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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얘는 왜 이럴 때마다 (58/159)


58화. 얘는 왜 이럴 때마다
2022.09.19.



 
나는 6황자에게 대충 둘러댄 뒤 집에 가자마자 부모님을 찾았다. 아버지는 아직 퇴궐하지 않아 집에 없었지만, 어머니는 날 보자마자 다급하게 다가와 물었다.


“어때? 린화는 어떻다니? 알아봤어?”

온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걸 보니 말문이 막혀서 입을 열기가 힘들어졌다. 입에 끈적한 꿀이라도 바른 것 같았다. 꿀은 달기라도 하지.


“요화야?”

내가 주저하자 어머니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잘 못 지내는구나?”

예. 정답입니다.


“이제 하루 지났는데 잘 지내고 못 지내고 할 게 뭐가 있어요.”

“그런데 왜 말을 안 하니?”

예리하시네요.

나는 두 가지 갈림길을 앞에 두게 되었다. 하나는 어머니에게 13황자가 린화에게 망신을 주었단 이야기를 사실대로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어머니에게, 까먹고 린화에 대해 13황자에게 안 물어봤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 둘 다 사실은 사실이네. 아씨. 어쩌지?


“음. 실은 어머니.”

“왜 그러니. 그냥 빨리 말하거라. 응?”

결국, 고민 끝에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 사건이 이미 아버지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나중에 린화가 어머니에게 하소연할지도 모르니까.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면 그냥 지금 말하는 게 낫겠지.


“어머니. 옷감 계산하는 날에 13황자 전하가 여기 찾아오신 걸 기억하세요?”

어머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기억하지. 왜 그러니? 전하가 네 발……을 보고 계셨잖니.”

“발도 보셨는데 옷감을 더 자세히 보셨어요. 그리고 전 전하께, 나중에 시집가면 전하 앞에서 그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을 거라고 자랑했고요. 그런데 어제 전하가 보신 거죠. 그 옷감을 걸친 린화를요.”

어머니의 낯빛이 빠르게 변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또 물어보셨다.


“그래도 설마. 고작 그런 거로 한 소리 하셨겠어?”

“한 소리 하셨답니다.”

“린화는?”

“린화가 지금 어떤진 모르겠고요.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어머니는 내 말을 듣자마자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곧 어머니는 이마를 짚고서 눈을 꽉 감고 끙끙 앓기 시작했다.


“우리 린화가 그 성질머리에 지금 속이…… 속이…….”

“어머니도 린화가 성질 더러운 걸 모르진 않으시네요.”

“아이구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저것들을 쌍으로…….”

한참 그러시던 어머니는 손을 확 내리면서 울먹이셨다.


“너도 좀! 전하랑 그런 약조를 했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린화가 옷을 뺏어갈 걸 내가 어찌 알고 그런 말을 해요? 어머니도 모르니까 옷을 안 빼두신 거잖아요.”

그리고 난 제자가 스치듯 한 약조를 그렇게 진지하게 기억했을 줄도 몰랐다고.

어머니는 내 말이 옳다고 여겨지자 더 화가 나는지 다시 앓기 시작했다.


“뭐. 그렇게 됐답니다.”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얼른 일어난 다음, 어머니가 무리한 요구를 하기 전에 바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 * *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간 뒤 탁자에 제자가 준 옷감을 펼쳐보았다. 비슷한 생김새였지만 린화가 가져간 옷감보다 더욱 값비싸 보였다.

슬쩍 만져보자 옷감이 너무 부드러워서 황송하단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아이구 어찌 이런 걸 줄 생각을 했을까.

나는 옷감을 공손하게 접은 뒤 다시 노란 비단으로 싸서 내 보물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미운 건 제자지 비단이 아니니까 잘 간직해야지.


‘하지만 이상하긴 해. 린화한테 성질을 낸 거야 자기 자존심 때문이라 쳐도…… 나한테 선물은 왜 한 거지? 나야 제자한테 잘 보여서 살아남아야 한다지만. 제자는 굳이 나한테 잘 보일 필요도 없잖아.’

