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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눈은 반만 뜨세요 (48/159)


48화. 눈은 반만 뜨세요
2022.08.15.



 
회귀 전에도 제자가 이렇게 화를 잘 내는 인물이었던가.


'물론 지금도 화를 내는 건 아니지만…….'

한번 그의 손으로 독배를 받아서일까. 조금만 제자가 시선을 이상하게 해도 그가 화를 내는 것처럼 여겨지고 움츠러들게 된다.

하지만 내가 회귀 전보다 제자를 무서워하게 된 걸 감안하더라도, 제자 역시 좀 더 눈빛이 날카로워지긴 했다.

회귀 전에는 내게 저런 시선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이전 생에서는 제자에게 독살당할 거란 예상을 하지 못한 거고.


"왜 그러세요……?"

어쨌든 저런 시선을 못 본 척 넘길 수는 없기에 나는 아주 작게 물어보았다. 덩달아 린화의 시선도 드디어 황제에게서 나와 제자 쪽으로 돌아왔다.


"아닙니다."

제자는 날카로운 눈빛을 대번에 숨기며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승님 목이 길고 예뻐서 보았습니다.“

린화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나와 제자를 더욱 빠르게 보았다.


“감사합니다…….”

칭찬보다는 위협 같은 말이었으나, 나는 눈치 없는 척 인사하고서 괜히 다시 황제 쪽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황제도 지금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서는 계속해서 시선이 느껴져서 머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 * *

회귀 전과 달리, 황제와 황후는 후궁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하진 않았다. 새로 들일 거란 후궁 이야기도, 태월에서 온다는 후궁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13황자와 보문 공주의 혼담 이야기도 꺼내지 않아서 동초일 행사는 이후로는 평안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행사가 끝난 뒤 흩어지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황제가 황후와 나눈 후궁 이야기가 가득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가문 여식을 이 기회에 후궁으로 보내고 싶을 테고, 어떤 이들은 막고 싶을 테니까.

나 역시 린화를 데리고 부모님이 있는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내내 후궁 이야기를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후궁을 뽑는다면 린화도 후보가 될 수밖에 없을 텐데.’

절대로 린화를 후궁으로 보낼 수는 없다. 늦은 시간이겠지만 집에 가면 부모님을 찾아가서 이 이야기를 좀 나누어 보아야겠다.


“어머니 저기 계시네. 어머니! 아버지!”

그런데 부모님을 부르고서 그쪽으로 걸어가려 할 때였다. 누군가 내 팔을 툭 가볍게 뒤에서 쳤다. 돌아보자 언제 따라온 건지 13황자가 근처에 서 있었다.

내가 놀라서 쳐다보자, 13황자는 둘이서 이야기하자고 눈짓으로 신호했다.

린화는 졸졸 따라오다가 덩달아 멈추어 서서 또 나와 제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린화에게 부탁했다.


“어머니한테 가. 코앞이니 혼자 갈 수 있지?”

린화는 대답 대신 그쪽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나는 린화가 어머니 팔에 매달리는 걸 보고서 13황자를 돌아보았다. 13황자는 따라오라는 듯 어느 방향을 눈으로 가리키고서 돌아서 걸어갔다.

시무룩하게 그 뒤를 따라가자 대화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제자는 대화원에서도 사람이 오가지 않는 한적한 곳에 가서야 멈추어 섰다. 나는 덩달아 멈추고서 제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전하, 무슨 일로 신을 부르셨습니까?”

아까 제자는 헤어질 때 별말 없이 나와 린화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따라와서 따로 보자고 하니, 린화가 없는 곳에서 따로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제자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울 즈음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혹여 부황을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예? 아니요?”

미쳤나?


“충심이라면 있습니다.”

사실은 충심도 없다. 어쨌든 정석대로 대답했으나 제자는 표정을 펴지 않고서 재차 물었다.


“그럼 부황을 마음에 두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 충심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연분을 여쭙는 겁니다.”

나는 제자가 진심으로 물어보는 건가 당혹스러워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제자의 표정이 더욱 차갑게 변했다. 내 연분을 의심하는 듯해서 나는 고개를 최대한 빠르게 젓고서 얼른 부인했다.


“아닙니다. 폐하를 그런 쪽으로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사내가 아닙니까.”

“그런 핑계를 대기엔 스승님은 전적이 화려하시다 보니 의심이 가는군요.”

나는 당황해서 그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황제가 후궁을 뽑는다는데 왜 나한테 이 난리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벼루는 내가 맞았는데 왜 대가리는 이 새끼가 고장 난 걸까?


“저는, 신은, 왜 전하께서 그런 걸 물어보시는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후궁 이야기를 하셔서 그러십니까? 하오나 폐하의 후궁 이야기와 신은 아무 연관이 없을 텐데요.”

“후궁 이야기를 하실 때 부황께서 스승님을 쳐다보셨습니다.”

아니, 널 쳐다본 거야.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황제가 13황자를 쳐다봤으리라 짐작하는 건 회귀 전 정보를 이용한 거니까.

그렇다면…….


“황제 폐하께서는 여기저기 다 돌아보고 계셨습니다, 전하.”

나는 다시 한번 정석대로 말하고서 최대한 눈을 동그랗고 순하게 뜨려 애썼다. 하지만 제자는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더욱 차갑게 말했다.


“그렇게 고운 표정을 꾸며내셔도 속지 않습니다.”

“고운 표정을 꾸민 게 아니라 눈을 크게 뜬 겁니다.”

“제가 또 스승님에게 속아 넘어갈 것 같습니까?”

“속아 달라고 이리 보는 게 아닙니다. 전하께서 그러셨잖아요. 제 눈을 보면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 아실 수 있다면서요. 그래서 눈을 크게 뜬 겁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서 더욱 제자를 빤히 보았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제자는 좀 부담스러운지 뒤로 반보 물러서며 명령했다.


