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두 성질머리가 충돌했다 (57/159)


57화. 두 성질머리가 충돌했다
2022.09.15.



 
후궁이 황실 식구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시간이 13황자와 린화의 충돌로 어색하게 끝난 뒤.

13황자는 혼자서 어딘가로 사라져버렸고, 다른 황자와 황녀들 역시 서로 눈치를 보다가 각기 돌아갔다.

린화는 황제가 바로 자신에게 말을 걸 줄 알았으나, 황제는 황후와 함께 둘이서만 가버렸다.

린화는 이걸 보고 조금 놀랐다.

하지만 곧 몇몇 후궁들이 린화에게 다가와 서로 소개하며 인사하고는 그들을 따라오라고 했다.

그들이 린화를 데려간 아리따운 화원의 정자에는 이미 주안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 후궁이 린화에게 살짝 알려주었다.


“이 화원 이름은 운화원이야, 동생. 이 화원 옆에 있는 저 궁이 선한궁이고. 동생은 저기서 원비마마와 함께 살게 될 거야.”

“여기에 원비마마도 계시나요?”

린화의 말에 그 후궁은 미묘한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원비마마는 아까 먼저 들어가셨어. 동생이 이사 들어와야 하니 이것저것 살필 게 많으시겠지. 선한궁의 주인이시니까.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 즈음에 인사드려.”

동그란 상을 앞에 두고 후궁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앉자, 궁녀들이 능숙하게 차를 따르고 술을 따르고 안주 접시를 날랐다.

린화를 따라온 사가 궁녀 월미는 그 모습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신기하기는 해도 너무 어색해서, 월미는 함께 사가 궁녀로 들어온 월채와 월우도 여기에 함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월채와 월우는 린화가 머물게 될 선한궁 우혜전에 집에서 가져온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얼마 뒤. 술이 몇 순배 돌자 어색하던 분위기는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

린화는 여전히 긴장한 채 식사했지만, 먼저 입궐한 다른 후궁들은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말을 걸어왔다.


“너무 속상해하지 말게.”

특히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후궁 순비는 길고 깔끔한 손을 린화의 팔에 놓으며 다정하게 위로했다.


“그래, 동생. 13황자는 원래도 성미가 고약하기로 유명해.”

머리를 땋아서 올린 후궁 겸빈도 린화의 다른 쪽 팔에 친근하게 팔짱을 끼며 슬쩍 13황자를 흉보듯 말했다.


“그런가요?”

린화는 그 말을 듣고서야 조금 마음이 펴져서 되물었다.


“그럼. 어미도 없고 보살펴줄 외가도 없어서 방치되듯 자랐거든.”

현 귀인이라는 후궁은 13황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 좀 비꼬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13황자에게 공개적으로 무안을 당한 린화는 차라리 그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린화는 후궁들 사이에서 너무 모진 성품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민망한 표정만 지었다.


“요씨 가문에서 오는 규수라 해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참한 동생이 와서 다행이야.”

그런 린화가 마음에 드는지 겸빈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린화에게 살짝 몸을 기댔다.


“정말인가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쁩니다.”

린화는 기쁜 듯 말하며 주위를 보았다. 다른 후궁들, 최소한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린화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13황자가 준 망신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을 가엾어하는 후궁들이 생긴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안도하게 될 뿐 기쁜 마음이 들진 않았다. 13황자가 준 망신살은 사라지지 않았고, 황제는 입궁 첫날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후궁들의 이 호의에는 동정도 있겠지만, 입궁할 때부터 파격적으로 봉호와 빈이란 품계까지 받은 태월 장공주 출신 설빈을 경계하려는 계산도 있을 테니 안심할 수 없었다.

* * *

작은 연회가 끝난 늦은 저녁. 월미의 부축을 받아 거처로 돌아온 린화는 일단 이 궁의 주인이라는 원비에게 인사를 올리기로 했다.

원비는 린화를 환영하는 식사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다. 몸이 약하거나 그런 자리를 싫어하는 이일 수도 있었지만,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 인물이 아닐 확률이 더 높았다.

그리고 역시나. 원비의 궁녀는 린화가 다가가자 인사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바로 거절부터 해버렸다.


“우리 원비마마께서는 이미 주무신답니다. 설마 요 귀인, 이런 늦은 시간에 원비마마의 잠을 깨울 생각으로 오신 건 아니겠지요?”

