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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신년일을 앞두고 (63/159)


63화. 신년일을 앞두고
2022.10.06.



 


“황제 폐하 납시오!”

작은 난로 앞에 앉아 집의 따스한 규방을 그리워하던 린화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이게 무슨 소리야?”

린화는 월미에게 물었다.


“폐하가 원비한테 간단 거야?”

“모르겠어요.”

월미는 고개를 젓고서 얼른 문가로 달려갔다. 문을 빼꼼 열고 고개를 내민 월미는 이쪽을 향해 동실동실 떠오는 여러 개의 등롱을 발견했다.


“여기에요!”

월미는 작게 소리치고서 다급히 린화에게로 달려왔다.


“폐하가 여기로 오고 계세요!”

린화는 벌떡 일어나서 제자리에서 걸었다. 황제가 오고 있다고? 폐하가?


“태, 태감이, 태감이 와서 폐하 침실로 날 데려가는 거라고 들었는데?”

린화는 입궁하기 전 사가에서 상궁에게 배운 내용을 떠올리며 머리를 붙잡았다.


“그럼 동침하러 오는 건 아니신가 봐요!”

월채가 아는 척하자, 린화는 ‘그런가?’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월우가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서 흐트러진 린화의 머리에서 아예 장신구를 뺀 다음 손을 집어넣어 머리카락이 넓게 퍼지게 했다.

월우는 집게처럼 된 목련 모양 장신구를 집어서 린화의 옆머리에 꽂아주었다.

거의 동시에 문이 덜컥 열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린화와 궁녀들은 황제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서 허둥지둥 무릎을 굽혔다.


“일어나라.”

린화는 몸을 일으키면서 황제를 슬쩍 살폈다. 동초일에 처음 본 황제는 그날처럼 아름다웠다.

황제와 눈이 마주치자 린화는 거울을 보며 연습한 미소를 지었다. 귀부인들은 린화가 그렇게 웃을 때면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감탄하곤 했다.

* * *



“네 방에는 물건이 많이 없구나.”

다음날 아침. 궁녀들이 바쁘게 아침 식사를 차리는 동안 황제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린화는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말없이 손을 꼬물거리다가 슬쩍 월미에게 눈치를 주었다.


“물건이 많이 없는 편인가요? 사가에서 여러 가지 혼수품을 가져오셨지만, 어느 정도로 꾸며도 될지 몰라서 받은 물건으로만 안을 장식하였습니다, 폐하.”

월미는 황제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슬쩍 돌려 말했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린화는 슬그머니 웃었다. 이제 원비와 그 궁인들이 이쪽에 와야 할 물품을 함부로 빼돌리진 못할 것이다.

언제 또 황제가 찾아와서 ‘물건이 적다’고 지적할지 모르니까.

궁녀들이 접시를 다 내려놓고 물러서자, 황제가 식사를 하기 위해 소맷자락을 살짝 걷었다.

린화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감자조림 한 조각을 집어 황제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그러고서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황제는 눈살을 찡그렸다.


“폐하께서는 누가 뭘 드시라 권유하는 걸 싫어하십니다.”

황제의 아침 옷을 들고 새벽부터 찾아왔던 송 태감이 싹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린화는 민망해져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사가에서 가져온 음식이라 폐하께 맛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신첩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러고서 린화가 접시를 바꾸어 드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요씨 가문에서?”

황제가 중얼거리더니 린화가 덜어준 감자조림 하나를 집어 먹었다.

드문 일인지 송 태감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맛있군.”

황제의 칭찬에 린화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평소에 집에서 먹는 찬인가?”

“네, 폐하.”

“짐이 좀 받아 갈 수 있나?”

그뿐만 아니라 황제는 실제로 찬거리를 달라고까지 말했다.

폐하가 날 많이 좋아하시나 봐. 린화는 얼굴이 붉어져서 얼른 월미에게 말했다.


“가져온 감자조림을 전부 다 드려.”

“네, 소주.”

