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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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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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022.10.03.
초감은 운월국의 고명한 학자가 새로이 만들었다는 의서를 읽으며 쓸만한 내용이 있나 확인해보고 있었다.
“대인, 대인.”
그때 13황자의 태감 하나가 달려오더니 곧장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13황자 전하께서 대인을 얼른 모셔오라 하십니다.”
어디가 아픈 건가? 몸이 안 좋은가? 태감은 진료 가방을 챙겨서 월무궁으로 뛰어갔다.
“이쪽입니다!”
초감은 황자의 서재로 들어가 거기에 딸린 작은 곁방에 들어갔다.
그러나 13황자는 뜻밖에도 멀쩡히 침상 곁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누군가를 살피고 있었다.
침상에 누워 있는 건…… 황자의 스승이었다.
“전하? 요 대인이 아픈 겁니까?”
당황해서 묻자 13황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스승의 팔을 가져다 무 건네듯 내밀며 지시했다.
“얼른 살펴라. 갑자기 쓰러져서 의식이 없다. 숨소리가 거칠어.”
“…….”
초감은 한숨을 내쉬고서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 * *
“온병이로군요. 이 정도면 몸이 계속 안 좋았을 텐데요.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건지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차가운 쇠 같은 게 이마에 닿았다 떨어지더니 손목에 따끔따끔하고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다.
“내가 불렀다.”
“예? 전하께서요? 아니, 왜요?”
“꾀병인 줄 알았다.”
“제자놈…….”
이 목소리. 제자놈 목소리 같은데? 나는 조용조용한 목소리에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애써 집중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신이 다시 흩어지려 할 즈음,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났다.
“방금 이국사께서 전하를 제자놈이라 부른 겁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 내 정신을 늪에서 끄집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이 훤해졌다.
눈을 뜨고서 얼른 몸을 일으켜보니 바로 옆에 제자와 어의 초감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이런. 안 됩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려는데 초감이 나를 도로 눕히며 당부했다.
“팔에 침 꽂아 놨습니다.”
“예?”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내 팔 위에 뾰족뾰족하게 자라난 은침들을 발견했다.
“으아.”
보는 것만으로도 아파서 한탄하자 초감은 괜찮다는 듯 웃고서 물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요 대인?”
“몸, 몸은 괜찮습니다.”
문제는 정신이 들기 전 내가 희미하게 제자를 제자놈이라 부른 것 같단 건데…….
나는 슬쩍 눈만 굴려 제자를 확인했다. 다행히 제자는 크게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다행이야. 제자님이라 들었나 봐.
하여튼 제자님이든 제자놈이든 아무 말도 안 한 척 굴자. 몰라. 내 무의식이 한 말이니 나는 모르는 거야.
“어떻게 된 건가요?”
나는 일부러 목소리에서 힘을 쭉 빼고서 물었다.
초감은 내 팔을 잡더니 은침 하나를 집으며 대답했다.
“이국사께서 쓰러졌다고 전하께서 급히 절 부르셨지요. 온병인 걸 알고 계셨습니까?”
“예에…….”
나는 다시 눈을 굴려 제자를 보았다. 그러다 나를 내려다보는 제자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사나흘은 푹 쉬어야 합니다.”
초감은 내 팔에서 은침을 쏙쏙 뽑아내며 말했다.
“소인이 처방한 약재를 이쪽으로 보낼 테니, 하루에 세 번 식사 후에 꼭 드시고요.”
“네에. 네에.”
초감은 은침을 다 뽑더니 성긴 천 위에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전하께서 요 이국사가 쓰러진 일로 많이 놀라셨습니다. 한 시진째 저렇게 앉지도 않고 이국사를 간호하고 계시지요.”
“예?”
“전하를 위해서라도 건강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게 좋겠습니다, 대인. 대인은 너무 자주 아프네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자주 아픈 원인이 누구인데? 회귀 전에 나는 이 시기에 아주 건강했다고.
전에 내가 크게 아팠던 건 황제가 던진 벼루 때문이다.