이렇다 보니 린화는 처음으로 침전에 들어왔을 때는 진이 다 빠져서 건물 안을 살필 여력조차 없었다.

드디어 신발을 벗고 긴 의자에 앉자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먼저 처소에 와 있던 월우는 얼른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와 린화의 발을 감싸 주물러주었다.


“좀 괜찮으신가요?”

“응.”

“입궁 의식은 어떠셨어요? 다른 후궁님들과 황친들께선 애기씨께 잘해주세요? 아. 이제 애기씨 아니구나.”

린화는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작게 투덜거렸다.


“괜찮기는. 요요화가 첫날부터 내 발목을 잡았는데.”

월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도련님이요? 도련님은 오늘 여기 안 오셨잖아요.”

“요요화의 잘난 제자가 내가 입고 있는 이 거지 같은 옷. 이 옷이 자기 스승이 입기로 한 옷이라면서 무안을 줬어.”

“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래요?”

“그러니까. 요요화가 이 옷감을 13황자한테 보여주고서 이걸로 자기 옷 만들 거라 했었대.”

“예에?”

린화는 생각해보니 화가 나서 주먹으로 쾅 의자를 내려쳤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나한테 진작 말을 했어야지. 어쩜 입을 쏙 다물고……! 내가 이 옷감을 가져간 게 싫으니까 일부러 엿 먹어 보라고 가만히 있은 거야. 진짜. 끝까지!”

월우는 기가 막혀서 툴툴댔다.


“도련님도 참 너무하시네요.”

발을 꾹꾹 누르는 손길이 좋자 린화는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지금은 너무 지쳐서 화낼 여력도 없었다.

어쨌든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게 될 원비의 태도를 보니, 이곳 생활도 꽤 머리 아플 것 같았다.

* * *

린화가 입궁한 다음 날. 아침 문안을 가자마자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잔소리에 고막이 다 아플 지경이 되었다.


“입궐하거든 꼭 린화가 잘 들어갔나 알아보거라. 알았지? 어제 13황자 전하는 린화를 보았을 거 아니냐.”

“혹시 볼 수 있으면 한번 보고 오고.”

나는 적당히 알겠다고 대답하고서 달아나듯 월무궁으로 들어왔다.

그러고서 수업하는 방으로 갔는데…… 문을 열 때부터 안쪽 공기가 심상치 않더라니. 문을 열자 모습을 보인 제자는 눈빛이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평소엔 내가 오면 일부러 서책 보는 척하면서. 지금은 내가 들어오기도 전부터 날 노려보고 있었다.


“…….”

고민하다가 나는 도로 문을 스르륵 닫았다. 그러고서 뒤로 두 걸음 물러나자마자, 문이 쾅 소리가 나게 열렸다.

목을 최대한 집어넣고서 뒤를 돌아보니, 문을 연 제자가 나를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여기서 내가 ‘뒷간이요’라고 말하면 너무 비참할까? 나는 고개를 빠르게 젓고서 얼른 앞으로 돌아왔다.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동공 커진 고양이 표정을 흉내 내자, 그제야 제자는 흠칫하더니 홱 돌아서서 자기 자리로 갔다.


‘내가 눈이 예뻐서 다행이야.’

안도해서 나도 얼른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하지만 제자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도 여전히 흉흉한 눈길로 날 쳐다보았다.

결국 나는 그 무언의 질시를 견디지 못하고 책을 몇 장 넘기다가 물었다.


“왜 아침부터 스승을 노려보고 그러세요?”

“궁금해서요.”

“뭐가 그리 궁금하신데 노려보시는데요?”

“우리 스승님이 가문에서 구박을 받으시는 건지, 스승님의 동생이 스승님보다 권력이 세서 마흔 벌이나 있으면서 한 벌 옷까지 뺏어가는 건지, 스승님이 이 제자에게만 매섭게 굴고 사실 남들에겐 기도 못 펴는 등신이신지, 아니면 저와 한 약조는 가볍게 넘길 정도로 이 제자를 우습게 보시는지.”

“예? 제가 등신이라구요?”

“……그것만 들으셨습니까.”

아니, 그야 다른 말은 아예 이해가 안 가는 수준이니까.

나는 잠시 멍하게 멍하게 쳐다보다가 솔직하게 물었다.


“남의 가정사를 왜 그렇게…… 복잡하게 상상하세요?”

