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공평한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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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공평한 자매
2022.07.14.
평소라면 황후는 황제가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황제를 설득했을 것이다. 자신의 의견으로 황제를 설득하려 든다는 티가 되도록 나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여유를 차릴 때가 아니었다. 교안궁 태직전에 들어선 황후는 황제와 잠시 차를 마셨으나, 반각을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9황녀의 혼담이 확실해졌으니 이제 요요화와 열셋째도 정혼 시켜야겠지요. 둘 다 나이가 있으니 얼른 사주단자를 교환하는 게 좋겠습니다.”
대놓고 어전의 궁인이 말을 전해주었단 이야기를 하긴 힘들기에 황후는 우선 모른 척 운을 띄웠다.
황제는 뜨거운 오미자차를 불어 마시다가, 황후의 말을 듣자 고개를 젓고서 말했다.
“모르겠소.”
“모르겠다니요?”
“생각해보니 요요화는 과거에 높은 성적으로 급제한 인재 아니오. 혼인해서 황자비가 되기보단 관직에 계속 나와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되오.”
황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폐하께서 인재를 아끼시니 그렇게 생각하실 만하지요.”
“그렇지?”
“하지만 폐하. 이국사와 13황자를 혼인시키기로 한 건 두 사람 모두 만족스러운 혼인을 할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요 이국사가 열셋째를 연모하고 있고요.”
“…….”
“그런 상황에서 이국사의 여동생을 13황자와 혼인시켜 버리면 이국사가 속상하지 않을까요?”
불쾌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황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물러났겠지만, 황후는 이번에는 일부러 눈치 없는 척 말을 이었다.
“13황자는 이국사의 여동생과 혼인해도 상관없겠지요. 하지만 이국사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이처럼 좋은 혼처를 찾기 어려울 겁니다, 폐하. 게다가 사모하는 사람이 자신의 제부가 되다니. 너무 가여워요.”
황후는 달리 더 댈 핑계가 없다는 게 화가 났다. 요요화 핑계뿐만이 아니라 13황자의 핑계도 댈 수 있어야 하는데.
두 사람이 서로 사모하는 사이라 둘러댄다면 더욱 좋겠지만, 아직 13황자는 요요화를 함께 사모한단 이야기가 없기에 그 부분은 거론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황후는 황제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진 걸 알아차렸다. 평소 황제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그게 의아해 더 말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으려니, 황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꼭 누군가와 혼인해야 할 필요는 없지. 요요화는 계속 혼인하지 않고 내 측근으로 지내면 되지 않소.”
“이국사의 능력이 아까우신 거라면 차라리 이국사가 남장을 풀고도 관직에 계속 있을 수 있도록 해주시지요. 그러면 되지 않을까요? 이미 여인들을 뽑는 관직도 몇 개 있으니 범위를 조금씩 넓히면 될 텐데요.”
황후는 슬며시 다시 거론해 보았으나 황제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순간 황후는 서늘하고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요요화의 능력이 아까우니 혼인시키고 싶지 않다면서.
혼인한 다음 여인의 모습으로 관직에 두는 건 싫다?
황제가 집중하는 면이 ‘능력이 아깝다’ 쪽이 아니라 ‘혼인을 시키지 않겠다’ 쪽으로 보이는 건…… 그녀의 착각일까?
* * *
‘착각이 아니겠지.’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제자가 날 대하던 눈빛과 말투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떠올렸다.
그 장면 장면에서 최대한 ‘제자가 나한테 엄청 화나진 않았을 거야’라는 증거를 찾아내려 애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제자가 날 보던 눈빛은 단어로 표현하자면 ‘경멸’이었다.
‘사는 거 진짜 쉽지 않구나.’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수많은 사람이 다 내가 제자를 연모한다고 오해하는데, 제자 본인은 절대로 믿지 않으려 들다니.
어쨌든 그 고뇌의 시간은 벼루에 맞은 내 머리통에 무리가 되었고, 결국 나는 다음날 또 앓아누웠다.