이번에 내가 크게 아픈 건 원인은 비를 맞은 것이지만, 제자에게도 약간의 지분이 있다. 그가 내 병을 꾀병이라 여기고서 오라고 강제로 지시했지 않았나.
하지만 초감은 정말로 제자가 나를 아주 염려했다고 믿는 표정이었다.
처방전을 적어주면서도 초감은 그런 비슷비슷한 당부를 내게 계속해서 퍼부었다.
누가 제자의 측근이 되는 어의 아니랄까 봐 얼마나 잔소리가 심했는지 모른다.
덕분에 나는 제자와 한 방에 있는데도 어색한 걸 느끼지 못하다가, 초감이 가버리고 제자와 둘만 남자 급격히 민망해졌다.
나는 이불을 쥐고 꼼지락거리다가 슬쩍 제자의 눈치를 또 살폈다.
제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물었다.
“제가 미우신지요?”
“예?”
제자가 또 화를 내진 않으려나 걱정하고 있다가 나는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밉냐니?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세요?”
제자는 이상한 질문을 던져 놓고서, 막상 내가 되물으니 덤덤하게 몸을 돌렸다.
그가 약사발을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약을 한 그릇 다 마시자 그는 빈 그릇을 가지고 나갔다.
그 상태로 얼마나 얼떨떨하게 있었을까. 슬며시 의심이 올라왔다.
혹시 아픈데 수업하러 오라고 한 게 미안해서 저러나?
나를 증오하는 제자가 내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리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평소처럼 못된 말을 퍼붓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게 의심스러웠다.
나는 침상에서 조심조심 일어난 다음 밖으로 나가 보았다. 제자가 화내지 않고 저렇게 돌아다니니 영 신경 쓰여.
나 없는 데서도 화를 안 내고 있나 확인하고 싶었다.
“더 누워 있으시지요.”
하지만 내가 누워 있던 방에서 세 걸음 정도 걷자마자 바로 제자가 안으로 들어오며 당부했다. 가지고 나갔던 빈 그릇은 어디에 둔 건지 보이지 않았다.
“전하가 신경 쓰여서요.”
제자는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부축하듯 나를 뒤에서 한쪽 팔로 감쌌다.
“초감이 스승님은 푹 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지내세요. 내일 마차를 불러 드리지요.”
괜찮다고 거부할 새도 없이 나는 내가 나온 그 방에 다시 들어가 침상에 앉게 되었다.
제자는 내가 도로 눕도록 하고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당황해서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그가 이번에는 물수건을 만들어와 이마에 올려 주었다.
그 빠릿빠릿한 움직임에 휩쓸리다가, 그가 나가려는 걸 보고서야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
“전하.”
제자는 문가에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용기를 쥐어짜 물었다.
“화는 풀리셨어요?”
여기서 하루를 지내는 건 곤란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으니, 무리해서 나가겠다고 우겼다가 또 쓰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자가 아직도 화나 있는지 아닌지는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아직도 화나 있다면 내가 잠든 사이에 독약을 먹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의원을 불러준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작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
제자는 대답 대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 안 풀렸나? 자기 방에서 쓰러졌으니 챙겨주긴 했지만 여전히 화가 나 있나?
젠장. 그놈의 목련 장신구. 어차피 꽂고 다니지도 못할 텐데 이래저래 원흉만 되는구나.
그런데 뜻밖에도 제자가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왜 오는진 모르겠지만 꺼림칙해서 상체를 뒤로 빼고 있으려니, 제자는 머리맡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거 너무 가까이 앉는 거 아니세요……?
편하지 않은 자리 배치에 쩔쩔매고 있자니 제자가 물었다.
“대체 뭘 원하시는 건지요.”
“예……에?”
나는 제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일부러 말을 끌면서 물었다.
화났냐고 물었는데 뭘 원하냐고 되묻다니. 왜 갑자기 질문이 거기로 간 거지?
물론 제자에게 원하는 게 있긴 하다. 그가 날 죽이지 않고 장수하게 두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물어보는 건 아닐 거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신은 잘…….”
