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스승님, 미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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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스승님, 미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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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스승님, 미치셨습니까?
2022.06.20.
속에 있는 걸 몇 번이나 게워냈을까. 한참을 마구 토해내고 나니 다행히 속은 좀 편안해졌다.
하지만 마음은 조금도 편안해지지 않았다. 제자가 내가 토하는 걸 보고 급히 손을 치우긴 했지만, 이미 첫 구토는 그의 손에 쏟아버렸기 때문이다.
미쳤구나. 미쳤어. 최선을 다해 잘 보이려 애써야 할 판에 손에 대고 토나 하다니!
“그러게 왜 갑자기 턱을 잡으시고…….”
억울함에 저절로 미약한 항의가 나간다. 나는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면서 달팽이처럼 쭈그러졌다.
그러고서 제자를 보니 그는 다행히 흥이 식은 표정이었다. 분명 내게 ‘기억이 있는 거 아니냐’고 물으려던 눈치였는데. 손에 쏟아진 토사물을 보자 그럴 마음조차 사라진 모양이었다.
다행이 아닌 건 그가 몹시 짜증 난 얼굴이란 것이고.
나는 쩔쩔매면서 다급히 이 상황을 해결하려 애썼다.
“치우겠습니다. 송구합니다. 일부러 이런 게 절대로 아닙니다. 아까부터 토할 것 같아 입을 열 수가 없었는데 전하가 턱까지 잡으시니까…….”
일단 내가 제자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던 걸 토기 탓으로 돌린 다음, 나는 일어나려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내 몸이 휭 위로 떠 올랐다.
“전하?”
제자가 나를 들어 올리더니 긴 의자에 도로 눕혀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제자는 손수건 하나를 꺼내 자기 손을 닦고는, 다른 손수건을 또 꺼내 찻물을 묻혀 내 입가를 닦아주기까지 했다.
얘가 왜 이러는 거지? 손수건에 독 묻혔나?
그 예측 못 할 세심한 행동에 얼어서 굳어 있자니, 제자가 내 입가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자가 잘못하였습니다.”
“예?”
“스승님이 속이 안 좋아 굳은 걸 모르고. 큰 오해를 할 뻔하였네요.”
다행……인 건가? 다행이야. 오해한 건 아니지만 오해가 풀렸나 봐.
아무래도 제자는 내가 말을 못 하고 벌벌 떨던 게 토기가 치밀어서 그랬던 거라고 믿어주는 모양이다.
여기서 우물쭈물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그 오해가 풀릴까 봐, 나는 얼른 당당하게 대답했다.
“앞으론 제 속이 안 좋을 땐 턱 잡고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지요.”
제자는 심드렁하게 말했으나 나는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다행히 고비를 넘겼구나!
코앞까지 다가왔던 독약이 다시 저 너머로 멀어졌다.
그러나 안심하자마자 제자는 내 어깨를 눌러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어서 나를 더 충격에 빠지게 했다.
‘자고 가란 건가!’
“왜, 왜 이불을 덮어주십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잖아요.”
제자가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말에 나는 대답할 말이 사라졌다. 그런 나를 향해, 제자는 가볍게 웃으며 묻기까지 했다.
“기어가시려고요?”
“마차를 불러주시면…… 안 되겠지요.”
나는 황족이 아니니 마차를 타더라도 궁문 밖까지는 걸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그러기도 힘들다.
시무룩해져서 이불을 끌어안자, 제자는 말없이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응, 불러주기 싫단 거지.
이후로 제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일어서려 두어 번 시도해 보았으나 제자의 말이 옳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 몸으로는 절대로 궁문까지 걸어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날 업어다 줄 태감이 월무궁에 있지도 않은지라, 어쩔 수 없단 나는 도로 침상에 드러누웠다.
이런 와중에도 졸음은 빠르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듯 잠들고 말았다.
* * *
‘무슨 냄새지?’
고소한 냄새가 수마에서 나를 단번에 끄집어냈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얼른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제는 보이지 않던 작고 길쭉한 탁상이 의자 옆에 있고, 그 탁상 위에 김이 나는 죽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죽그릇 앞에는…….
“전하.”
제자님이 날 내려다보고 있다. 맞아. 젠장. 어제 월무궁에서 잠들어 버렸어! 잠이 덜 깨 멍하던 정신이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퍼뜩 돌아온다.
“그렇지 않아도 깨우려 했는데. 일어나셨습니까.”
제자의 무심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신에 아예 얼음을 가져다 댄 수준이었다.
어제 일이 기억나자, 나는 너무 놀라서 다시 기절할 뻔했다.
실제로 반쯤 정신이 나갔는지, 멍하게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의자에 옆으로 도로 누워 있었다.
의도한 게 아닌지라 퍼뜩 몸을 일으키자, 13황자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물었다.
“방금 무얼 하신 겁니까?”
“후광 때문에요. 아침부터 뵈니 눈이 부시네요. 태양이 떠오를 때 전하께서 같이 떠오르셨나 봅니다.”
13황자는 나를 광인 보듯 바라보더니, 진지하게 내 이마에 손을 살짝 대어보았다.