 

* * *

그 시각. 6황자의 측근 태감이지만 13황자의 사람이 된 운귀는 13황자의 책상 위에 얇은 나무판을 깔아 놓고, 말린 찻잎을 그 위에서 작고 긴 칼로 잘라내고 있었다.

화려는 평소에는 먹물과 종이 냄새만 가득한 곳에서 풍겨오는 부드러운 풀 향을 맡으면서 요화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전하께선 요 이국사를 무척 신뢰하시나 봅니다?”

그러다 화려는 운귀가 갑자기 뱉은 말에 시선을 올렸다. 운귀가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그를 장난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화려는 단호하게 부정하고서 책을 한 장 남겼다. 운귀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글쎄요. 그런 것치곤 그날 무척 화내시던데요.”

운귀가 말하는 그 날은 새 후궁들이 입궁한 당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운귀는 6황자의 측근 태감이기에 그날 현장에 있었다.


“그럴 리가.”

화려는 이번에도 부인했으나 운귀는 전혀 믿지 않는 얼굴로 웃었다. 그 의뭉스러운 미소를 본 화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올렸다.


“못 믿나 보군.”

“네. 폐하와 마마들 앞에서 대놓고 요 대인을 위해 나서셨으니까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6황자 전하께서는 아주 신이 나셨지만요.”

화려는 그래도 딱 잘랐다.


“난 스승님을 신뢰하지 않아.”

화려가 연이어 세 번이나 부인했는데도 운귀는 전혀 안 믿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더 캐묻는 대신 그는 조용히 작업에 몰두했다.

작은 칼이 나무 도마 위에서 말린 풀을 자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화려는 책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사각거리는 그 소리 사이로 그는 아주 먼 기억 속 처음 만난 날의 스승을 떠올렸다.

당시에도 이곳이었다. 그때는 스승을 사내로 알고 있었다. 그 탓에 화려는 삵 같은 표정을 하고서 나타난 곱고 순한 청년을 보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 순해 보이는 얼굴로, 스승은 절대로 또래 제자에게 얕보이지 싶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입술을 꾹 다물고 들어왔다.

회귀를 거듭해도 그 시절로 회귀하진 않기에 그 모습은 그 역시 단 한 번 본 모습이었다.

화려는 그를 보고 눈이 동그래지던 표정을 떠올리다가 몸을 일으키며 운귀에게 물었다.


“자네가 비번인 날이 언제라 그랬지?”

“이틀 뒤입니다.”

“그럼 그날-.”

 

* * *



“린화한테 가보거라. 응? 가서 잘 지내는지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 와봐.”

“아 며칠 됐다고 벌써 보러 가요. 지금은 한창 정신없겠네요.”

“원래 집 나가면 첫날이 제일 서러운 법이잖니.”

“나중에요. 좀 시기 보고요.”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라 원래 나는 집에서 종일 굴러다니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꾸 방에 찾아와서 린화에게 가보라고 닦달하자, 싫다고 거부하기도 부담스러워서 결국 집 밖으로 달아났다.


‘선안이랑 놀아야지.’

하지만 선안을 찾아가보니 웬걸. 선안은 집에 없다고 했다.


“어휴, 말도 마십시오. 요즘 조각 배우러 다니십니다.”

“조각?”

“예. 이삼 일에 하나씩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걸 조각해 두었다가, 나중에 장가갈 때 챙겨가서 ‘매일매일 그대를 그리며 만들었소’ 이러면서 9황녀님께 드릴 거랍니다.”

선안은 9황녀가 엄청 좋은가 보네. 하긴. 너무 적극적이어서 가끔 기겁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참 귀여운 분이니까.


“알았네.”

결국, 나는 혼자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원래 혼자서도 잘 놀긴 해서 딱히 선안이 옆에 없어도 되긴 했다. 있으면 더 재밌겠지만…….

