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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개 같다니요 (50/159)


50화. 개 같다니요
2022.08.22.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묻힌 게 아닐까요?”

시비인 월섬이 옆에서 먹을 갈면서 걱정스레 물었으나, 나는 보란 듯 척척 그림을 그려 냈다.


“거봐요. 너무 많이 묻혔다니까요.”

월섬의 말이 옳았지만, 나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그림을 마무리 지었다.


“괜찮아. 누구에게 보이려고 그린 그림 아닌걸.”

그렇게 그림을 열 장 정도 그렸을 즈음. 드디어 어머니가 기별을 주었다.


“도련님. 마님께서 부르십니다.”

수길댁의 목소리에 내가 이틀간 쉼 없이 쥐고 있던 붓을 내려두자, 월섬은 얼른 수건을 물에 적셔 가져다주었다.

손을 씻고 본당으로 가자, 어머니는 탁자 앞에 우두커니 서서 벽에 걸어둔 매란국죽 족자를 보고 있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왔니?”

“부르셨어요?”

“네가 말한 그 난균이란 청년에 대해 찾아보았다.”

나는 의자를 빼어 앉으면서 온 기대를 담아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떻던가요?”

“그 가문은 네 말대로 꽤 평판이 좋아. 왜 이름이 낯서나 했더니, 운왕성에서 근무하다가 반년 전쯤에야 수도로 올라왔대. 하지만 몇몇 안 되는 지인들은 다들 그 집안사람들이 어질고 현명하다고 칭찬하더라.”

“난균은요?”

왜 가문 이야기만 하시지? 혹시 난균은 무뢰배처럼 지내다가 나중에 성질을 고쳐먹는 인물인가? 그래서 이 시기에는 평가가 좋지 않나?

나는 불안해서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청년은 아직 운왕성에 남아 있대. 거기 학당 선생에게 내내 수업을 들었으니 끝까지 듣고 오겠다고 남았다더라.”

“수업이 언제 끝나는데요?”

“그래도 몇 해는 더 있어야 한다던대.”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다. 그래서 몇 해 뒤에야 난균과 린화 사이의 혼사가 성사되는 거구나!

나는 어머니가 거절할 거란 걸 알면서도 다급하게 물어보았다.


“그토록 평가가 좋은 가문이라니 사주를 교환하고 일단 정혼부터 하면 어떨까요? 당장 후궁 선발은 피해야 하잖아요.”

어머니는 예상대로 단호하게 거부했다.


“안 돼.”

“아. 어머니.”

“한 번 정혼 하면 깨기도 쉽지 않다. 혼인하면 이혼은 더욱더 어렵지. 린화는 제대로 된 사내와 혼인시켜야 해. 평생 린화를 행복하고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어질고 성품 좋은 사내 말이야. 사람 속내를 알아차리기 어렵다지만 그래도 만나 보기라도 해야지.”

아이고 어머니! 난균이는 어머니랑 아버지가 이미 철저한 검증을 끝낸 사내라고요!


‘회귀 전 미래에서지만…….’

나는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가 물었다.


“그럼 어머니. 제가 난균을 데려오면 한번 봐주시겠어요?”

“데려오려고? 어떻게?”

“될지 안 될지 모르면 시도라도 해 봐야지요. 일단 데려와 볼 테니 어떤가 봐주세요.”

어머니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왜 우세요?”

당황해서 묻자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동생이랑 싸우긴 해도 동생 생각을 많이 해주는구나 싶어서.”

아니, 별로 그렇진 않은데요. 그냥 동생이니까 못 사는 것보단 잘사는 게 낫고 죽지 않고 평온히 지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뿐인데요.


“그럼요. 린화는 짜증 나는 망아지지만 그래도 동생인걸요.”

“동생 좀 망아지라 안 부르면 안 되니?”

“망나니라 불렀다가 혼나서 망아지라 바꾼 건데요.”

“린화라고 불러. 아니면 좀 예쁜 별명을 해주거나.”

“사실 망아지가 린화보다 예쁘죠.”

