며 말했다.


“제자는 스승님을 그리워하며 평생 수절하겠습니다.”

“!”

이 나쁜 놈!

* * *

제자의 신뢰할 수 없는 발언을 들은 후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월무궁 정문과 큰길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반절 정도 왔는데 그곳에 린화가 사가 궁녀인 월미만 데리고 서 있었다.


“린화야?”

쟤가 왜 저기 있지? 의아하지만 일단 가까이 다가갔다.


“월무궁에 가던 길이야?”

린화는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아니. 내가 거길 왜 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게.”

그렇지. 월무궁에는 거주하는 비빈이나 황녀가 아무도 없으니까.


“너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린화가 눈짓하자 월미가 들고 있던 상자를 내게 내밀었다.


“뭐야?”

받아서 상자 뚜껑을 열어보니 안쪽에 맑은 초록빛이 나는 옥지환이 들어 있었다.


“예쁘네. 근데 이게 왜?”

“황후마마가 너 주래.”

황후가?


“황후가 왜?”

우리 그럴 사이 아닌데? 황후 이름이 나오자마자 바로 의심부터 든다.

황후는 뒷배 없는 13황자인데도 무시하지 않고 견제하려 나를 붙였으며, 심지어 혼담까지 추진하는 어마어마한 일을 벌였다.

그뿐인가. 자기 뜻대로 일이 되지 않자 내가 여인이란 소문을 대번에 내버리기까지 했다.

회귀 전 황후는 황자들만 황위를 차지하는 이 나라에서 자신의 딸을 거의 황제에 가깝게 만든 대단한 지략가였다.

수상해…… 수상해.


“몰라.”

린화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자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나한테도 주셨어. 너한텐 직접 주기 좀 그렇다고 나한테 전해주라 하신 거고.”

린화의 손가락에도 나와 비슷한 옥가락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손을 도로 거두어들이는 린화의 눈이 돌연 가늘어졌다.

‘선안이랑 9황녀가 사이가 좋아서 네게 선물하는 거 아냐?’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기 싫은 표정이었다. 사이가 나빠도 자매는 자매라 속내가 훤히 보이는구먼.


“알았어. 고마워.”

어쨌든 황후의 선물을 거부할 수도 없는지라 나는 상자 뚜껑을 도로 덮었다. 양손에 선물이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부모님한테 전할 말은 없고?”

“없어. 근데 손에 그거 뭐야?”

그런데 작별 인사를 하는 나를 린화가 붙들고 물었다.


“꽃이야?”

린화가 내 손에서 황제가 준 목련 장신구를 가져갔다.


“어.”

나는 일부러 얼버무렸다.

린화는 나 한정으로 감정이 폭발적이다.

내가 느끼기에도 황제가 나한테 저 장신구를 준 게 좀 찝찝한데, 린화가 알게 되면 과한 망상을 펼치며 더 난리 부릴지도 몰랐다.

그런데 별말을 안 했는데도 린화 표정이 저리 굳어지는 거지? 찝찝한데? 피해야겠다.


“야 나 이제 진짜 가야겠다. 선, 선지랑 약속이 있어서.”

나는 아무 이름이나 둘러대고서 린화의 손에서 장신구를 도로 낚아챘다.

그러나 린화는 손을 쏙 피하고서는 목련 장신구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거 폐하가 주신 거 아니야?”

맞는데 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심상치가 않다. 머릿속에 경고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황후가 나한테 옥지환을 보낼 때부터 느껴졌던 불안감이 당장 도주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맞는 거 같은데?”

하지만 내가 뒤로 반걸음 물러나기도 전에 고개를 드는 린화의 표정은 이미 흉흉해져 있었다.

잠시 허공에서 우리는 시선이 마주쳤다. 뭘 생각하는 건지 린화의 낯빛이 순식간에 피가 다 사라진 것처럼 하얘졌다.

이러다 어마어마한 오해라도 할까 봐 나는 린화의 귀를 끌어다가 속삭였다.