* * *
13황자가 준 죽에 독이 있을까 봐 걱정했으나 다행히 죽은 멀쩡한 잣죽이었다.
어제저녁도 먹지 못하고 내내 잔 터라 일단 죽이 한 입 위에 들어가자 미친 듯한 허기가 느껴졌다.
내가 죽 한 그릇을 순식간에 다 비우자, 13황자는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앉은 채 말했다.
“심하가를 불렀으니 마차가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외문까지만 나서면 될 겁니다.”
다행히 하루 더 있다 가란 말은 안 하려나 보다. 나는 안도해서 얼른 꾸벅 인사했다.
“황송합니다, 전하.”
13황자가 그런 나를 미묘한 눈길로 바라보았으나, 나는 지금은 제자님 심경까지 파악할 여력이 없었다.
나는 순순히 그릇을 내려놓고 벽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드네. 그래도 어제처럼 아예 못 걸을 정도는 아니야. 외문까지만 힘들어도 가보자. 우리 집에만 가면 하인들이 나와서 들어주겠지.
그런데 벽을 짚고 후들후들 떨면서 걷고 있자니 또다시 몸이 붕 떠올랐다. 어제오늘 왜 이러는 거야!
놀라서 고개를 들자 제자가 날 안고 있었다.
“전하?”
어제도 놀랐지만, 오늘은 정신이 맑기에 더욱 놀라웠다. 내가 기겁해서 부르자, 제자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 속도로는 저녁해가 떨어져도 도착하지 못할 겁니다.”
“제, 제가, 아니, 그러면 태감을 불러주세요. 어찌 전하께 안겨 간단 말입니까.”
“어차피 스승님은 저와 정혼 하실 게 아닙니까.”
“아직 안 했잖아요!”
“곧 할 텐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래도 아직 안 했잖아요! 정혼 하더라도 완전히 혼례를 올리기 전엔 서로 내외해야 하는 법입니다. 모르십니까?”
논리적으로 거절하려 해보았으나, 내가 여인이라는 걸 모르는 제자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스승님도 사내이고 이 제자도 사내인데 내외를 왜 합니까.”
“!”
“참으로 이상한 분이군요. 사내끼리 정혼하란 황명은 비교적 태연히 받아들이시더니. 이 제자가 다친 스승님을 옮겨 드리는 덴 그리 학을 떼십니까?”
왜 이리 억울하지? 나는 입술을 깨물고서 제자를 노려볼 뻔했으나, 그가 내 생명줄을 틀어쥐고 있단 걸 깨닫고서 결국 순순히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말았다.
“!”
그런데…… 또다. 전에도 자기가 손잡으라 해 놓고서 막상 내가 손을 잡으니 흠칫해 놓고선. 제자는 이번에도 자기가 안기라 해 놓고서, 막상 내가 목을 끌어안자마자 흠칫했다.
얼마나 세게 흠칫하던지, 제자는 날 거의 떨어뜨릴 뻔했다.
물론 난 떨어지고 싶지 않았기에 더욱 세게 그의 목을 붙잡았지만.
다급하게 매달려 있자니, 제자가 내쉬는 작은 한숨이 내 잔머리를 간질였다.
의아해 올려다보자, 제자가 다시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가만히 계셔도 제가 잘 운반해드릴 테니 그렇게 꼭 붙잡지 않으셔도 됩니다.”
“!”
나는 그 말에 민망해져서 다급히 손을 내렸다. 하지만 일단 손 위치를 인식하기 시작하자 자세가 몹시 어색하게 느껴지면서 어떤 자세로 있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졌다.
제자에게 내려달라고 할 때는 어떤 모양새였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손을 배 위에 포개어 올려보고 허공에 뻗어 보고 아래로 늘어뜨려 보았지만,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제자는 내가 어색해하는 꼴을 속으로 비웃기라도 하는지 어떻게 하라고 말해주지 않고 날 빤히 보기만 했다.
결국, 쩔쩔매다가, 나는 제자에게 조심스레 타협점을 제안해보았다.
“전하. 차라리 절 업어주시면 어떨까요?”
나름대로 머리를 잘 쓴 것 같은데. 날 보는 제자의 표정이 다시 아까의 그 광인 보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라, 나는 결국 배 위에 손을 포개어 엎었다.
* * *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어제저녁까지 술을 마신 심하가는 툴툴거리면서 측문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그는 월무궁의 태감이긴 하지만 월무궁이나 13황자 곁에서 자신이 뼈를 묻으리란 생각은 하지도 않고 살았다. 당연히 충성을 바치지도 않았다.
다행히 13황자는 껍데기는 차가우나 속은 얼었다 녹아버린 진흙이나 마찬가지여서, 그가 아무리 땡땡이를 쳐도 한소리조차 하지 못할 만큼 만만했다.
그런 13황자인데, 갑자기 새벽부터 그를 부르더니 이국사 요요화가 다쳤다며 측문에 가마를 잡고 기다리라 지시했다.
심하가는 핑계를 대고 거절하고 싶었으나, 다친 사람이 그 요씨 가문의 소가주인 게 신경 쓰여서 결국 간만에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벌써 몇 시진을 미적거리는 거야!”
