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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절 기억하세요? (36/159)


37화. 절 기억하세요?
2022.07.07.



 
나는 너무 놀라서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황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13황자가 나이 들면 저런 모습일까 싶은 황제는 입꼬리를 올린 채 나를 뚫어져라 같이 바라보았다.

9황녀 일이 잘 해결된 탓인지 벼루를 집어 던졌을 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니, 그런데 그 좋은 기분이 왜 갑자기 내 보직 옮기기로 튄 거지?

내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황제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너는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했지. 지금 권화학에 들어가긴 애매하니, 네가 높은 관직을 바라볼 마음이 있다면 비서부로 옮겨주겠다.”

이건 회귀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그를 계속 쳐다만 보다가, 너무 긴 침묵에 황제가 불쾌해하는 듯하자 일단 되는 대로 대답했다.


“그, 래도 혼담이 오갔지 않습니까. 이미 저희 가문에서는 저와 13황자 전하가 혼인하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인제 와서 혼사가 어긋난다면 가문 어른들이 실망할 겁니다, 폐하.”

“네게 한 살 어린 누이가 있다 들었는데.”

“!”

“아직 사주단자를 주고받지도 않았고 공식적으로 혼담이 오가지도 않았지. 네 누이를 13황자와 혼인시키면 가문 어른들도 실망하지 않을 거다.”

나는 남 눈치를 잘 보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은 황제가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다.

이런 일이 생기기 전이라면 요씨 가문의 적차녀를 구박받는 13황자와 혼인시키잔 말을 꺼내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일단 혼담이 오간 데다, 황제가 요씨 가문의 비밀을 쥐고 있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내 남장 비밀 때문에라도 우리 부모님이 이 혼담을 거절하진 못할 거라 여기는 것이다.

나는 다급히 시선을 내렸다. 심장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뛰어대기 시작했다.

린화와 제자가 혼인한다고? 린화와 제자가? 그리고 나는 황제의 비서부로 가서 측근이 될 준비를 해? 미쳤다. 안 된다.

린화와 제자의 정혼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니 모르겠다. 린화와 제자가 혼인한다면, 어쩌면 제자는 린화를 보아서라도 이번 생엔 날 죽이지 않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반대로 나에 대한 복수심으로 린화를 구박할지도 모른다. 둘 다 날 싫어하니 오히려 뜻이 잘 맞아 사이가 좋아질 수도 있고.

이 두 사람의 혼례는 어떤 방식으로 굴러갈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문제는 나였다. 제자는 회귀 전 자신의 측근을 하나하나 다시 모으고 있다. 이번에도 황위를 노릴 거란 전조였다.

회귀 전, 힘을 기른 13황자는 형제자매들을 쳐내고 황제를 폐위시켰다. 제자는 그 과정에서 황제의 측근들 중 아주 쓸만한 인재 몇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쳐내버렸다.

황제의 사람이 되는 건 썩은 줄에 매달려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내키지 않는 모양이구나.”

으악! 황제 목소리가 그사이에 더욱 내려갔다. 당연히 내가 ‘아이구 황송합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하고 자기 제안을 넙죽 받아들이리라 기대한 모양이다.

하지만 황제가 서늘하게 쏘아보든 말든 이건 당장 정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왜 13황자랑 혼인하겠다 했는데. 살려고! 살려고 그런 건데! 옆길로 죽으러 가고 싶진 않다고!


“송구합니다, 폐하. 폐하의 측근이 되는 일이라면 당연히 기쁩니다. 하오나 소인은 13황자 전하를 죽을힘을 다해 사모하고 있습니다. 소인은 13황자 전하의 그림자만 봐도 심장이 미어질 만큼 그분을 연모합니다. 그래서 무어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13황자를 또 팔아먹었다. 그러나 황제는 내 그런 대답까지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단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내 대답을 기다릴 때보다 ‘13황자를 사모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불쾌해하는 눈치였다.

혼인도 하지 않았으면서 누구를 사모하니 어쩌니 하는 게 영 정숙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걸까?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버텼다. 송 태감이 입을 쩍 벌리고서 있는 걸 보면서도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

그렇게 한참의 침묵 후.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경고했다.


“물러가라. 물러가서 다시 한번 곰곰이 짐의 말을 생각해 보아라. 어느 방향이 너와 요씨 가문의 미래에 좋을지.”

 

* * *

협박이지? 협박이었을 거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후환을 두려워하란 협박이 분명하다.