“대체 스승님이 원하는 게 무엇이기에 이 제자는 드릴 수 없는 건지 궁금합니다.”
“예?”
“무엇입니까. 스승님이 원하는 것. 이 제자 빼고 모두가 다 스승님께 드릴 수 있는 것. 대체 뭡니까. 대체 그게 무엇이기에 매번 남들에게는 잘도 넘어가면서 이 제자에게만 쇠처럼 구십니까.”
나는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다. 제자가 하는 말을 정말로 단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서로 같은 나라 말을 하는데도 말이 이렇게 안 통할 수가 있다니.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는 내가 자기 말에 대답하지 않아서, 우리는 서로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문 너머에서 태감들이 시간을 알리느라 내는 나무판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쯤 되었으면 물러날 만도 하건만. 제자는 내게서 반드시 대답을 듣고 말 생각인지 꾸준히 인내심을 발휘했다.
“제가 원하는 건 전하만 주실 수 있습니다.”
결국, 제자의 의도는 생략하고 그냥 내 관점에서 그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내가 원하는 건 네놈이 날 죽이지 않는 거다.
제자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내 말을 알아들었나?
“무슨 뜻입니까.”
못 알아들었구나.
“똑바로 이야기하시지요.”
게다가 자기는 모호하게 말해 놓고서 나더러는 똑바로 이야기하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돌아누워서 그의 시선을 피한 다음 이불에 몸을 웅크렸다.
“스승님이 무슨 고양이인 줄 아십니까? 머리만 숨긴다고 다가 아닙니다.”
제자가 이불 밖에서 차갑게 빈정거렸으나 나는 몸을 더욱 웅크리고서 모른 척했다.
“스승님.”
제자의 목소리가 냉엄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버텼다.
야옹이다 이놈아.
얼마나 이 상태로 버텼을까. 이불 너머로 한숨 내쉬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뒤. 발소리가 멀어지고서 문 여는 소리가 났다.
제자가 내게 대답을 듣지 못할 것 같자 포기하고 돌아간 듯했다.
그제야 안도하고서 이불을 살그머니 내렸는데 웬걸. 제자는 여전히 앞에 서 있었다.
“!”
기겁해서 다시 이불에 들어가려 했으나 이번에는 제자가 더 빨랐다.
그는 이불을 위쪽으로 들어 올려서 내 도주로를 차단해버리고는 나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이불을 내리라 할 수도 없고 제자에게 ‘내가 바라는 건 네가 독주 안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나는 막막하게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여전히 머리는 혼잡했다. 난 그냥 제자가 화 풀렸는지 물어보았을 뿐인데…… 왜 상황이 이렇게 된 거지?
다행히 제자는 나와 시선을 잠시 마주하더니, 들리지 않는 소리로 아주 작게 중얼거리고서 이불을 도로 내려주었다.
이불이 머리 위에 덮이면서 주위가 까맣게 변하자 나는 도로 달팽이처럼 웅크렸다.
그 상태로 있자니 다시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와 문소리가 들렸으나 이번에는 바로 나가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어보니, 제자는 없고 방 한쪽에 켜져 있던 등불은 꺼져 있었다.
그제야 안도해서 나는 이불 밖으로 나와 침상에 편안하게 누웠다. 하지만 제자가 무슨 생각인지 통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뭘 원하길래 자기한테 쇠처럼 구냐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던 걸까.’
* * *
스승이 죽어도 복수를 마쳤단 시원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요화가 침상에서 생각에 잠긴 사이. 화려는 뒷짐을 지고 월무궁 뒤뜰을 거닐었다.
그는 독주를 마시고 죽은 스승과 의자에서 쓰러져 있던 스승을 떠올렸다. 두 번의 경험으로 인해 깨닫게 되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스승이 죽기를 바라진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복수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복수를 포기한다고 한들, 그의 배신자 스승이 또다시 그에게 독주를 가져다줄 확률이 높았고.
화려는 남은 꽃잎마저 다 떨어져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매화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