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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입고 오기로 했는데 (56/159)


56화. 입고 오기로 했는데
2022.09.12.



 


“요화야, 아니 린화야. 그건 요화 거야.”

얼마나 놀랐던지 어머니가 이름까지 꼬아서 부르신다. 린화는 좋아서 거울을 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단 얼굴이었다.


“요요화 거라고요?”

“그래. 그러니 다른 거로 입고 와 볼래? 아까 보니 그 붉은빛 나는 옷이 참 예뻐 보이더라.”

린화는 어머니에게 떠밀리듯 곁방으로 걸어가다가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드는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앉았다.

어머니가 초조하게 마주 앉자 린화는 나를 한번 날카롭게 째려보더니 어머니에게 항의했다.


“왜 제 옷 사이에 얘 옷이 있는데요?”

“네 옷은 마흔 벌이나 새로 맞추었잖니. 이왕 만드는 김에 요화 것도 하나 더 만든 거지.”

“이왕 만드는 김이라고요?”

그러나 린화는 그 말에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더니, 나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어진 목소리는 한결 낮아져 있었다.


“제 입궁은 제가 주인공인 날이에요. 사가 여인들로 치면 혼례식 날이나 마찬가지라고요. 그런데 거기에 요요화 옷을 같이 넣어 준비하셨다고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난다는 듯 린화는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나중에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새빨개져서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끝까지 우리 집 주인공은 요요화네요. 제가 시집가는 날에 조차도요. 제가 시집가는 날에라도 절 주인공으로 해주면 안 되는 거예요?”

어머니는 얼른 손을 뻗어 린화의 두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이 그러니. 그냥 준비하는 김에 한 벌 더한 것뿐인데. 네 옷은 마흔 벌이잖아.”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는 기가 막혀서 끼어들었다.


“그럼 마흔 개를 날 주고 한 개를 네가 하던가.”

그러다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고 입을 다물자, 린화는 싸늘하게 나를 노려보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난 한평생 요요화한테 밀려서 살았어요. 요요화가 소가주라고 온갖 사람들에게 기대를 받을 때 늘 뒷전 취급이었다고요.”

“아니, 얘가 어제 네가 뒷전 취급이었다고 그러니? 우리가 널 얼마나 귀하게 대했는데!”

“가문을 물려받을 사람은 요요화잖아요! 게다가 절 귀하게 기르다니요? 평소에 좀 예뻐해 주면 뭐 해요. 진짜 중요한 순간에는 늘 요요화가 앞으로 가고 저는 뒤에 있는데요!”

“요화는 소가주잖니!”

“나도 소가주 하고 싶었어요! 요요화랑 나랑 무슨 차인데 요요화는 소가주고 나는 못 되는데요!”

린화가 펑펑 울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린화가 저렇게 나오면 어머니고 아버지고 아무도 당해내지 못한다.

우리 가엾은 린화, 우리 불쌍한 린화, 똑똑한데도 소가주가 못 되는 우리 린화…….


“난 이제 입궐하면 가족들 얼굴도 지금처럼 자주 보지 못하고 살 텐데. 오라버니는 혼인해도 어머니랑 아버지랑 살 테니 매일매일 얼굴을 보겠지요. 그러니 입궁할 때까지만이라도 절 좀 오라버니보다 우선해주세요. 네?”

린화가 흐느끼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결국 같이 울다가 이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알았다. 어미가 미안해. 어미가 린화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해. 이번에 준비한 옷은 모두 린화가 가져가자. 어미가 빨리 옷 수선해줄게. 그러니 울지 말거라 아가. 응?”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고개를 젓고서 그냥 밖으로 나왔다.

그게 신경이 쓰였나. 내 처소에 돌아가 할 일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 무렵, 어머니가 찾아와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말씀하셨다.


“미안하구나 요화야. 하지만 네가 저 옷을 입으려면 아직 몇 해는 더 있어야 하니까 이번은 린화에게 양보해주자.”

“아예 아예. 그럼요. 그러세요.”

“…….”

“왜 째려보세요?”

어머니는 내 등짝을 또 치고 싶은 얼굴이었으나, 이번에는 내게 미안해서인지 그러진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거랑 똑같은 걸 구해서 더욱 화려하고 예쁘게 만들어주마. 네 옷 준비에는 더 시간을 오래 들일 수 있으니까.”

“예에.”

“비꼬지 좀 말고!”

