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많이 닮진 않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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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많이 닮진 않았군
2022.08.08.
린화와 제자의 혼담이 오갈 때. 린화와 혼인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던 내게 제자는 자기 입으로 말했다.
자기는 린화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고. 그리고 지금 제자는 자신이 한 말이 진실이라는 걸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린화가 저렇게 긴 인사말을 했는데 ‘그래’ 한 마디로 대답하고서 바로 나한테 질문을 던지다니.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행동 아닌가.
“저는요…….”
대답을 중얼거리면서도 저절로 시선이 린화 쪽으로 돌아갔다. 자존심 덩어리인 린화는 황족들에게 돌멩이 취급당하는 데 익숙하지 않을 텐데…….
역시나. 린화는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13황자가 자기 인사에 건성으로 대답한 걸 두고 자기가 무시 받았다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부모님도 역시 이런 분위기를 눈치채고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반면 제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밝게 말했다.
“전하께서 여기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전하께서 오셨으니 저는 전하와 있어야지요.”
제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돌아서서 걸어갔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눈짓으로 린화를 가리키고서 얼른 제자를 따라갔다.
그러다가 슬쩍 뒤돌아보니, 린화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쩔쩔매면서 열심히 달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영 신경 쓰여서 계속 힐긋대고 있자니, 앞서가던 제자가 언제 돌아온 건지 바로 앞에서 내게 말했다.
“가족들과 있고 싶다면 그러시지요. 굳이 제 곁에 있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그럴까요?’라고 물으려다가, 제자의 눈빛을 보고서 얼른 고개를 젓고 부인했다.
“전하 곁에 있어야지요. 전하랑 저는 한 쌍이니까요.”
“…….”
사람들 앞에서 ‘정혼할지도 모르는 사이’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서 한 쌍이라고 한 건데. 표현이 이상한가? 제자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린다.
뭐야. 나도 제자님이랑 한 쌍 하기 싫어요. 뭘 그렇게 대놓고 싫은 내색이야?
하지만 틀린 표현은 아니라 여기는지, 제자는 정정하진 않고 돌아서며 말했다.
“그러면 한눈팔지 말고 따라오시지요.”
“동생이 신경 쓰여서요.”
“어차피 사이도 안 좋잖습니까.”
“안 좋으니까 신경 쓰이는 거지요. 집에 갔는데 화풀이를 저한테 하면 저만 손해잖아요.”
“동생에겐 화풀이도 들어 주십니까?”
저 제자놈의 머릿속에선 대체 내가 어떤 성품인지 모르겠다. 왜 자기가 여기서 놀라는 거야?
“스승님은 뺨이나 벼루를 맞아도 꿋꿋하신데. 동생은 스승님을 안 닮은 모양입니다.”
자랑이다 이 황족들아. 자랑이야.
“그런데 전하께선 여기에 왜 오셨습니까?”
“오면 안 됩니까.”
“그건 아니지만요. 전하는 한 번도 여기 참석한 적이 없으…….”
말하다가 문득 이걸 말해도 되나 싶어서 나는 잠시 말을 끌었다. 회귀 전 정보와 지금 정보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회귀 전 정보를 토대로 말한 거긴 한데…… 생각해보니 다행히 이번 회귀 후 정보와도 같다.
나는 관직에 오르기 전에도 동초일에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여기에 왔으니까.
하지만 뒷말은 굳이 할 필요 없었다. 내가 말을 다 끝내기 전에 제자는 더 안 듣고 그냥 가버리고 있었으니까.
‘나쁜 놈.’
* * *
“나쁜 놈. 요요화는 진짜 나쁜 놈이에요.”
린화가 중얼거리는 말에 요 가주는 인상을 찌푸리고서 작게 꾸짖었다.
“오라버니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하지만 아버지도 보셨잖아요.”
“린화야.”