어머니는 탁자를 쾅 소리가 나게 내려쳤다. 그래도 내가 시선을 피할 뿐 말을 바꾸지 않자,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고서 당부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요화야. 세상엔 너희 자매 둘뿐이다. 지금은 네가 동생을 일방적으로 챙기는 것 같지만, 린화가 시집가고 나면 네가 린화의 남편이나 시댁에서 도움을 받게 될지도 몰라. 물론 너도 린화를 계속 지켜 주어야지.”

솔직히 어머니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사이 좋은 형제자매는 세상 누구보다 큰 힘이 되는 게 맞지만, 사이 나쁜 형제자매는 그냥 가까운 경쟁자일 뿐이다.

13황자와 그의 형제자매들을 보면 알 수 있지.

하지만 굳이 어머니를 속상하게 만들 필요는 없기에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서 물었다.


“어쨌든 제가 난균을 데려오면 어떤 청년인가 봐주실 거지요?”

“그럼.”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내가 운왕성으로 가서 난균을 찾아오는 수밖에.

부모님이 난씨 가문에 대해 조사해오길 기다리는 동안 이미 이틀이 흘렀다. 그 사이에 황제가 후궁 선발 공문을 내릴 수도 있으니 시간이 없었다. 빨리 다녀와야 해!

* * *

다음날. 나는 월무궁에 들어갔을 때 제자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전하. 보름 정도 휴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보름이면 운왕성에 다녀오기까지는 좀 빡빡하다. 난균을 찾고 설득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더 빡빡하겠지.

그렇지만 이 이상은 제자가 허락해주지 않을 듯하니, 나름대로 계획을 꽉꽉 채워 넣은 시간이 보름이었다.


‘최소한 보름은 필요해.’

제자는 오늘 배울 서책을 한 장 한 장 느긋하게 펼치다가 무심해 보이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눈으로 무슨 개소리냐고 묻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싹싹하게 웃고만 있자, 제자는 결국 서책을 덮으면서 물었다.


“동초일 휴일을 보내고 처음 입궐하신 게 아닙니까.”

“예, 예. 그렇지요.”

“그런데 또 휴가를 가신다고요?”

“그게, 저. 음.”

어쩌지?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나는 제자의 무심해 보이지만 절대로 무심할 리가 없는 시선을 머리통으로 받아내며,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제자가 린화의 회귀 전 남편인 난균 이름에 대해 알까? 제자는 린화에겐 관심이 전혀 없다고 했지. 그러면 모를 것 같긴 한데.

반대로 생각하면 난균은 린화의 남편이기도 하지만 내 인척이기도 하니 이름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제대로 이름 석 자를 아는 건 아니지만, 얼핏 들어 두었다가 내가 난씨 가문이나 난균 이름을 꺼내면 기억을 갑자기 회복할 수도 있고.


‘그럼 역시 난균 이야기는 안 하는 게 낫겠지?’

난균 이야기를 들은 제자가 ‘전에도 그자를 좋게 보아서 혼인했으니, 이번에도 그자를 좋게 보고 혼담을 넣으려는 거겠지’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운이 나쁠 경우 ‘혼담을 넣는 시기가 왜 회귀 전과 몇 해나 다르지? 혹시 스승님이 회귀 전 기억이 있나?’라고 짐작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나는 결국 적당히 둘러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몸이 좀 좋지 않아서요.”

“몸이요?”

“벼루에 맞고서도 열심히 돌아다녔지 않았습니까. 후유증이 아직까지 계속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참에 그냥 보름 정도 푹 쉬면서 몸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전하. 괜찮을까요?”

제자놈은 얄밉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러면 제 수업은 어쩌지요?”

거짓말쟁이! 어차피 내 수업은 듣지도 않으면서 인제 와서 무슨!


“전하께서 하도 영민하시다 보니 수업 진도가 다행히 예정보다 빠릅니다. 보름은 비워도 될 거 같습니다, 전하.”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눈을 예쁘게 뜨기 위해 노력했다. 제자는 내 눈이 예쁘다니까.

효과가 있는지, 열심히 눈에 힘을 주고 쳐다보자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제자는 눈길을 살짝 옆으로 피하며 물러섰다.


“좋습니다.”

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월무궁에 방을 한 칸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네?”

“거기서 머물면서 휴식하세요.”

