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네 수준이 내 수준
(51/159)
51화. 네 수준이 내 수준
(51/159)
51화. 네 수준이 내 수준
2022.08.25.
침울해진 마음을 달래 가까스로 수업을 끝내자마자 나는 얼른 서책을 서랍에 집어넣고 일어났다.
“그러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전하.”
나는 빠르게 인사를 건네고 문간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제자는 긴 다리를 이용해 흘러오듯 내 옆으로 다가와서는 내가 문을 열기 직전 나를 불렀다.
“스승님.”
“예?”
왜 그러나 싶어 돌아보자 제자의 손이 이마에 닿았다. 내 이마를 다 덮고도 내려오는 커다란 손은 숯불처럼 뜨거워서 나는 펄쩍 뛰고 말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놀라서 묻고 보니 제자가 자기 손과 내 이마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제자의 손이 더러우십니까.”
“아닙니다. 손이 남들보다 좀 뜨거우시기에.”
미움을 살까 봐 나는 얼른 오해를 부인하고서 그의 손을 내 이마에 도로 얹어주었다. 그런 뒤에야 의아해져서 물었다.
“한데 왜 제 이마에 손을 올리세요?”
“열이 나나 보았습니다.”
내가 꾀병을 부린 건지 아닌지 파악하려는 건가! 제자의 대답에 나는 두 번째로 놀랐다.
하지만 제자가 손을 바로 치우지 않는 바람에, 놀란 채로 그렇게 계속 서 있어야 했다.
그 상태로 우두커니 있으려니 얼마나 불안하던지. 나는 어색하게 제자의 배와 가슴 사이의 단추를 바라보다가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곤란한 증세가 나타났다.
린화 건으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한데, 겨울 월무궁은 훈기가 그리 없고, 이 와중에 제자의 손만 뜨끈뜨근하자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제자의 손에 기대어 잘 수는 없는지라 나는 필사적으로 잠을 참았다. 그러기를 또다시 몇 호흡.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으니 더 잠이 오는 게 분명했으니까.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제자의 눈길이었다. 제자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제자는 그제야 내 이마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열이 나긴 하는군요. 한데 눈은 왜 감으시는 건지요?”
“어색해서요.”
“어색하면 늘 그렇게 눈을 곱게 감으십니까.”
“예?”
그냥 질끈 감고 있었는데? 억지로 잠을 피하느라 눈꺼풀이 흉하게 떨렸을 게 뻔한데. 곱게 감았다고?
어리둥절해서 멍하게 보고 있자니, 제자가 차갑게 경고했다.
“그렇게 눈을 감으면 오해를 사기 쉽습니다. 저는 그런 데 흔들리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선 그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빤히 쳐다보면 빤히 쳐다본다고 뭐라 할 거면서. 뭐라는 거야. 그럼 눈에 힘을 빼고 흐리멍덩하게 쳐다보기라도 해야 하나.
* * *
어쨌든 직접 운왕성에 갈 수 없게 되었으니 일을 잘 처리해야 한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신을 한 통 쓴 다음 말을 잘 타는 심부름꾼을 불러 패와 서신을 건네며 지시했다.
“당장 운왕성 운왕중주로 가서 난균이란 사람을 찾거라. 반년 전까지 난균의 아버지가 그곳에 부임해 있었다니 아마 중주지사거나 그 밑에 있거나 그랬을 거다.”
“네, 도련님.”
“이 서신과 패를 보여드리면 될 거다. 그러면 서신을 읽고 답을 줄 거야.”
“예.”
“일이 급하니 당장 떠나거라.”
심부름꾼에게 가장 튼튼하고 빠른 말 중 한 필을 준 뒤, 나는 쭉 뻗은 대로를 심란하게 바라보았다. 일이 잘 해결될까?
* * *
다음날. 나는 월무궁으로 가서 수업을 하긴 했으나 수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슬슬 황실에서 후궁 선발 공고문을 각 사대부 가문에 돌릴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일단 그 공고문을 받고 나면 며칠 안에 바로 이름을 등록해야 한다. 그전까지 일이 성사되지 못한다면 린화의 미래는 끈 떨어진 후궁이었다.
그 생각을 하느라 머리가 아파서, 결국 나는 약은 꾀를 쓰기로 하고 제자에게 말했다.
“여기 ‘사람에겐 염치가 있어야 하나’ 부분부터 읽어 보시지요, 전하.”
제자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고즈넉한 목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만 감상하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제자가 집중할 즈음 마음을 놓고 편하게 다시 린화 일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난균은 처음부터 린화가 좋았다고 했어. 그놈은 취향이 이상하지. 그 이상한 취향에 린화가 다행히 부합해. 일단 데려와서 린화를 보게만 한다면 그놈은 알아서 린화에게 반할 거야. 그런데 난균이 우리 가문 패를 보고서도 관심을 안 보이면 어쩌지?’
그때였다.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상념에서 퍼뜩 깨어나 앞을 보자, 제자가 팔을 괸 채 나를 삐딱하게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치자 괜히 오싹해졌다. 창문을 두꺼운 천으로 꼭꼭 다 틀어막았는데도 찬바람이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왜 또 그러십니까?”
어쨌든 뭔가 또 불만이 있는 듯해 묻자, 제자는 괴었던 팔을 내리더니 조곤조곤 부드럽게도 타박했다.
“그래도 명색이 제 스승이신데. 너무 건성이신 거 아닙니까.”
“전하께 책을 소리 내 읽게 해서 그러십니까?”
“그럴 리가요.”
“그럼 왜 그러시는지…….”
제자는 눈웃음을 짓는데도 싸늘해 보였다. 명백하게 불만을 드러내는 표정에, 나는 괜히 움츠러들어서 눈치를 보게 되었다. 제자는 그런 표정을 유지한 채 물었다.
