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13황자의 손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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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13황자의 손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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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13황자의 손수건
2022.07.25.
제자가 이런 상황에서 날 도와줄 리가 없다. 지금 곤란한 상황이긴 제자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는 내가 괴로워하는 걸 좋아할 인간이니까.
어쩐다. 아니라고 소문을 부인하면 어떻게 될까. 그럴 경우 일이 잘 풀리면? 13황자와 린화는 그대로 혼인할 테고.
나는 황제가 자기 밑으로 배속을 바꾸어 버릴 테고. 13황자는 황제를 폐위시킬 때 날 죽이겠지.
소문을 부인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는…… 일어날 일들이 많지. 다 안 좋은 쪽으로.
그렇다면 소문을 긍정하면? 아이구야 맙소사.
나는 회귀 전 기억을 최대한 쥐어짜 냈다. 제자가 7황자를 어떻게 처리했더라? 어쩌면 그 과정에 지금 사태를 해결할 방안이 있는지도 모른다.
회귀 전 정보를 제자의 뒷마당에서 사용한다면 제자에게 의심을 사겠지만, 당장의 위기는 넘겨야지.
‘7황자가 낙마하고 이후에…….’
“형님.”
그때 켜켜이 모인 황족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난 쪽을 보니 제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이 닥쳤는데도 거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제자는 느긋해 보이지도 않았고 화나 보이지도 않았고 불안해 보이지도 않았다. 명복을 빌러 줄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듯 무심한 눈길이었다.
거기에 흠칫한 7황자는 제자에게는 나한테 하듯 다짜고짜 질문을 퍼붓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7황자는 자신이 무시하는 13황자에게 잠깐 멈칫한 데 기분이 상했는지 날 내버려두고 13황자의 앞으로 다가가 대치하듯 마주 서서 물었다.
“오, 아우가 대신 대답해 줄 텐가?”
“예. 혼담이 오가는 게 맞습니다.”
제자는 나와 달리 지체 없이 수긍했다. 그 말에 호기심을 가지고 모인 황족들이 동시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웅성거렸다.
7황자 역시 13황자가 대번에 수긍할 줄 몰랐는지 곧장 공격을 이어가지 못했다. 7황자는 한 박자를 놓치고서야 조롱하는 미소를 띠고서 입을 열었다.
“그럼-.”
“부황과 황후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와 스승님이 서로 깊게 사모하는 걸 알게 되셔서요. 두 분의 은혜에 늘 감읍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13황자는 7황자가 말을 꺼내려 하자마자 교묘하게 치고 들어가 먼저 말을 뱉어버렸다. 심지어 그는 7황자가 끼어들기 곤란하도록 황제와 황후의 이름부터 팔아먹었다.
힘없는 말단 신하인 나와 달리, 황자인 제자는 자기 아버지와 황후 이름을 팔아먹는데 아주 거침이 없었다.
7황자가 거기에 당황한 사이. 9황녀가 얼른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요 이국사와 열셋째 사이에 혼담이 오가는 건 맞아, 오라버니. 나도 어마마마가 그 이야기 하시는 걸 얼핏 들었어.”
황후의 친자식인 9황녀가 여기서 13황자의 말을 두둔하고 나오자 7황자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황제와 황후 이름을 거론했는데 무어라 한 마디를 보태는 건 황제의 결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거였다.
나와 13황자의 혼사에 대해 황제에게 반발해 볼 수 있는 건 언관이나 용기 있는 대신들 정도다.
황자들은 황제의 통치에 관여하려 든단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황제가 먼저 질문하기 전엔 황제의 결정에 말을 얹지 않는 게 나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3황자도 슬쩍 나서서 이 부분을 짚어주었다.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결정하신 일이라면 이유가 있겠지. 두 분이 조용하게 일을 진행하려 했는데 우리가 끼어들면 불쾌해하실 거다.”
이렇게까지 되자 7황자와 친한 다른 황족들도 그냥 가는 게 낫다고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그만하고 가지요 형님.”