그다음 날에는 조금 괜찮아졌지만, 제자와 수업이 있는 날이 아니어서 제자의 화가 풀렸는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방 안에만 있자니 계속해서 제자의 눈빛만 분석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머리가 힘들어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와 느릿하게 저택 안을 산책하고 다녔다.
그런데 막 뒤뜰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소가주님! 소가주님!”
내 사내종 월강이 소처럼 달려오더니 다급히 말했다.
“지금 황궁에서 온 태감이 나리와 마님을 만나 뵙고 있습니다.”
“뭐? 송 태감이?”
“송 태감인진 모르겠지만 태감은 확실합니다!”
나는 월강의 부축을 받고서 잰걸음으로 본당에 갔다.
본당 앞으로 가 보니, 송 태감이 데리고 다니는 급수 낮은 태감이 계단 아래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송 태감이 온 게 확실했다.
날 알아본 그 태감이 읍을 해 인사했다. 나도 속내를 감추고 바로 같이 인사했으나, 속으로는 비명을 질렀다.
저자가 저 앞을 지키고 서 있으니 대화를 엿들으러 들어갈 수도 없었다.
‘젠장. 린화와 혼인한단 이야기가 나온 게 고작 이틀 전인데. 설마 벌써 혼담을 넣으러 온 거야?’
제발 황제가 마음이 바뀌어서 다시 나와 13황자의 혼담을 진행하기를! 나는 속으로 기도하고서 본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이후 태감들이 돌아가자마자 나는 얼른 본당으로 달려갔다. 본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두운 얼굴로 탁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송 태감이 뭐라 얘기하던가요?”
너무 급한 안건인지라 나는 일단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질문부터 던졌다.
아버지는 바로 대답해주는 대신 나를 착잡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수길 어멈에게 말했다.
“린화를 데려오거라.”
“네, 나리.”
린화 데려오래. 젠장. 역시 린화 얘기를 하고 갔나 봐. 내 얘기만 했다면 린화를 데려오라고 할 리 없잖아?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자니, 어머니가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앉거라. 또 쓰러질라.”
의자에 앉자 다른 시비가 회로차를 가져다주었다.
차를 반 정도 마셨을 즈음, 린화가 어리둥절해서 나타났다.
“저는 왜 부르신 거예요?”
어머니는 린화에게도 내 옆에 앉으라 한 다음, 아버지와 눈빛을 교환했다. 린화의 앞에도 회로차가 놓였다.
이후 측근들을 포함해 모든 하인을 내보낸 뒤. 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어 13황자 전하의 혼담 상대를 요화에서 린화로 바꾸자 하시는구나.”
린화는 차를 마시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입 밖으로 뱉고 말았다. 콜록거리는 린화의 등을 어머니가 얼른 두드려주었다.
린화는 한참을 콜록거리다가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갑자기 왜요?”
“요화의 재주가 그냥 묻히기엔 아까우니 곁에 두고 잘 훈련시켜 측근으로 만들고 싶으시대.”
“아하. 그래요.”
린화는 내 칭찬이 나오자 반사적으로 한 번 빈정거린 다음 재차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혼담은 왜 나한테로 옮기는데요?”
“요화가 전하와 혼인하면 남장을 벗어야 하니까.”
“…….”
어머니는 슬픈 표정으로 내 손을 꽉 잡았다.
“송 태감에게 얘기했어. 요화가 13황자 전하를 사모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지만 송 태감은 폐하께선 요화가 그런 감정보다는 큰일에 더 관심을 기울이시길 바란대.”
젠장. 큰일은 무슨. 황제의 미래를 아는 내게는 황제의 이 행보가 물귀신으로만 보인다.
나는 다급하게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전 13황자 전하가 좋습니다. 그분과 혼인하고 싶어요. 거절해주세요.”
나는 남장하고 있기에 대외적으로 황제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린화라면, 부모님이 조금 무리를 하면 거절할 수 있다. 대신들이 황가와 오가는 혼담을 거절할 때 사용하는 가장 큰 패가 있지 않은가.
‘이미 정혼자가 있습니다’라는 거짓말.
그런데 부모님이 내 부탁에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전 혼인하고 싶어요.”