“그렇다고 저까지 울면 감당 못 하실 거잖아요.”

“대체 너희는 왜 이렇게 사이가 나쁜 거니?”

어깨를 으쓱하자, 어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일어났다.


“어쨌든 이번 한 번은 네가 양보하자. 린화는 며칠 뒤면 입궐할 거고 그러면 지금처럼 어미 품에 있지 못해. 며칠이라도 마음 푹 놓고 지내게 해주어야지.”

“예예. 그러세요.”

자꾸 목소리에 힘을 빼고 대답했더니 정말로 화가 나셨는지 어머니는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나가신다.

그 바람에 촛불이 마구잡이로 춤을 추자 방 안 가구 그림자도 괴상하게 일렁였다.

나는 침상에 앉은 채 마구 비틀리는 촛불을 잠시 쳐다보았다.

* * *

린화의 입궁 날은 아침부터 햇살이 아주 쨍쨍했다. 한겨울인데도 날 좋은 가을 같은 아침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린화를 끌어안고서 새벽부터 우셨고, 린화도 쉬이 마차에 오르지 못하고 계속 울었다.


“애기씨, 계속 울면 기껏 한 화장이 지워집니다. 같이 입궁하는 후궁들도 있는데 혼자 눈물 바람으로 입궁하시면 안 돼요.”

수길댁은 계속해서 린화의 눈가를 콕콕 손수건으로 찍어 주었으나 본인도 울고 있었다.

린화는 감정에 흠뻑 취해서는 웬일로 나까지 끌어안아 주었다.


“어머니는 입궐하기 힘드시고 아버지도 관직이 높아 자주 오기도 곤란하니까 너라도 종종 와야 해.”

“보고.”

“이제부턴 네가 날 지켜주어야 하는 거야.”

린화는 이어서 어머니와 아버지, 심지어 총관과 수길댁에게도 이런저런 말을 남기고서야 마차에 올라탔다.

린화가 탄 마차가 앞으로 나아가자 마차 끄트머리에 달린 황실의 문양이 잘게 흔들렸다.

그 뒤로는 린화가 가지고 가는 많은 패물과 개인 물품들을 실은 마차가 줄지어 따라갔다.

부모님은 마차가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울먹이면서 쉬이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나 역시 바로 자리를 뜨기 힘들었다.

이건 회귀 전에 없던 사건이었다. 이 일이 우리 가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회귀 전에는 평범한 행복을 찾았던 린화가 이젠 어떻게 될까.


“요화야. 너도 들어가서 입궐 준비해야지! 오늘 전하께 수업하는 날이 아니니?”

“오늘은 새로 입궁한 후궁들이랑 황족들이랑 인사한다고 안 와도 된대요.”

 

* * *

후궁이 동시에 세 명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한 번에 세 명이 입궁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입궁하는 이들 중 하나가 태월 장공주 출신인 게 특별했다.

그렇다보니 담당 관리들은 태월에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입궁 환영식 준비를 철저하게 했고, 린화는 그 덕을 보게 되었다.


“와…… 정말 예쁘네요.”

사가 궁녀로 린화와 함께 입궁하게 된 월미는 주위를 둘러보느라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높은 지붕과 지붕 사이로는 가느다란 은사가 걸렸고, 축복을 비는 금색 가느다란 종이가 은사에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하염없이 나부꼈다.

후궁들이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러 가는 길의 양옆으로는 악사들이 거리를 두고 서서 끊이지 않고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일반 후궁들이 입궁할 때는 이 정도로 하지 않지만, 갓 들어온 린화와 시녀들이 이를 알 리는 없었다.

장식된 길을 따라 걸어가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잘 다듬어진 회백색 돌로 만들어진 인공 공터 주위에는 단정한 복장의 태감과 궁녀들이 삼면을 둘러 서 있었다.

그걸 보고 린화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멀뚱히 있자, 그 주위에 있던 태감이 다가와 물었다.


“오늘 입궁하신 후궁이시지요? 혹시 성씨가-.”

“요 귀인이다.”

린화가 뿌듯하게 말하자 태감은 알겠다는 듯 오른쪽을 가리켰다.


“요 귀인이시군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린화가 그곳에 서자 마자 입궁 선발 때 얼핏 본 단 씨 가문 규수가 와서 중앙을 비우고 좌측에 섰다.

린화는 자신보다 낮은 품계로 들어온 그 단 미인을 힐긋거리며 중앙 자리를 응시했다.