“네. 이 일을 알게 되면 부황께서 언짢아하실지도 모릅니다.”
6황자도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혼담은 부모가 나서서 진행하는 법이지. 애초에 이국사와 열셋째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면 이 둘이 나서서 이끌겠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잖아.”
7황자와 친한 11황자와 12황자가 겁이 나 졸라대고 6황자가 구박하듯 말하자, 7황자도 자기 고집대로 계속 나아가긴 어려운지 결국 뒤로 물러났다.
“부황께서 허하신 일이라면 사정이 있겠지.”
이래서 분위기가 중요한 거야. 13황자가 황제와 황후 이야기를 꺼내기 전엔 혼사가 부모 일이란 걸 다들 이론으로는 알면서도 7황자가 날 추궁하는 걸 막지 못했잖아.
7황자가 자신이 데려온 이들을 이끌고 나가 버리자, 얼결에 7황자를 따라왔던 다른 황족들도 우르르 빠져나갔다.
나가기 전, 9황녀와 6황자, 3황자가 각기 내게 자기들만의 신호를 보냈다. 대충 힘내라던가, 다행이라던가, 그런 표시들 같았다.
세 사람에게 동시에 대답하긴 힘들어서 나는 살짝 고개만 숙였다. 이러면 다 자기에게 건네는 신호라 생각하겠지.
이후 황족들이 모두 다 나가자 월무궁은 평소의 적막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되찾았다. 드디어. 이전에는 을씨년스럽다고 여겼던 풍경이 지금 와서는 고요하고 정취가 좋게 여겨지는구나.
나는 반쯤 안도했다. 하지만 마음을 온전히 놓지는 못하고 제자를 바라보았다. 단 몇 마디로 7황자를 돌려보낸 13황자는 여전히 제자리를 지킨 채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저 제자. 자연스럽게 내 남장 이야기는 아예 흘려 넘겨 버렸네…….’
고맙다고 말해야겠지? 날 위해 나선 건 아니겠지만.
나는 주춤주춤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고맙다고 말하기 전, 침묵하던 제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문과 가산을 친하지도 않은 친척에게 통째로 넘기고 싶진 않으시겠지요.”
“예?”
“그럴 마음이 없다면 앞으론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도 이 제자를 사모하는 시늉을 계속하셔야 합니다.”
“예?”
“이 제자와 스승님이 지나치게 사모해 혼인을 허락받을 거라 둘러대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가까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번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스승님의 남장 소문을 떠올릴 겁니다.”
“저는 전하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래요.”
제자는 한쪽 입꼬리만 비웃듯 올리더니, 전에 벼루에 맞은 내 상처 부근 머리카락을 슬쩍 들춰보며 말을 마쳤다.
“그렇게요.”
“머, 머리는 왜 보십니까?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하세요?”
“제자가 챙겨드린 연고를 잘 바르고 있나 확인한 겁니다.”
“아.”
머리카락을 내린 제자는 나를 이상하단 눈으로 한번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수건을 왜 내미나 싶어서 그와 손수건을 번갈아 쳐다보자 제자가 차갑게 말했다.
“제자를 사모하신다지 않았습니까?”
“!”
“아니라면 흉내라도 내셔야지요.”
“사모하는 거랑 손수건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냉큼 받아다 품에 넣으셔야지요.”
“!”
며칠 전 3황자 어깨 너머로 보였던 그 빨간 낙엽은 제자가 맞았구나! 아니, 그보다 그 거리에서 내가 손수건 챙기는 게 보였다고? 저놈의 눈알은 독수린가!
“아직도 안 챙기시고 있습니다.”
나는 얼른 손수건을 가져다가 입을 연거푸 맞춘 다음 품 안에 넣고 제자를 쳐다보았다.
“이, 이렇게요?”
서늘한 표정을 하던 제자는 잠시 나를 ‘저게 미쳤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휙 돌아서며 말했다.
“입까지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X새끼! 무안 주기는!
* * *
제자는 이 와중에도 수업을 다 들었다. 그리고 수업 시간은 내게도 의외로 마음에 평화를 찾아다 주었다.
