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입고 가기로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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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입고 가기로 했는데
2022.09.08.
난데없는 13황자의 등장에 나는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다 가까스로 그에게 질문을 던지려는데 한발 앞서 제자가 먼저 물었다.
“귀신 놀이 하십니까.”
뭐야? 이 고급 옷감을 보고 나오는 말이 고작 그거야?
“아닙니다.”
황당해서 딱 잘라 말하고 나니, 내가 양손을 엉거주춤하게 들어 올린 자세란 게 떠올랐다.
아무래도 제자는 옷감이 아니라 내 자세 때문에 저런 질문을 한 모양이다. 그렇더라도 역시 기분 나쁘지만.
아니, 그보다 말이야.
“전하가 왜 여기 계십니까?”
이게 더 문제 아닌가? 황당해서 쳐다보자, 제자는 문을 닫고 들어오며 대답했다.
“스승님을 만나 뵈러 왔다 말하니 이 안에서 기다리라더군요. 제가 황자인 걸 밝히고 오진 않았습니다.”
아니, 어떤 멍텅구리 같은 작자가! 하지만 지금 우리 가문에는 린화의 입궁 준비를 위해 부른 이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 방에 비단이 산처럼 쌓이게 된 것도 앞서서 비단 장수가 먼저 여기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아예 이 방에서 거래까지 마치고 간 탓이었다.
손님들이 하도 많이 오가니 일꾼들도 중간에서 의사소통이 잘 안 될 수도 있긴 했다.
그렇더라도 하필 13황자에게 이런 꼴을 들킨 게 민망해서 조용히 호흡하고 있자니, 제자가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불편하실 테니 바늘은 제자가 빼 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나는 얼른 뒤로 이동했다. 저놈은 바늘 빼주다가 실수인 척 두세 번 찌를 거 같아.
하지만 내 괜찮다는 말에 제자는 대번에 표정이 가라앉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제자가 새 옷을 건드리면 불길하십니까?”
이놈은 말을 너무 꼬아서 듣는다. 저 버릇은 좀 고쳐야 한다. 게다가 웃고 있는데도 얼굴이 저렇게 살벌해 보이다니. 속으로 욕이 튀어나온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제자에게 말려 들어가는 걸 알더라도 여기서 긍정할 수는 없었다. 농담도 통할 사람에게 해야 하니까.
제자는 내 대답을 듣자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그럼 제자가 바늘을 빼 드려도 상관없겠군요.”
“그러다 실수로 절 찌르기라도 하시면…….”
“안 그럽니다.”
별로 신뢰가 안 가는데. 속으로 구시렁대는 사이. 제자는 순식간에 바늘 하나를 쏙 빼더니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 길쭉하고 아름다운 손을 조마조마해서 보고 있자니 제자는 두 번째 바늘까지 쉽게 빼며 물었다.
“동생 옷도 대신 시침해주십니까?”
“이건 제 옷인데요.”
“스승님 옷이요? 동생 입궁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 김에 어머니가 제 옷도 한 벌 마련해주겠다고 하셔서요.”
제자가 한쪽 눈썹만 치켜들더니 시침해 둔 옷의 형태와 길이 등을 살피기 시작했다.
“전하랑 혼인하면 입으라고 하세요.”
그 눈길은 슬쩍 덧붙인 설명에 바로 굳었지만 말이다. 난 쟤가 저렇게 질색하면 그렇게 좋더라.
나는 고소해하는 미소가 나오지 않도록 애쓰며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그러기를 몇 호흡. 제자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이런 건 나중에라도 제가 다 해드릴 수 있으니 미리 만들어오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전하보다 저희 가문이 더 돈이 많은걸요.”
“…….”
제자가 경직된 걸 보니 아주 마음이 따스해지는구먼!
미소를 참기가 어려워서 나는 바늘 꽂은 두 팔을 힘겹게 움직여 옷감으로 미소를 가렸다.
그러고서 제자를 쳐다보니 제자는 어이가 없단 눈으로 웃고 있었다.
“예. 참 좋으시겠습니다. 여하간 제게 오실 때 입을 옷이라 하시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곧 그는 내 소매에 꽂힌 바늘도 빼주었고, 겨드랑이와 허리 부근에 꽂힌 바늘까지 다 빼주었다. 그의 말처럼 바늘에 찔리는 일은 없었다.