월미가 신이 나 나가자, 린화는 만족스럽게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자 린화는 월채가 가져온 차를 황제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것도 사가에서 가져온 찻잎으로 우린 차예요, 폐하. 청정차인데, 오라버니가 특히 잘 먹어요.”

“요요화가?”

“오라버니 이름을 아시는군요?”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네 오라버니는 신의가 있고 영민하지. 그런 귀여, 귀한 인재는 드물어.”

한 살 차이인 언니가 말단 관직에 있는데도 벌써 황제에게 칭찬을 듣고 기대를 받는단 생각에 린화의 질투심이 한 차례 꿈틀했다.

이젠 언니와 나는 가는 길이 달라. 린화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웃었다.

지금까지는 요화가 남장했단 이유만으로 모든 걸 누리는 게 싫었지만, 이제는 요화가 인정받는 신하가 되는 게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도 좋았다.


“그럼요.”

린화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열심히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떠나기 전. 황제는 린화가 머리에 꽂은 목련 장식을 보며 말했다.


“너는 그 꽃 모양이 어울리지 않는구나. 다른 꽃을 다는 게 낫겠다.”

황제가 떠난 뒤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원비의 태감들이 여러 가지 물품을 바리바리 가져왔다.


“정리가 늦어서 물건 보내는 게 늦었습니다, 소주.”

원비의 태감은 뻔뻔한 변명을 하고서 나갔다.

린화는 그자의 작태에 화가 났으나 그보다는 안심하는 마음이 컸다.


“이젠 원비가 날 무시하진 못하겠지.”

 

* * *

하루 종일 누워 있으면서 약을 먹고 푹 쉬었더니 아침이 되자 조금 기력이 생겼다.

궁녀가 가져다준 죽을 반 그릇 정도 먹은 뒤. 나는 집에 돌아가기 위해 태감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왔다.


“제가 업어드리지 않아도 될까요?”

“괜찮다 괜찮아. 이제 좀 기력이 생겼어.”

어제는 오늘보다 더욱 아팠지만 그래도 월무궁까지는 걸어왔다. 오늘도 집까지는 돌아갈 수 있을 거다.

태감이 꾸벅 인사를 했고, 나는 집에 가져갈 약재 보따리를 들고 황궁 외문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누군가 옆으로 다가오며 내 보따리를 들어올렸다.


“전하?”

그새 따라온 제자였다. 어제 이상한 질문을 퍼붓고 가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마차를 불러 두었으니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거기까지만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제자는 덤덤하게 말했다. 어제 이상한 질문을 해댄 사람 같지 않게 평온한 어조였다.

의아했지만 어제 일은 입에 담고 싶지 않기에 나는 그저 조용히 걷기만 했다.

황궁의 측문으로 밖으로 나오자 제자의 또 다른 태감이 한 마차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제자는 내가 그쪽으로 가기 전 말을 꺼냈다.


“어제 부황이 요 귀인의 처소로 가셨답니다.”

“예?”

제자는 더 설명하는 대신 내게 보따리를 넘겨주었다.


“궁금해하실 거 같아서요.”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보따리를 끌어안은 채 멍하게 있다가 황제가 준 목련 장신구를 품에서 꺼내어 쳐다보았다.


“…….”

황제가 린화를 찾아갔으니 원비도 이제 린화를 괴롭히진 않겠지. 린화도 조금 걱정을 덜 거다. 잘된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할까.


‘의미 없이 주신 거겠지?’

 

* * *

내가 며칠 동안 꼼짝없이 방 안에서 머물며 몸을 회복하는 사이. 가족들은 신년일을 앞두고 준비에 분주했다.

문을 닫고 있는데도 집 안 전체가 소란스러운 걸 알 수 있었다.


“올해부터 린화 애기씨는 궁전에서 신년일을 보내시겠네요.”

내 시비인 월섬은 궁전에서 가져온 약을 뜨겁게 달여 가져다주며 말했다.

나는 그녀가 준 약사발을 받아 후후 불다가 물었다.


“아쉬운가 봐?”