요 가주는 경고성으로 한 차례 린화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린화는 아까 13황자에게 살갑게 인사를 올렸다가 무시당한 자존심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어라 말하건 제 언니가 자기를 무시한 13황자에게 보란 듯 찰싹 붙어 가버린 모습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보셨잖아요. 13황자 전하가 절 모욕했어요. ‘보통’의 오라버니들이라면 나서서 13황자 전하에게 한마디라도 했을 거예요. 하지만 요화 오라버니는 절 위해 나서기는커녕 오히려 더 좋아하면서 전하 옆에 붙어 가버렸다고요.”
“린화야.”
이번에는 어머니가 나서서 눈을 부라리고 손을 날카롭게 잡았다.
하지만 린화는 목소리를 낮출 뿐 불만을 멈추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보통’의 오라버니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아니, ‘보통’의 자매여도 안 그래요. 다들 얼마나 사이가 좋은데요. 하지만 오라버니를 보세요. 이도 저도 아니잖아요. 평소에는 오라버니랍시고 거들먹거려 놓고서는 남자 문제만 나왔다 하면 날 무슨 걸림돌처럼 취급해요. 이게 ‘보통’의 오라버니들이 할 행동이에요?”
린화의 목소리는 사실 아주 작아서 사흠과 요 가주 정도만 가까스로 들을 크기였다.
게다가 나름대로 언니란 호칭도 빼고 말하고 있었으나, 도둑이 제 발을 저리다고 사흠과 요 가주는 괜히 주위를 자꾸 살피게 되었다.
견디지 못한 사흠은 딸의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서 다그쳤다.
“네 오라버니는 황족한테 벼루도 맞고 다닌다. 자기 이마가 깨져도 찍소리 못 하는데 거기서 뭐라 말하겠니?”
린화는 어머니의 손을 팽개치고서 이를 갈았다.
“소가주라면 자기 식구들을 지킬 수 있어야지요. 자기 이마는 못 지켜도 식구들은 지켜야 한다고요. 그럴 수 없다면 소가주를 하면 안 되지요.”
“13황자 전하가 널 무시하고 갔다고 해서 네 오라버니에게 화풀이하는 거냐.”
요 가주가 차갑게 질책하자 린화는 휙 돌아서서 달려가 버렸다.
“얘가!”
사흠은 기겁해서 그 뒤를 쫓아갔다.
요 가주 역시 아내와 딸을 따라 뛰려 했으나 지나가던 다른 일가에 가로막혀 바로 쫓지 못했다.
이후 다시 쫓아가려 했지만 “황후마마 납시오!” 하는 소리에, 요 가주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요 가주는 그러나 허리 숙여 인사하는 채로도 귀와 정신은 아내와 딸이 뛰어간 쪽을 향했다.
요 가주는 매년 아내와 이곳에 온 걸 떠올리며 괜찮을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 * *
하지만 사흠은 요 가주와 흡사한 이유로 린화를 놓치고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나타났을 때 하던 걸 멈추고 모두 인사를 올려야 한단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 이런 걸 모르는 린화는 황후가 나타났단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자 쏙 몸을 앞으로 굽혀서 사람들이 모인 회장을 빠져나갔다.
이후 린화는 최대한 인적이 없는 길을 따라가 수풀 사이에 몸을 쪼그리고서 훌쩍였다.
‘부끄러워.’
요씨 가문의 적녀이자 요 가주의 ‘하나뿐인’ 귀중한 딸로 태어난 린화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명문가의 또래 친구들조차 린화에게 한 수 굽히고 들어가 주었다.
사이 나쁜 친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조차 뒤에서 험담할망정 앞에서 대놓고 린화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13황자는 린화가 그의 외모에 놀라서 온갖 찬양을 늘어놓았는데 ‘그래’ 한마디만 하고 바로 요화에게 말을 걸었다. 린화를 무시한 것이다.
거기에 오라버니 행세 중인 언니란 작자는 실실 웃으면서 좋다고 13황자를 따라가 버렸다.
린화는 이를 갈았다.