자유다! 나는 이각 만에 찾은 자유에 감사해서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못하고서 새침한 척 의자에 앉으려다가 제자가 아직 서 있기에 도로 일어났다.
그러고서 민망해서 괜히 옷감을 살피는 척하고 있자니 13황자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새 옷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럼요. 새 옷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그렇군요. 제자는 몰랐습니다.”
그야 회귀 전엔 우리가 사적으로 옷 이야기할 일이 없었으니까?
제자는 또 물었다.
“그럼 바느질도 잘하십니까?”
“전하랑 비슷한 수준일걸요.”
못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 대답에 제자는 의뭉스레 웃으며 놀렸다.
“그럼 잘하시겠군요.”
정말로 자기가 바느질을 잘해서 저렇게 말하는지, 아니면 그냥 내가 바느질 못 하는 걸 짐작하고 저렇게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눈매가 휘어져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괜히 뭔가…… 좀 그랬다. 뭐지. 오늘 뭐 좋은 일 있었나?
저 제자놈이 나한테 찾아와서 좋게좋게 대하고 갈 인간이 아닌데.
오늘은 바늘을 안 찌르고 빼주는 것도 그렇고 말을 나름대로 상냥하게 하는 것도 그렇고 눈매도 그렇고. 좀 들떠 보인다.
나는 이상해서 그를 쳐다보았으나 제자는 자기 이야기를 먼저 꺼내진 않았다.
그러고 있자니 퍼뜩 생각이 났다.
“맞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절 찾아오셨다고요?”
제자는 의자를 빼내며 말했다.
“앉으시지요.”
“예?”
왜 왔냐는데 왜 의자를 빼줘? 의아해서 멀뚱히 보고 있자니 제자가 의자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의아하지만 일단 거기에 앉자, 제자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더니 내 다리를 가져가 자기 굽힌 무릎에 올렸다.
“악!”
그 경악스러운 행동에 기겁해서 비명을 지르자 제자는 나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아니, 이 인간이?
“왜 남의 다리를 가져가세요?!”
황당해서 묻자 제자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마지막에 뵈었을 때 다리를 삐셨지요. 스승님은 어딜 다쳐도 잘 치료를 안 하시니 확인하러 왔습니다.”
“예?”
“이리 줘보시지요.”
나는 기겁해서 내 다리를 끌어안고 숨기며 거절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내가 거절하자 대번에 눈빛이 가라앉으며 물었다.
“혹시 꾀병이셨습니까. 제자는 스승님이 많이 아프다고 여겨서 몸소 업고 산길을 내려왔는데요.”
얘는 맨날 극단적이야! 그리고 왜 그게 산길이야 언덕 비탈이지!
“그게 아니라요! 그냥 부끄러우니 발을 안 보여드린단 겁니다.”
다급하게 변명하자 제자는 뭔가 부끄럽냐는 듯 건조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다리 주기를 거부하면 내가 더 이상할 듯해서,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친 쪽 다리를 슬금슬금 내밀었다.
제자는 무릎에 내 다리를 얹더니 발목과 복숭아뼈, 그 아래 발뒤꿈치 부분을 조금 내밀게 하고서 주위를 살폈다.
아이고 내가 미래 황제를 밟고 있네! 아이고 미래 황제가 내 발바닥을 코앞에서 보다니!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게 무서운 건지 부담스러운 건지 스스로의 마음조차 짐작 가지 않는다. 그저 ‘나는 잠시 죽었소’ 상태로 굳어 있을 뿐.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13황자가 마침내 내 발목에서 시선을 떼고 내게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요화야, 많이 기다렸지?”
그토록 기다려도 안 오던 어머니가 문을 덜컥 열고 들어왔다가, 13황자가 내 발에 매달린 꼴을 보더니 비명을 지르며 나갔다.
나는 다급히 황자의 무릎에서 발을 치우고서 돌아앉았다.
그동안 어머니도 이성을 찾았는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힐긋 고개만 옆으로 돌려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올라온 얼굴로 서서 떨고 계셨다.