나는 멍하게 걸어가면서 대체 일이 왜 또 이렇게 꼬인 건가 생각했다. 나서서 선안을 두둔하지 말았어야 했나?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황제에게 이런 제안을 받진 않았겠지만, 선안이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당시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였다. 그런데 왜 여기서 하필 황제가 튀어나오지?

회귀 전의 황제는 내게 별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잖아? 그냥 마음에 안 드는 황자의 스승 정도로만 여겼잖아? 왜 갑자기 내 의리에 감동한 거냐고! 린화는 나더러 의리 없다고 욕하고 있는데!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걸어갔을까. 정신적인 공격을 너무 받아서인지 다리에 힘이 빠지고 다시 속이 메슥거려져서, 나는 더 걷지 못하고 근처 화원으로 들어가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길거리에 앉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고서 숨을 고르려 할 때였다.


“요화.”

하늘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뜻밖에도 3황자가 나무 위에 있었다. 몸 약한 3황자가!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쳐다보고 있자니 그가 몸을 약간 뒤틀면서, 나뭇잎이 내 입안으로 뚝 떨어졌다.


“퉤퉤!”

기겁해서 이파리를 뱉고 입을 마구 문지르고 있자니 나뭇잎 무더기와 함께 3황자가 옆으로 뚝 떨어졌다.

나는 입을 마구 닦다가 다시 기겁해서 옆으로 쓰러졌다. 3황자는 그런 나를 보며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이국사는 볼 때마다 밝군.”

밝다니요 전하. 제 주위를 둘러싼 먹구름들 못 보셨습니까. 하지만 3황자가 내 쪽으로 손을 뻗는 바람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3황자의 손. 길고 예쁜 3황자의 손. 곱디고운 3황자의 손. 나는 3황자의 손이 코앞에 다가온 걸 멍하게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3황자를 보았다.

내 앞에 3황자의 손이 있다는 건 인식이 되는데. 그다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왜 나한테 손을 뻗지? 손을 만져봐도 된단 건가? 자기 손을 내게 보여주는 건가? 자기는 손도 곱다고 하는 건가? 아름다운 손을 찬양하면 되는 걸까?

멍하니 그렇게 보고 있자니, 3황자가 부드럽게 물었다.


“잡고 일어나야지.”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3황자가 손을 보여주기 위해 뻗었을 리가 없단 걸 깨닫고서 얼른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차마 저 고운 손을 잡고 일어날 수가 없어서 흙을 짚고 일어났다.

그러고서 보니 3황자가 좀 민망해하는 기색이기에, 나는 얼른 그의 손을 잡을 수 없던 이유를 설명드렸다.


“전하는 손이 이리 곱고 예쁘고 깨끗하신데, 저는 지금 손이 흙투성이입니다. 제 손으로 전하의 이 깨끗한 손을 잡고 일어난다면 전하의 손이 지저분해질 겁니다. 그래서 잡지 않은 것이니, 제발 슬픈 표정 하지 마세요.”

“?”

3황자는 내 말을 듣자 오해가 풀렸는지,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그대는 볼 때마다 씩씩하군.”

“예?”

활을 쏘면 놀던 날 이야기를 하나? 그날 내가 씩씩했나? 9황녀의 관심에서 멀어지느라 비겁한 모습을 조금 보였을 뿐 씩씩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3황자의 ‘볼 때마다 씩씩’이란 말에 꽂혀서 멍하게 있자니, 3황자가 나무에 올라갔다 내려오느라 흐트러진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피며 말했다.


“기억나지 않나 보군. 하긴. 아주 어릴 때 일이니.”

“예? 어, 어릴 때 일이라니요?”

“그대가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 내가 자네 집에 찾아간 적이 있거든.”

3황자는 그 말을 하면서 나를 보았고,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턱이 떨어질 뻔했다. 3황자가 그 일을…… 기억해?

* * *

늘 남장하고 살았던 내가 한 해에 한 번 여인의 복색으로 돌아올 때가 있다. 바로 조상님들에게 인사 올릴 때다.

족보에 여아로 올라가 있으니까, 위패에 인사 올릴 땐 여인의 옷을 입어도 된단 부모님의 괴상한 논리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상님들에게 인사하는 건 핑계고, 부모님은 그저 내가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를 대비해 내가 여인의 의복에 너무 문외한이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던 듯하다.

날 사내로 키우면서도 족보에 여인으로 올려둔 것처럼 말이다.