태월에서 온다는 장공주를 저 중앙에 세울 모양인가 보다.

약 반 각 정도가 지나서야 화사한 연분홍색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나 중앙으로 가 섰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장식을 쓴 탓에 제대로 외모가 보이진 않았으나 생각보다 키가 큰 여인이었다.

그러고 있자니 잠시 뒤. 쌍을 지어 선녀처럼 차려입은 후궁들과 황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하나하나 모이더니 그들을 구경하듯 지대가 높은 앞쪽 계단에 나누어 섰다.

린화는 후궁들 사이의 암투가 치열하단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기에, 도발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그들을 관찰하지 않고 쑥스러운 미소만 띠고 있었다.

그러다 린화는 앞쪽에 모여서는 이들 중 한 명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언니의 제자인 13황자였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척하기도 뭐해서 린화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덕분에 린화는 13황자가 그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전하.”

“…….”

“전하. 오해를 사기 쉬우니 새로 입궐한 후궁을 한 명만 너무 빤히 쳐다보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웬일로 13황자의 게으름뱅이 태감 심하가가 그럴듯한 조언을 했다. 13황자가 린화를 빤히 쳐다보고 시선을 떼지 않자 덜컥 겁이 난 듯했다.

그러나 13황자가 린화를 쳐다보는 건 심하가가 상상하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저 옷.”

“예?”

“내 스승님 옷일 텐데.”

“예? 요 대인이요?”

“왜 저 사람이 입었지?”

“아이고, 전하. 전하의 서모 되실 분께 ‘저 사람’이라니요.”

13황자의 말에 심하가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그러나 13황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린화를 계속 쳐다보았다.


 
‘혼인한 후에 이 옷을 입고 있겠다’면서 그의 스승이 말하던 옷차림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가 스승이 저 옷을 입고 오기를 기대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다고 해서 약속이 틀어졌는데 기분 상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황제와 황후가 등장하고 적법한 절차에 맞추어 새로운 후궁 셋에게 예의를 받는 동안에도 13황자는 계속 그 옷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입궁 예절이 끝나자 기존 후궁들이 새로이 들어온 세 후궁에게 차례차례로 덕담을 해주었다.

황자와 황녀들 역시 새롭게 생긴 자신들의 서모에게 차례로 다가와 환영 인사를 해주었다. 나이순으로 인사했기에 13황자의 순번은 거의 뒤쪽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시를 섞거나 듣기 좋은 말을 섞어 인사하는 사이에도 13황자는 계속 옷만 응시하며 무언가를 찾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요 귀인과 마주하게 되었을 즘. 그는 자신이 찾던 흔적을 찾자마자 돌리지 않고 물었다.


“제 스승님 옷감으로 왜 요 귀인이 옷을 해 입으셨습니까.”

오늘만큼은 사이좋은 식구를 흉내 내며 다정하게 서 있던 황족들과 후궁들이 동시에 기겁해 13황자를 쳐다보았다.

린화 역시도 얼굴이 복숭앗빛이 되어 인사를 나누다가 당황해서 13황자를 올려다보았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스승님께서 그 옷감으로 옷을 만든다고 하시기에 제가 시침하는 걸 도와드렸지요. 그때 실수로 바늘 자국이 남았는데 스승님이 화내실까 봐 일부러 모른 척하였습니다. 그 자국이 거기 그대로 있군요.”

“!”

린화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옆에 있던 6황자가 자기가 더 무안해서 13황자의 옆구리를 찔렀다.


“요 대인과 요 귀인은 오누이 아닌가. 누이가 입궐한다니 요 대인이 양보했겠지.”

“스승님은 저 옷감으로 고운 옷을 만들어 절 위해 입겠다 하셨습니다.”

모두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

“저는 그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기대까지!’

“그런데 양보하다니요. 여섯째 형님. 그럼 스승님이 절 기만하셨단 말씀입니까.”

가엾은 신참 후궁 두 명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들의 머릿속에 황자 스승의 일반적인 모양이 떠올랐다. 수염이 새하얗고 긴 노인.

이어서 그 하얀 수염 스승이 건장하고 튼튼한 성인 제자와 함께 곱고 보들보들한 옷감을 살피며 ‘이걸로 옷을 해 입고 네게 보여주마.’ ‘꼭 보여주세요 스승님’ 하고 약조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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