“내가 13황자 전하랑 혼담이 오갔잖아. 그거 때문에 주셨어. 예비 며느리한테 주는 선물 이런 거.”

꽤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린화는 나를 밀쳐냈다. 그러고는 눈에 불을 켜고서 흉흉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오해를 한 건지 오싹할 만큼 적개심 가득한 눈길이었다.


“소주?”

월미도 놀라서 린화를 불렀다.


“린화야? 너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아니니까 엉터리 오해하지 마. 네가 이 머리 장식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됐는지, 내가 이걸 가지고 있을 때 왜 하필 네가 나한테 심부름을 오게 된 건지 생각해.”

웬만한 말은 듣지도 않겠다 싶어서 일부러 확실하지도 않은 황후 이야기까지 꺼냈다.

실제로 나는 린화가 왜 저렇게까지 과한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얘가 나에 관련되면 좀 자극적으로 변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안색 변화가 너무 심했다.


“알아.”

린화는 표정과 달리 비교적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무슨 소용인데?”

월미가 나와 린화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소주?”

나는 린화를 월미에게서 조금 떨어진 쪽으로 끌어당기고서 귀에 대고 작게 항의했다.


“비약해서 상상하지 마. 그냥 폐하가 선물 하나 하신 거잖아.”

“너도 찔리는 게 있으니까 구구절절 해명하는 거 아냐?”

“네가 표정이 엄청나게 심각하니 그러는 거지. 게다가 황후는 이전에도 우리 비밀을 폭로한 전적도 있으니까.”

“우리 비밀이라니. 네 비밀이겠지.”

린화는 나를 밀쳐내고서 월미에게 다가가며 지시했다.


“가자 월미야.”

린화가 앞장서 걸어가자 월미가 나와 린화를 초조하게 번갈아 보았다.

월미는 내게 작게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하고서 얼른 제 주인을 따라갔다.

* * *



“소주, 소주! 괜찮으세요?”

월미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린화를 따라갔다.

린화는 말도 하지 않고서 좁은 길을 멈추지 않고 걷다가 대화원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아무도 다니지 않는 곳까지 걸어간 린화는 안쪽으로 움푹 파여서 눈에 띄지 않는 수풀을 발견하자 그 안으로 파고 들어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참았던 눈물이 바로 흘러나왔다.


“소주……?”

월미는 겁먹은 얼굴로 린화의 앞에서 서성거렸다.

린화는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나한테는 하지 말라 했어.”

“네?”

“목련 장식. 안 어울리니 하지 말라고 했어. 폐하가.”

린화는 황제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는 린화의 얼굴을 보며 요화와 닮았다고 했다. ‘생각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이라고 덧붙이면서.

그래서 린화는 황제가 자신을 궁금해하고 있었다고 착각했다.


“폐하는 요요화가 마음에 든 거야.”

“예에?!”

월미가 펄쩍 뛰었다.


“우리 소가주님은 사내신데요?!”

“그래서 날 부른 거야. 요요화를 대신해서.”

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요요화가 내 인생을 망쳤어.”

월미는 겁이 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런 말은 밖에서 말하다가 자칫 큰일 날 수 있었다.


“얼른 돌아가요, 소주.”

월미가 린화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얼른요. 소주가 여기서 우는 걸 보면 다른 사람들이 우습게 볼 거예요.”

린화는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고 물었다.


“9황녀가 어디서 지내더라?”

“예?”

 

* * *



“요 귀인?”

화중전으로 찾아가자 갑작스러운 방문인데도 9황녀는 밝게 웃으며 달려 나왔다.


“어제 보고 오늘도 또 보네요?”

린화는 거처에서 가져온 상자를 9황녀에게 건네며 웃었다.


“저희 가문에서 만든 찻잎을 담았어요. 전에 폐하께서 맛보시고 마음에 들어 하셔서 황녀 전하께도 드리고 싶어서요.”

9황녀는 린화의 팔짱을 끼고서 손님방으로 데려가며 밝게 웃었다.


“그럼 우려오라고 해서 같이 마셔요. 이걸 주려고 온 거예요?”

“네. 알려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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