‘13황자와 내가 혼인하지 못하게 열렬히 막더라니. 이유가 있었어. 13황자가 잘생겼으니까 내가 그 황자와 혼인하지 못하게 막으려던 거야. 요요화는 내게 좋은 일이 생기는 건 다 막고 싶어 하니까.’
린화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여전히 사모하는 건 선안이 맞았다. 하지만 선안은 9황녀와 정혼했고 거기에 자신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러니 마음을 어떻게든 다른 곳에 돌려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내와 혼인해야 할 텐데, 원하지 않는 사태와 혼인해야 한다면 최소한 13황자만큼 아름답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얼굴이라면 결국에는 선안에 대한 마음도 접고 정을 붙이게 될지도 모르는데.
‘언니는 늘 그래. 좋은 건 자기가 다 가져가지. 소가주 자리도, 가문 재산도, 지위도. 그러면서도 포기해야 할 것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해. 남장하고 지내면서 잘생긴 남자까지 자기가 차지하려 하다니.’
“누군데 여기서 울고 있는 게냐.”
그러다 린화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머리를 들었다.
값비싸 보이는 의복을 입은 화려하고 고귀한 인상의 수려한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보다 열 살쯤 많아 보이는 얼굴에 키가 크고 눈빛이 서늘한 사내였다.
사내의 뒤에는 태감이 서 있었다.
낯선 사내와 외딴곳에서 마주하게 된 데 놀라 허둥지둥하던 린화는 그 수려한 남자가 아까 본 13황자와 상당히 닮은 얼굴이란 걸 알아차리고 굳었다. 종합적으로 판단컨대 남자는 아무래도 13황자의 형님 같았다.
“황자님 중 하나세요……?”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묻자, 다가오던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가까이 오는 거 아닌가. 린화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황자를 뒤에 두고 달아나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상대가 태감을 데리고 오니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그러는 사이. 남자는 더 가까이 다가와서 린화를 내려다보았다.
린화는 일단 상대가 황족은 확실해 보여서 주춤주춤 일어섰다.
‘황자가 아니더라도 황실 피를 잇긴 했을 거야. 13황자는 모친 쪽 친인척이 아예 없잖아.’
생각을 마친 린화는 얼른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고서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아까는 13황자의 얼굴에 홀려서, 그다음에는 수치심 때문에 제대로 황가에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서 떨어져 혼자 있다 보니 문득 겁이 나면서 제대로 처신해야 한단 생각이 바짝 든 것이다.
게다가 저 아름답고 낯선 남자 앞에서 단정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요씨 가문의 규수답게 굴어야 했다.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고 그런 요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차갑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올라오며 말했다.
“넌 필시 요요화의 동생이겠구나.”
“오라버니를 아세요?”
“모를 리가.”
남자는 더욱 가까이 다가오더니 린화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묘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요요화와 닮았구나. 생각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저에 대해 생각하셨다고요?”
린화는 상대가 한 말에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때였다. 다른 태감이 뒤쪽에서 다가오더니 남자에게 말했다.
“폐하. 황후마마께서 폐하를 찾고 계십니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
린화는 폐하 소리에 빠르게 얼어붙었다. 황제였다고?
열 살 정도만 많아 보이는데? 황제라면 40대 중반인가 초중반이던가 그렇지 않나?
린화는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셨습니까. 소녀가 입궁이 처음이라 폐하를 알아뵙지 못하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일어나라.”
린화는 일어나서 슬그머니 황제를 자세히 보려 했으나, 황제는 돌아서서 자신을 데리러 온 태감과 함께 연회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린화는 그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황제의 모습이 사라졌을 즈음. 얼른 자신도 연회장으로 걸어갔다.
‘황가 사람들은 다 잘생긴 건가?’
린화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걸어가며 아까 가족들이 있던 곳으로 가려 했다. 제정신을 차리고 나니 혼자 이렇게 덩그러니 나와 있을 게 아니었다.
그러다 린화는 커다란 나무 아래쪽에 비교적 여유롭게 서 있는 언니와 13황자를 발견했다. 부모님과 언니 사이의 거리를 가늠한 린화는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