처음에는 제자의 도움과 공개적인 ‘우리 사모하는 사이예요’ 선언, 7황자의 분노를 잠시 미룬 일 등등에 정신이 없었다.
“옛 성현이 말씀하시길, 아니 근데 전하.”
자꾸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다가도 ‘아니 근데 전하’라는 말이 툭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제자는 자기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서 구박했다.
“성현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가끔은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분들도 다 사람인걸요.”
그런데 수업을 하면서 잘 생각해보니, 이 일로 린화와 13황자의 혼담은 확신하게 엎어진 게 아닌가.
황후가 린화와 13황자의 혼담을 엎기 위해 고의로 저지른 일이고 덕택에 나와 가문이 위험해질 뻔했지만, 그래도 내게도 최소한의 이득은 있는 셈이었다.
‘사직서는 아직은 가지고 있어야겠네. 그리고 황후를 조심해야겠어.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해 대번에 내 비밀을 이렇게 쉽게 이용하다니…….’
* * *
요화는 이번 일로 대번에 황후를 의심했으나, 황제에게는 의심의 폭이 조금 더 넓었다.
황제는 이 일로 큰 위험에 처할 뻔했던 요요화와 그 부모를 제외한 모두를 다 의심했다.
황제가 혐의를 바로 황후에게 보내지 않은 건, 그가 회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당연히 황자들 중에 후계자가 나올 거라 여기고 있었기에 황녀만 넷인 황후를 암투에 끼워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황후가 13황자와 린화의 혼인을 싫어할 거란 짐작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던 황후는 8황녀에게 월무궁에서의 일이 어떻게 마무리 지어졌는지 듣자마자 바로 황제를 찾아갔다.
“황후는 무슨 일로 자꾸 여기 오는 거요?”
황제는 기분이 좋지 않아 무뚝뚝하게 물었으나, 황후는 모른 척 다가가 속상하단 투로 말문을 열었다.
“폐하와 신첩이 열셋째와 요요화를 혼인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더군요. 그 일 때문에 일곱째가 월무궁에 찾아가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고 합니다. 열셋째가 자신이 요요화를 사모한다고 덮어써서 소란을 잠재웠다지요.”
황제는 언짢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이야기는 들었소.”
여기서 움츠리는 대신 황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요씨 가문 차녀와 우리 열셋째가 혼담을 주고받으려는 때에 그런 소문이 나다니요.”
“…….”
“요씨 가문에서 둘째를 너무 철없이 길렀습니다. 이 일로 요 이국사가 큰 곤란에 빠질지도 모르는데. 너무 마음대로 행동했어요.”
황후의 묘한 말에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고서 물었다.
“무슨 소리요?”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은 당연히 그 집 둘째뿐이지 않습니까.”
“궁전에 드나들지도 못하는 규수가 궁궐을 뒤흔든 소문을 어찌 냈단 거요?”
“마음만 잘 먹는다면 낼 방도는 많겠지요. 입궐했다 퇴궐하는 신하들이 하나둘인가요? 게다가 요씨 가문 적차녀라면 친분 있는 명문가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지만 그 요씨 차녀가 굳이 이런 위험을 무릅쓸 일이 없지 않나?”
“모르지요. 언니가 13황자 사모하는 걸 아니까 양보하기 위해 이런 걸지도 모르고. 어쩌면 본인이 13황자를 꺼려서 이런 걸지도 모르고요. 안타깝지만 열셋째는 친모와 외가가 없어서…… 괜찮은 가문에서는 열셋째를 사위로 들이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요.”
황제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는 부채를 꺼내 황제의 얼굴에 살살 부쳐 주면서 위로하듯 말했다.
“그래도 너무 화내지 마시지요, 폐하. 규방에서만 지낸 낭자이니 자기 말 한마디가 이렇게 폐하의 심기를 상하게 할 줄은 몰랐겠지요.”
“그렇겠지. 하지만 괘씸하군.”
황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