제자는 먼저 남의 집안을 이상하게 표현해 놓고서 자기는 한 치의 잘못도 없다는 것처럼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어휴 적반하장. 웬일이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넋을 놓고 같이 눈을 맞추고 있자니, 제자는 탁상을 툭툭 두어 번 두드리다가 자기 앞의 서책을 펼치며 말했다.


“수업이나 하지요.”

저 새끼. 교묘하게 나한테 욕하고 넘어가는 거 같은데.

* * *

수업이 끝난 뒤. 꾸벅 인사를 올리고 나가는데 제자가 주섬주섬 뭘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뭐예요?”

받고서 보니 연노란 비단으로 싼 무언가였다. 안이 흐물흐물하고 꿀렁꿀렁한 걸 보니 칼은 아니로구먼.

촉감은 꼭 옷 같은데 이놈이 내게 옷을 건넬 리는 없으니…….


“문어예요?”

미심쩍어서 묻자 제자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차갑게 말했다.


“스승님 정신 상태입니다.”

뭐야?


“꼭 끌어안고 돌아가서 펼쳐 보시지요.”

나는 월무궁 밖으로 나가 걸어가다가 제자가 못 볼 거리에 가자마자 바로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이상한 거면 집에 가져가면 안 되지!

그런데 보따리 안에서 나온 건 손도 대면 안 될 것 같은 새하얀 비단이었다.

양을 보니 옷감용 같았는데, 비단 끄트머리에는 금색으로 예쁘게 문양이 잡혀 있었다.


‘이거…… 린화한테 뺏긴 내 옷감이랑 얼추 비슷해 보이는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아까 제자가 늘어놓던 말도 안 되는 질문들이 머리를 줄줄 지나갔다.

아. 혹시 어제 입궁 행사 때 린화가 그 옷감 입은 걸 보고서 그러나?

아니, 그런데 그 옷감이 내가 고른 옷감인 건 어찌 알았대? 처음부터 비슷한 옷감이 두 개일 수도 있잖아?

게다가 약조는 대체 무슨 말이지?


‘아. 그러고보니 부모님이 린화가 잘 지내나 알아보라 했는데. 깜빡했다.’

뭐 별일 있었다면 어차피 제자가 알아서 말해주었겠지만.

나는 옷감을 도로 겉 비단에 넣어 끌어안고서 월무궁 방향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제자는 내가 옷감 하나 못 지켜내는 멍청이라고 생각해서 옷감을 준 모양이다.

하긴. 제자는 회귀 전에도 내가 어디서 무시 받고 오는 건 싫어하긴 했다.

그도 그럴게, 우리가 서로를 싫어하건 어쨌건 외부에서 우리는 사제 간이다 보니 한 쌍으로 취급되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래서 기분이 상했나 봐…….


‘그래도 준 거니까 받아야지. 아니 근데 얘는 이 시기엔 돈도 없으면서 이걸 어떻게 구했대?’

그런데 보따리를 안고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쪽으로 6황자가 걸어오기에 얼른 인사를 올리는데, 6황자가 인사를 생략하더니 다짜고짜 나를 길 변두리로 끌어당겼다.


“전하? 전하?”

의아하지만 졸졸 따라가자, 6황자는 그제야 내 팔을 놓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요 이국사. 혹시 어제 사건에 대해 아나?”

“어제 사건이요? 어제 전 입궐하지 않아 모르겠습니다, 전하.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자네 누이…….”

나는 놀라서 다급히 물었다.


“린화가 왜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제자가 별말 없었으니 당연히 큰일 없었을 거라 여겼는데. 6황자의 말에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요린화, 설마 성질머리를 드러내다 윗전에 걸렸나?

6황자는 나를 미묘한 표정으로 보더니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셋째가 자네 누이, 아니, 요 귀인한테 한소리를 했다네.”

“예? 13황자 전하가요?! 뭐라 하였습니까?”

나는 더욱 충격받아서 심장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요린화, 13황자한테는 납작 기어서 살아야 할 판에 대체 첫날부터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열셋째 말로는, 자네랑 자기가 둘이서 시침하고 고른 의상을 요 귀인이 뺏어갔다던데.”

“!”

이…… 제자가 그래서 아까 약조 운운했구나! 아니, 그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니, 이걸 어째야 해.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집안 망신이야!

6황자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


“정말인가?”

이거 물어보려고 날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