그러다가 13황자가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나자, 차마 화는 내지 못하고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하. 우리 요화와 전하 사이에 혼담이 조금 오간 건 알지만, 아직 정식으로 진행된 건 아니지요. 그러니 요화를 위해서 예의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요화의 발은…… 혼인한 후에 보시고요.”
무서워서 지금 13황자의 표정이 어떨지 확인하지 못하겠다. 어머니는 꼭 13황자가 내 발에 반해서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나는 정면을 응시하다가 손수건을 꺼내서 괜히 얼굴을 반 가렸다. 그러고서 사태를 외면하고 있자니 13황자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담이 진행되지 않을 거라면 내가 스승님의 발을 보든 발목을 보든 더 문제 될 게 없을 텐데.”
어머니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외적으로는 내가 사내이다 보니 반박할 말이 없는 듯했다.
결국 어머니는 더 말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제자는 그런 어머니를 한 번 보더니, 몸을 일으키고서 내게 말했다.
“그럼 스승님. 제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예. 예.”
“발은 계속 잘 치료하시고요. 치료한 흔적이 전혀 없더군요.”
아니, 쟤 의술도 아나?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게 보이나?
당황해서 쳐다보고 있자니, 13황자는 어머니에게는 “가겠네.” 이 한마디만 하고 가버렸다.
나는 주저하다가 어머니 팔을 가볍게 두드린 다음 제자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갔다. 혹시 옆길로 새는 건 아닌가 의심했으나, 제자는 정말로 그 길로 가버렸다.
멀어지는 제자의 뒷모습을 보는데 아직도 어리둥절하다. 진짜로 내 발만 보러 왔나? 여기까지?
* * *
며칠 뒤. 린화의 입궁이 사흘 정도 남은 날. 마침내 의복도 다 완성이 되었다.
그러면 곁다리로 하나 만든 내 의복도 완성되었단 뜻이라, 나는 문안 인사도 할 겸 슬쩍 어머니가 계신 본당으로 가보았다.
‘어머니가 내 옷을 미리 빼두셨겠지.’
마침 본당 앞에서는 린화의 웃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린화도 옷 보고 있나 보네.
나중에 다시 올까, 생각하다가 어차피 입궁하면 얼굴 볼 일도 줄어들 테고 싸울 일조차 없겠지 싶어서 나는 그냥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저 왔어요.”
역시나. 린화는 새로 지은 옷을 입어보고 있었다.
“이거 봐 요요화. 어때?”
게다가 그 옷들이 마음에 드는지 얼굴이 아주 평소보다 더 화사했다.
“이야. 옷이 날개네.”
“야 요요화. 넌 칭찬 한마디 제대로 못 하냐?”
“이야 돼지 목에 진주네.”
“요요화!”
나는 어머니에게 등짝을 한 대 맞고서 입을 다물었다. 린화는 그런 나를 째려보더니 곁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다른 거 입어보고 나올게요!”
린화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제 옷은요?”
“아직.”
“완성 안 됐어요?”
“못 빼냈어. 제일 밑에 뒀으니까 나중에 규방에 옮겨 준다고 할 때 빼내면 돼.”
어머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거기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제자가 내가 옷감을 걸친 걸 보고 한 말이 떠오른다. 내가 그 옷을 입고 자기에게 오는 걸 기다리겠다고.
“…….”
뭐. 빈말이겠지. 수의로 입고 와라, 이런 뜻은 아닐 거 아냐.
뭐야. 생각해보니 이상한데. 진짜 수의로 입고 오란 뜻이었나. ……흰색으로 하지 말 걸 그랬나.
잠시 찜찜해져 있을 때였다. 마침내 곁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린화가 토끼처럼 뛰어나오며 외쳤다.
“짠! 이거 어때요?”
그런데 뛰어나온 린화는 어머니가 내게 해주기로 한 그 옷감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 역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린화야, 그건-.”
그러나 어머니가 입을 열기 전. 린화가 옷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투덜거렸다.
“이 옷이 색도 그렇고 모양도 그렇고 제일 저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입궁하는 날에 입어야겠어요. 그런데 좀 길이가 길게 마감됐네요. 이틀 안에 줄일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