이렇게 늦게 나올 줄이야! 새벽부터 기다려도 요요화도 13황자도 나오지 않자 심하가는 갑갑해 죽기 직전이었다.
이 와중에 덩치 크고 인상이 험악한 마부는 근처에 서서 계속해 그를 재촉했다.
“아직 멀었소? 진짜 나오는 거 맞소?”
“같이 기다리고 있지 않나. 황자 전하께서 나오셔야지!”
“젠장! 황자가 부른 게 아니라면 진즉 가버렸을 거요!”
그때. 드디어 문 너머의 폭이 좁은 돌길로 13황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저기 오는군.”
심하가는 툴툴거리면서 황자에게 다가가다가 그가 누굴 안고 있는 걸 발견했다.
가까이 와서 보니 황자가 안고 온 이는 자세가 이상한 요요화였다.
요요화는 빳빳한 자세로 황자에게 안겨서 한 손은 황자의 목을 잡고 한 손은 배에 둔 괴상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황자가 스승을 안고 오는 것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인데, 그 스승의 자세가 너무 어색하니 두 사람은 몹시도 이상하고 눈에 띄었다.
“전하? 이게 대체? 요 대인이 많이 아픕니까?”
심하가는 그 모습에 아까의 불안도 잊고 놀라서 물었다.
13황자는 대답해주는 대신, 마부에게 마차 문을 열란 신호를 보냈다.
마부가 다급히 마차 문을 열자, 13황자는 안쪽에 요요화를 넣고서 무뚝뚝하게 지시했다.
“요씨 가문 본가로 데려가라.”
“예, 전하.”
“심하가.”
“예? 예, 전하.”
“너도 따라가라.”
“예, 예!”
심하가는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얼른 마차에 따라 올라탔다.
심하가는 마차 창문으로 점점 멀어지는 13황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저 황자가 웬일이지? 모든 걸 다 혼자 처리하더라도 곁에는 사람을 아무도 두진 않으려는 성품인데?’
* * *
“아니 세상에! 요화야!”
심 태감의 부축을 받아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는 하녀들의 부축을 받아 나오며 소리쳤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린화 역시 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아 좀 걱정은 되었나. 웬일로 어머니와 함께 다가왔다.
어머니는 다급히 내 곁으로 와서 묻다가 자연스럽게 심 태감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우리 요화가 왜 이렇게 왔나?”
심 태감은 아는 게 없기에, 쩔쩔매며 내 쪽을 보았다.
심 태감이 헛소리를 하는 건 내게도 별로인지라, 나는 얼른 나서서 대답했다.
“좀 다쳐서요. 치료를 받고 왔습니다.”
“다쳤다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심 태감은 자기도 한마디 보태야겠다 싶은지 바로 끼어들었다.
“밤새 13황자 전하께서 요 대인을 간호해주시고, 올 적에는 친히 안아 옮겨주셨지요.”
그 말에 내가 여인인 걸 아는 어머니는 바로 낯빛이 해쓱해졌다. 반면 린화는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경박하긴.”
“린화!”
어머니는 다급히 린화의 입을 틀어막았다.
“오라버니한테 한 말이에요.”
하지만 린화는 어머니의 손을 치우고서 굳이 한마디를 더 붙인 다음 휙 돌아서서 가버렸다.
심 태감은 ‘집안이 개판이네’ 하는 표정으로 나와 어머니, 린화를 번갈아 보다가 멋쩍게 웃고서 타고 온 마차에 다시 올라탔다.
그가 떠나는 걸 보기도 전에, 나는 머리가 아파서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어머니는 심하가를 배웅하기 위해서인지 날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의복을 다 갈아입기도 전에 방에 찾아와서는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리 정혼한 사이라지만 어떻게 밤새도록 13황자 전하와 함께 있었단 말이냐. 응?”
“들으셨잖아요. 다쳐서 간호해준 거예요. 밤새 곁에 있던 것도 아니고요. 그냥 방 한 칸 준 거예요.”
“남들은 네 나이면 내외하고 다니는데 그게 무슨 헛소리야!”
어머니로서는 걱정할 만도 했다. 평생 남장하고 살 거라면 모를까, 13황자와 정혼 하게 된다면 나중에는 남장을 벗어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맞은 머리 부위도 너무 아픈 데다 마차를 탄 후로 다시 토기가 치밀던 터라, 어머니가 옆에서 고함을 질러대는 게 너무 듣기 힘들었다.
그래도 참으려고 몇 번 시도했으나, 어머니가 잔소리를 멈추지 않자 결국 참지 못하고 같이 외치고 말았다.
“내외가 중요하면 처음부터 남장을 시키지 마셨어야죠! 머리에 벼루 맞은 건 안 보이세요?! 이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전하를 박차고 나오는데요!”
내게 남장을 시킨 건 부모님에겐 역린 같은 일이라, 이 일로 부모님을 탓하는 건 평소에는 절대로 꺼내지 않으려 하는 화제였다.
홧김에 그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나는 바로 후회했다. 어머니의 표정이 창백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