“원래도 네 식구뿐이었는데 이젠 셋이 되었으니까요. 사람이 더 적어져서 그러지요. 빨리 우리 소가주님도 장가가셔서 식구들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월섬의 말은 정말이었다.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는 밖이 충분히 분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이 좀 회복되어서 밖으로 나와 보니, 린화 한 사람이 빠진 것뿐인데도 확실히 작년만큼 북적북적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높이 매달지 않은 긴 종이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돌아다니다가 지쳐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요화야. 전하께서 어차피 곧 신년일이니, 이왕 쉬는 김에 푹 쉬고 수업은 신년일이 끝난 후에 하자고 하시는구나.”

저녁에는 아버지가 찾아와서 제자의 전언을 전해주었다.


“그 말을 하면서 화난 기색은 없던가요?”

제자가 이렇게 배려심 좋을 인간이 아닌지라 의심스러웠으나,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진 않던데.”

하지만 막상 신년일 당일이 되니 집 분위기는 월섬이 우려한 만큼 썰렁하진 않았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긴 종이는 작년처럼 높게 매달렸고,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첫눈으로 내렸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바닥에는 눈이 쌓이지 않았지만, 고개를 들면 지붕 위가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집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고향이 가까운 사람은 고향으로 갔지만, 고향이 먼 사람은 그냥 여기에 남아서 서로서로 인사를 하고 돌아다녔다.

요씨 가문의 친척들도 작년보다 더 많이 인사 와서 린화 이야기를 묻고 갔다.


“소가주님. 선안 도련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소가주님. 9황녀 전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어요!”

“소가주님. 6황자 전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소가주님. 2황자 전하께서 보내신 선물이 왔습니다!”

“소가주님. 13황자 전하께서 보내신 선물을 어디에 둘까요?”

게다가 이게 무슨 일인지 황족들이 바리바리 내게 선물을 보내기까지 했다.

제자야 그렇다 쳐도 9황녀, 2황자, 6황자는 회귀 전에는 이런 사이가 아니었는데.

린화 안부를 물으러 온 친척들은 황족들이 보낸 선물이 우리 집으로 이것저것 들어오자 입을 쩍 벌리고서 정신없이 구경했다.


“가주님, 요화가 황족들께 큰 신뢰를 얻고 있나 봅니다.”

친척들이 건네는 말에 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자랑했다.


“그럼. 우리 요화가 싹싹해서 윗전들이 많이 신뢰하시지.”

하지만 황족들이 보낸 선물들 사이에 정점을 찍은 건, 태감 네 명이 질서 있게 서서 가져온 황제의 선물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요 대인께 이 선물들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태감들은 보석으로 치장한 화병과 햇빛을 받자 반짝거리는 비단, 백금색 새 모양의 문진,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를 각기 내게 건넸다.

상자 뚜껑을 열어보니 안에는 어마어마하게 부드러운 털로 만든 붓이 들어 있었다.


“폐하께서 린화를 마음에 들어 하시나 봅니다.”

인사 온 친척들은 아버지에게 속삭였다. 아버지 역시 기쁜 얼굴이었다. 황제가 보낸 선물에 당혹스러워하는 건 나뿐인 듯했다.


‘내가 뭘 했다고 이런 선물들을 보낸 거지?’

9황녀가 보낸 선물은 중매쟁이에게 보내는 선물이니 일종의 장난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황제가 보낸 선물들은 하나같이 쓸모도 있고 귀한 선물들인데…….

이렇게 선물을 받고도 싱숭생숭 한 탓에 나는 심부름꾼을 선씨 가문으로 보내 선안을 불러오라 했다.

선안과 놀면서 이름 모를 꺼림칙함을 떨쳐버릴 셈이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선안 도련님은 9황녀 전하의 공식 정혼자라 황실 행사에 참석하신답니다.”

하지만 심부름꾼은 선씨 가문에 다녀와서 이런 말을 전했다.

신년일에는 황실에서도 식구들끼리 모이는데, 정혼이 확실해진 이들도 그 자리에 초대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그 이야기를 듣자 이번에는 명확한 이유로 불안해졌다.


‘그러면 린화랑 선안이 연회장에서 마주칠 거 같은데. 괜찮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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