“제자가 방금 어느 부분을 읽었는지 아십니까.”
“35쪽을 읽으신 게 아닌지요……?”
“처음에는 35쪽을 읽었습니다. 중간부터는 60쪽을 읽었지만요.”
“!”
“스승님이 딴생각에 잠긴 게 티가 나서 시험해보고 싶었거든요.”
이렇게 치졸할 수가 있나.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하지만 제자는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그게 날 더 민망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리면서 사과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전하께 신경 쓰지 못하였습니다. 전하의 말이 옳습니다. 그래서는 안 됐지요. 신의 잘못입니다. 이젠 제대로 수업하겠습니다.”
그러고서 책을 제대로 펼친 다음 제자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미안하지만 35쪽부터 다시 보자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체 뭐지? 제자는 가차 없는 말로 나를 민망하게 만들어 놓고서는 지금은 좀 기이해하는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그 답답한 시선에 괜히 뜨끔해서 묻자, 제자는 그제야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이 이상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신은 늘 그러는데요.”
내가 슬쩍 반박해 보았으나, 제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서 물었다.
“어디부터 다시 수업하실 생각이십니까?”
“삼십오 쪽이요…….”
* * *
제자는 내가 딴생각을 하느라 날려버린 시간만큼 수업 시간을 연장했다. 그 덕택에 제자에게 생겼던 쥐꼬리만큼 미안한 감정은 수업이 끝날 때쯤 완벽하게 사라졌다,
사악한 인간 같으니라고! 어차피 자기도 내 수업을 안 들으면서! 자기도 맨날 딴생각하느라 내 강의를 날려 버리면서!
자기가 날 무시하는 건 되고 내가 자기를 무시하는 건 안 된단 건가? 나는 속으로 씩씩거리면서 퇴궐할 준비를 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려다 보니, 문득 제자가 후궁 선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의아해졌다.
그날 황제가 후궁 선발 이야기를 꺼낼 때 제자는 나와 함께 있었다. 게다가 황제에게 후궁이 생긴다는 건 그의 서모가 더 늘어난다는 뜻이지. 제자로서도 신경이 쓰일 일 아닌가?
그런데도 제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괜히 내 쪽에서 그의 속내가 먼저 궁금해졌다.
이에 나는 제자가 배웅하기 위해 나를 따라 이동하는 걸 확인하고서, 문간을 나설 때 슬며시 그를 떠보았다.
“폐하께서 동초일 행사 때 후궁 선발 이야기를 하셨지요. 당장 공고를 내리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바로 공고를 내리진 않으시네요. 혹시 마음이 바뀌셨을까요?”
제자는 예사롭게 대답했다.
“흥미가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흥미가 없으시다고요?”
황자 황녀는 다들 제 어머니와 한 편이니, 회귀 전 제자는 당연히 후궁들과도 암투를 벌였다. 그런데 흥미가 없다고?
장차 자기 정적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등장하는 건데? 태월 장공주가 순한 성품이라 그런가?
제자는 내가 돌부리에 걸려 휘청이자 쓰레기를 집듯 내 옷깃을 집어 균형을 잡아주며 대답했다.
“부황께서 후궁을 몇십 명 더 늘린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 봐야 큰 변화라고는 제 밑으로 안 친한 동생이 몇 명 더 생기는 것뿐이겠지요.”
난 우리 아버지가 첩을 들여서 안 친한 이복동생을 만들어 오면 집안을 뒤집고 난리가 날 거 같은데. 제자는 사상이 특이하구나.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15황녀는 내내 막내였으니 감회가 남다를지도 모르겠군요.”
황족들은 사상이 특이하구나. 여하간 제자가 하도 태연하게 대답해서, 나는 덩달아 수긍하고 말았다.
뭐. 어쨌든 13황자가 자신과 엮이지 않는 후궁들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게 린화에게는 좋은 일이겠지. 혹시라도 린화가 후궁이 되었을 때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월무궁 바깥문 앞까지 도착했다. 나는 제자에게 공손하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신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전하.”
그런데 나가려는 내 뒤통수에 대고 제자가 물었다.
“그걸 왜 물어보십니까?”
“예?”
나는 문간 밖으로 한 발을 뺀 어색한 자세로 제자를 돌아보았다. 제자가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제자가 저런 표정을 하고 있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나는 어정쩡하게 밖으로 나간 다리를 도로 회수하면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전하. 왜 그러시는지요?”
제자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채 또 되물었다.
“혹시 스승님. 후궁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래서 물어보신 겁니까?”
말은 차분하지만 질문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눈에 힘을 크게 주고 제자를 쳐다보았다.
나랑 자기 사이에 혼담이 오간 것도 충분히 파격적인 일인데. 거기서 더 나아가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제자를 쳐다보고 있자니, 슬금슬금 불안한 추측이 떠올랐다. 혹시…… 이 제자놈. 내가 여인이란 걸 아나?
하지만 제자에게 이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 탓에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고 숨만 죽이고 있자니, 제자가 자기 키를 과시하며 내 머리 위 문틀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스승님처럼 가벼운 사람은 후궁으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생각도 안 했는데요…….”
“생각하고 계신 듯하니 당부드리는 겁니다. 스승님 같은 부류가 황실과 엮일 방법은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황자의 비가 되는 겁니다. 그 정도가 딱 스승님 수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말씀은…… 제 수준이 딱 전하의 배필이란 말씀이신지…….”
자기가 먼저 나를 마구 비꼬아 내리깔아 놓고서, 제자는 내가 더듬더듬 묻는 말에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억울해라.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황자님은 전하뿐인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