그런데 혼자 어슬렁거리며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니다가 찻집들이 모여 있는 거리에 왔을 때였다.


“어라?”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휙 들이밀었다. 그 바람에 원치 않게 낯선 이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마주하고 보니 낯선 사람은 아니었다.


‘청양!’

유동백이 무림인이자 암살자라고 알려준 그자! 차라리 낯선 사람인 쪽이 낫겠구나.

나는 너무 놀라서 걷던 것도 멈추고 청양을 쳐다보았다.

사실 청양이 옆에서 접근해 자연스럽게 앞으로 이동해 길을 막아섰기에 이동할 수도 없었지만.

청양은 고의로 다가와 놓고서는 우연히 만나서 놀란 것처럼 아는 척했다.


“전에 거기서 뵌 분이네?”

13황자가 말하는 ‘거기’란 후궁 선발이 이루어지는 화연천 옆의 언덕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래도 나는 모르는 척 미친 인간 보듯 그를 쳐다보았다.


“예? 누구세요?”

그러나 청양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전엔 왜 나 보고 놀랐어요?”

오히려 대놓고 그날 일을 묻기까지 했다. 내가 자신을 알아보고 있다고 확신하는 태도였다.

속으로 욕지거리가 튀어 나갔다.


“제가요?”

한 번 발뺌해 보지만 그리 소용은 없었다.


“네, 그쪽이요.”

청양이 암살자인 데다 손속이 독하다는 걸 알아서일까. 부담스럽고 겁도 나서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저자는 자기가 암살자니까 남의 사소한 행동에 하나하나 더 신경 쓰는 걸지도 몰라.’

“내가 언제 그랬더라……?”

나는 생각이 잘 안 나는 척 머리를 매만지면서 소매로 눈가를 가리고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일 층, 이 층짜리 찻집이 거리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술집보다는 조용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여럿 모인 곳에서는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중 누구도 길거리에 마주 보고 선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서 뛰면 청양을 뿌리칠 수 있을까?’

나는 힐긋 청양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청양은 13황자의 명령을 완수할 때나 짓던 눈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해서든 둘러대지 않으면 떨어질 기세가 아니었다.

결국, 나는 자주 사용하는 무기를 쓰기로 하고서, 바람둥이 행세를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미소를 지었다.


“아아! 생각났습니다.”

그 급격한 미소에 청양이 움찔하자마자, 나는 평소보다 살짝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공자. 실은 공자 얼굴이 제가 아주 좋아하는 용모여서요.”

“어?”

“이렇게까지 취향이기도 쉽지 않다고 생각해서 보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며칠 사이에 이상형이 바뀌어서 못 알아봤네요.”

“!”

“그래도 이렇게 만났으니 기회라 생각하고 잡아야겠네요. 혹시 공자, 집에 누이 있는지?”

실실 웃으면서 묻자, 청양은 미친 인간 보듯 쳐다보았다. 나는 그래도 주위에 사람이 많은 걸 믿고서 꿋꿋하게 개소리를 했다.


“누이 없습니까? 공자 닮았으면 내 이상형일 텐데.”

“뭐?”

“미혼이면 고모나 이모도 괜찮아요.”

씩 웃으면서 한쪽 눈을 찡긋하자, 청양은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내가 이상한 인간이라고 여겨지니 더 말을 섞기도 싫은가보다.

원하는 대로 됐다 싶어서 나도 안도하는데, 그 순간. 청양이 내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올리더니 “어?” 하고 작게 탄식했다. 마치 내 뒤에 선 누군가를 알아보는 것처럼.

그 말을 듣는데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목 뒤에 오한이 들었다. 이 주위만 갑자기 우박이 내리는 느낌이었다.

설마. 설마? 설마 내 뒤에 13황자가 서 있어서 청양이 ‘어?’ 하고 말한 건 아니겠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천천히 고개가 돌아갔다.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의 옷이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리자, 얼음장 같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13황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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