그날도 그랬다. 부모님은 조상님들에게 인사할 준비를 끝낸 다음 안채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휴가를 주어서 모두 내보냈다. 나는 린화와 함께 위패에 절을 올렸다.

이후 부모님과 린화는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안채 밖으로 나갔으나, 나는 평소 입던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홀로 안채에 남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지냈다. 옷만 갈아입은 터라 머리 장식은 모두 그대로였다.

그러다가 나무 위에 올라가 내려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삐죽빼죽한 긴 머리 장식이 나무 어딘가에 걸려버린 탓이었다.

소리쳤다가 다른 사람들이 올까 봐 부모님이 올 때까지 끙끙거리며 앓는 내 눈에 담 건너편 나무에 있는 한 소년이 보였다.

소년은 3황자였는데, 그의 어머니 쪽이 우리 가문과 먼 친척이라 잠시 방문한 거였다. 소년은 나무 위에서 하늘을 보고 있다가 날 발견하더니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다. 소년은 곧장 담을 넘어 이쪽으로 건너왔고, 나무 아래에서 내게 외쳤다.


“뛰어내리거라. 내가 받아주마.”

그는 내가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해서 쩔쩔맨다고 오해한 듯했다.

다행히 그때쯤 머리 장식도 빠졌다. 정확히는 머리 장식은 나무에 걸리고 내 머리카락이 빠져나온 거지만.

어쨌든 어렸던 나는 황자를 깔아뭉개는 데 별다른 공포감이 없었기에 곧장 뛰어내렸고, 황자는 날 받아주는 대가로 갈비뼈가 부러졌다.


 
하지만 막 뛰어내린 당시의 나는 그의 갈비뼈가 부러진 걸 몰랐다. 나는 단지 반쪽짜리 남장을 한 모습을 낯선 손님에게 보인 게 겁이 나기만 했다.


“나, 나는 이 집 아버지가 바람피워서 낳은 애입니다.”

놀라서 아버지를 팔아먹는 내게, 황자는 만개한 봄꽃처럼 환하게 웃고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몸이 약해서 나무에 올라가면 안 된단다. 네가 내 비밀을 지켜준다면 나도 네가 나무에 올라간 걸 비밀로 해주마.”

소년은 다행히 내 복색에 별 의심을 품는 것 같지 않았다. 집안 어른들이 장난삼아서 여자아이들이 많이 하는 장신구를 내 머리에 붙여준 거라 여기는지도 몰랐다.

남아와 여아가 공용으로 치장하는 장신구도 많으니까.

나는 소년이 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데다 내 비밀을 나무에 올라탄 것 따위로 여기는 걸 보자 안심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털어놓았다.


“사실 저는 우리 어머니가 낳은 애가 맞습니다.”

소년은 커다란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가 싶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 볼을 꼬집었다.


“넌 정말 귀엽구나.”

“제가 귀여우십니까?”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귀엽단 소리를 듣는 건 언제나 린화였다. 아주 어린 시절엔 아니겠지만, 당시의 나는 한창 쑥쑥 크는 또래 사내아이들보다 덩치가 작고 힘도 작은 탓에 그런 칭찬을 듣진 못했다.

어른들은 날 보면 ‘밥 좀 잘 먹어야겠다’라거나 ‘애가 덩치가 작다’라거나 ‘너무 약하게 생겼다’, ‘유약해 보인다’고 걱정했다.

그런데 내가 본 소년 중에 제일 잘생긴 소년이 나더러 귀엽다고 감탄하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씩씩하고 제일 멋지다.”

“귀여워요?”

“제일 귀여워.”

“제가요?”

“그럼.”

“전하도 제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잘생겼어요.”

3황자는 마구 웃어대면서 나를 번쩍 안아 돌려주었고, 나는 그에게 홀라당 반해버렸다.

이후에 그가 갈비뼈가 몇 대 부러져서 고생했단 이야기를 들었으나, 우리의 만남은 비밀로 남았기에 부모님에게 혼나진 않았다.

나는 다음 제사 때도 그가 올지도 모른다 여겨서 그 나무에 또 올라가 하루 종일 버텼으나, 3황자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 * *

나는 그가 잠깐의 그 만남을 당연히 잊어버렸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어릴 때 일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감동하기도 해서 멍하게 그를 보고 있자니, 3황자가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열셋째와 비밀리에 혼담이 오간다던데. 남장을 풀기로 한 건가?”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여인인 걸 알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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