침묵하던 린화가 찻잔을 달칵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놀라서 린화를 보았고, 부모님 역시도 당황한 얼굴로 린화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냐. 13황자 전하와 혼인하겠다니?”
“네 언니가 13황자 전하를 사모한다는데 무슨 소리니 린화야.”
설마……? 나는 불길한 마음이 들어서 린화를 보았다.
린화는 선안이 9황녀와 혼인하게 된 후로 내게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 얘, 진짜로 내가 13황자를 사모한다고 생각해서 이걸로 복수하려는 건가? 내가 13황자와 혼인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린화는 태연히 대답했다.
“저도 13황자 전하를 사모해요.”
아버지는 이마를 짚었고, 어머니는 당황한 얼굴로 반박했다.
“하지만 넌 요화가 13황자의 스승이 된 후로 내내 13황자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했잖아. 멍청이에다 아둔하고 세력도 없는 황자라고.”
“그거야 언니가 황자 전하의 스승이 되었다고 하니 샘이 나서 한 말이지요. 원래는 좋아해요.”
어머니는 바보가 아니었다. 며칠 전까지 선안 이야기를 하며 울고불고하던 린화가 저렇게 나오는데, 믿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 역시도 린화의 말을 전혀 믿지 못하는 듯했으나, 린화는 꿋꿋하게 그대로 주장했다.
“혼담을 받아들여 주세요. 정혼자가 있단 거짓말을 하실 생각이라면 그만두시고요. 아버지랑 어머니가 그런 거짓말을 하신다면 제가 태감이 지나갈 때 직접 나서서 정혼자 따윈 없다고 말할 거예요.”
“요린화!”
화난 아버지가 탁상을 내리쳤다. 쾅 소리가 나며 나와 린화 앞의 찻잔이 요란스레 울렸다.
그러나 린화는 꼿꼿하게 앉아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요. 황제 폐하를 속이는 건 나쁜 짓이에요. 이미 우리 요씨 가문은 언니를 남장시키면서 폐하께 큰 은덕을 입었어요. 그런데 또 속이다니요. 폐하를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속이다니. 요씨 가문은 충신 가문하고는 거리가 머네요?”
* * *
아버지가 나와 린화 모두에게 나가라 지시한 뒤.
린화와 나는 서로 약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이 없는 빈방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둘이 자매 같을 때는 이렇게 서로 싸울 때뿐이다.
주위에 사람을 물리고 문을 닫아걸자마자 나는 린화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항의했다.
“너 뭐 하자는 거야? 네가 선안을 사랑했단 건 모두가 알아. 그런데 인제 와서 13황자를 사모했다니?”
“선안 오라버니는 혼인하잖아. 그러면 나도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지. 언제까지 선안 오라버니 뒤통수만 보겠어?”
“너 새로운 사랑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잖아. 내가 13황자 전하를 사모한다니까 이러는 거잖아. 아니야?”
“잘 아네.”
“!”
“내가 13황자와 혼인하면 언니도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겠지? 언니가 사랑하는 사람을 뺏을 수 있다니. 너무 기뻐.”
“야 요린화! 너 진짜…….”
“나도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하지 못하고 언니도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하지 못하고. 좋네. 우리 꼭 그러자.”
“네가 13황자와 혼인하면 내가 죽을지도 몰라. 그래도 해야겠어?”
“언니는 안 죽어. 언니가 스스로를 얼마나 아끼는데 그깟 일로 죽겠어? 사랑 뺏긴다고 죽을 사람 아니야.”
당연히 스스로 안 죽지! 내가 스스로 죽는 게 아니라 13황자가 날 죽일 거니 그러지!
갑갑해하는 날 보며, 린화가 차갑게 웃었다.
“뭘 그렇게 손해 보는 것처럼 굴어? 언니는 가문을 물려받을 거잖아. 가문도 물려받는데 사랑도 차지하려고? 너무하잖아. 싫어. 나한테서는 유일한 소원인 사람마저 뺏어가 놓고서. 치사해. 안 돼. 언니도 하나는 내놔. 그래야 공평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