“!”

나는 충격 받아서 제자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너무 질색하는 티가 나지 않도록 반박했다.


“우리가 혼담이 오가긴 했지만, 아직 정혼한 사이도 아니고 혼인한 사이도 아닙니다. 그런데 동거를 하자니요!”

제자는 내 배려와 달리 자기는 온 얼굴 가득 질색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너무 싫어하는 표정이라 괜히 발끈하게 될 정도였다. 왜! 네가 먼저 말해놓고 왜 날 그렇게 쳐다보는데!


“스승님.”

“네…….”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제자는 스승님 곁에 있고 싶어서 여기 오시라 하는 게 아닙니다.”

“!”

“스승님을 믿기 힘들어서 여기 오시라는 겁니다.”

못된 새끼…… 얼굴은 저리 고운데 말은 어찌 지지리도 못돼먹었나.


“신을 왜 못 믿으십니까?”

나는 제자가 날 왜 못 믿는지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회귀 전 기억이 없는 나는 제자가 왜 저러는지 몰라야 하니까.

제자는 말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스승님은 호색하니까요.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미색이 괜찮다 싶으면 개처럼 꼬리를 흔드는 분이시니까요.”

“스승에게 개라니요…….”

아비는 벼루를 던지더니 아들내미는 비수를 던지는구나.

시무룩하게 중얼거리자, 제자는 칼 같은 말을 휘둘러대던 걸 멈추고 잠시 조용해졌다.

괜히 책상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슬쩍 고개를 들어 보자, 제자는 불쾌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네가 나한테 개라 불러 놓고서 왜 네가 그런 표정인데!

나는 제자가 그나마 내게서 마음에 든다던 그 눈동자로 제자를 빤히 응시했다. 이런 날 보고 네가 어찌 개라고 말할 수가 있어!

게다가 생각해보니 우습다.


“개는 충성심이 깊지요. 전하는 저더러 충성심이 없다고 늘 구박하시면서, 한편으로는 제게 개라고 하시는군요. 사실은 전하가 보시기에도 제가 충성심이 없진 않은 거지요?”

그의 논리가 엉터리라고 조목조목 짚어 주었더니, 제자는 찔리는지 헛웃음을 뱉는 척했다.


“게다가 개는 아주 사랑스럽고 예쁩니다…….”

내가 거기에 한마디 더 덧붙이고서 다시 시선을 내리깔고 있으려니, 제자가 다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 상태로 계속 있으려니, 제자는 아까보다 가라앉은 어조로 다시 말했다.


“보름 휴가를 드리면 스승님이 뭘 하고 지낼지 모르겠습니다. 도박장에서만 두 번을 마주쳤지 않습니까.”

“우리가 거기서 두 번을 마주쳤다는 건, 전하도 거기에 최소 두 번 오신……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나는 논리적으로 재차 반박을 시도하려 했으나 제자의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얼른 입을 닫았다.

두 손을 모으고서 공손한 자세를 취하자 제자는 서늘하게 말을 마무리 지었다.


“보름의 휴가를 원한다면 여기서 지내며 어의에게 진료를 받으세요. 어의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아니면 휴가는 없습니다.”

“전 집에서 쉬어야 마음이 편한데요.”

이쯤 되면 좀 물러나 줄 만도 하건만. 제자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제자는 내가 계속해서 반박하는 게 불쾌한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양보하는 척 물었다.


“그럼 제가 그 집에 같이 머물까요?”

미쳤나!


“정, 정혼도 안 했는데 어찌 그럽니까. 안 됩니다!”

“그럼 보름간 매일 문병을 가지요. 이것까지 꺼리진 않으시겠지요.”

이 제자놈! 정말 나쁜 놈이야. 나는 험한 말은 못 하고서 속으로 씩씩거렸다.

하지만 제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내게 자유를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내가 월무궁에서 보름을 지낼 수도, 제자를 우리 집에 보름간 들일 수도, 그의 간호를 받을 수도 없는지라, 결국 나는 시무룩하게 물러섰다.


“없던 얘기로 해주세요.”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 가는 것만큼 좋은 효과는 없겠지만 사람을 보내 난균을 만나보라 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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