 


“뒤로 가세요.”

뒤로 가면서 눈에 힘을 풀자, 제자는 그제야 똑바로 서면서 나를 시험하듯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물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달리 묻겠습니다. 혹시 부황께서 스승님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기색을 보인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의리 있고 충직해서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스승님을 수상하게 쳐다보진 않으셨습니까?”

“수상하게……라니요?”

내가 입을 벌리고 멍하게 쳐다보자, 제자는 다행히 더 묻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하긴. 됐습니다. 스승님께 여쭈어봤자 소용없겠지요.”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좋은 뜻이 아니란 건 확실했다. 나는 기분이 상해서 눈살을 반사적으로 구겼으나, 제자는 개의치 않고 돌아서며 지시했다.


“앞으로 부황을 뵐 때는 눈을 반 정도 감고 다니십시오.”

“예?”

미쳤나?


“어째서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

“스승님은 눈만 예쁩니다.”

뭐야?


“설명이 되었는지요?”

되겠냐? 뭐라는 거야?

* * *



“전하께서 뭐라 하셨니?”

내가 제자와 헤어져 측문으로 걸어가자, 마차 앞에 서서 기다리던 어머니가 얼른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눈이 예쁘다고 하세요.”

차마 제자의 개소리를 다 전하기 힘들어서 가장 좋은 말만 전하자, 어머니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네 용모가 참 마음에 드시나 보다.”

아니에요 어머니. 눈 빼곤 다 별로라 그랬어요 하지만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듯해서 나는 바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마차가 요씨 가문 부지로 가는 동안 가족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린화는 왜 조용한지 모르겠지만, 아마 부모님은 황제와 황후의 후궁 이야기에 관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마차가 부지 안에 들어가자, 나는 얼른 내린 다음 부모님이 본당으로 갈 때 따라가서 청했다.


“아버지. 어머니. 후궁 선발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너와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본당에 들어간 뒤 어머니가 신호하자, 하인들은 문을 닫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부모님과 나만 남게 되자 아버지는 내게 어두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께서 혹시 널 따로 불렀을 때 이 일에 관해 알려주지 않으시더냐. 그 후궁 이야기를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진심으로 하신 거냐?”

“그런 이야긴 하지 않으셨어요. 그냥 사적인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하지만 태월에서 장공주가 후궁으로 온단 이야기가 나왔으니 무슨 일이 있긴 있을 거 같아요. 만약 후궁을 새로 뽑는다면 태월 장공주가 입궁할 때 함께 들어와야 할 테니 조만간 뽑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말에 어머니는 초조하게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어쩌지요? 그리되면 린화도 후보일 텐데요.”

아버지는 그 팔 위에 자신의 다른 손을 겹쳤으나 역시나 표정이 어두웠다. 나는 마차 안에서 내내 생각한 이야기를 얼른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린화가 후궁 선발에 나가지 못하도록 정혼자를 빨리 만들어야 해요. 혹시 두 분은 린화 짝으로 정해둔 사람이 없으세요?”

“우리는 선안을 생각했지.”

어머니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는 근래에 내내 싸운 일이 생각나 흠칫했다. 하지만 곧 용기를 가지고서 다시 제안했다.


“좀 더 생각해보세요. 좋은 사내가 선안뿐만은 아니잖아요. 린화와 맺어줄 만한 성품 좋고 집안 좋고 능력 좋은 사내. 더 모르세요?”

회귀 전, 린화의 남편과의 혼담을 찾아온 건 부모님이었다. 내가 아니라. 그러니 두 분은 린화의 남편 될 사람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후보 없어요? 후보? 딱 선안만 생각하진 않으셨을 거잖아요?”

그러나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회귀 전 혼담이 오갈 때 그렇게 열렬히 린화 남편 칭찬을 해 놓고서!


“없는데.”

하지만 아버지가 거짓말하는 얼굴은 절대 아니었다. 거짓말할 상황도 아니었고. 젠장. 그럼 회귀 전에 부모님은 린화 남편을 어떻게 알아 오셨지?

그때는…… 그때는…….

그래, 생각해보니 린화의 혼담이 성사되는 건 회귀 전을 기준으로도 지금 시기가 아니긴 하다.

선안과 린화의 혼담이 진행되다가 엎어진 뒤 린화가 충격을 받고, 선안이 떠난 뒤 연락이 끊어지고, 이후 린화 남편과 혼담이 진행되는 과정이 중간에 있으니까. 지금보다 몇 해 후의 일이겠지.

그럼 부모님은 아직 린화 남편을 모르는 건가? 젠장. 그럼 진짜 큰일인데?

황제가 정말 태월 장공주가 입궁할 때 후궁을 같이 들이려면, 황실에서는 후궁을 뽑을 거란 공지를 얼마 지나지 않아 할 것이다.

후궁 선발을 고지하는 기간, 선발하는 기간, 선발 후 교육하는 기간 등을 고려해야 할 테니까. 린화 남편이 나타날 때까지 몇 해나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물론 후궁 후보가 된다고 해서 무작정 후궁으로 뽑히는 건 아니다. 황제의 눈에 들어야 한다. 그러나 린화는 객관적으로 예쁜 얼굴이다 보니 염려가 되었다.


“더 잘 생각해보세요, 아버지. 어머니. 소문으로라도 괜찮은 청년에 관해 들은 게 없으세요? 린화가 이대로 후궁이 되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 말에 부모님이 온 기억을 쥐어짜듯 인상을 찌푸리고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문이 발칵 열리더니 린화가 안으로 들어오며 외쳤다.


“후궁을 뽑는다면 난 당연히 거기에 참가할 거야.”

얘가 미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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