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공식적 스승바라기 (25/159)


26화. 공식적 스승바라기
2022.05.30.


16583987211971.jpg

 
내가 6황자, 2황자와 식사한다는 걸 알자 일부러 꾀병을 부려서 그 만남을 깨버린 13황자인데.

그 둘과 내가 궁술 놀이를 하는 건 물론, 연모한다고 확신하는 3황자까지 함께하게 되었으니, 제자가 무슨 오해를 더 할지 모르겠다.

나는 눈에서 칼날이라도 뿜어질 것 같은 13황자의 시선을 피해서 얼른 3황자가 오는 쪽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3황자를 보자마자 심장이 술렁이고 마음이 콩닥거려서 13황자에 대한 일을 잠시 잊고 말았다.

오랜만에 보는 3황자는 내 기억보다 더 병색이 짙은 모습이었다. 수려한 얼굴은 혈색 없이 창백하고 모양 좋은 입술 역시 핏기가 없었다.

하지만 3황자는 그런 모습으로도 이 자리에 모인 누구보다도 가장 고귀한 태가 났다.

본인도 명민한 데다 모친 역시 품계가 높고 황제에게도 총애받고 있으니, 저렇게 병약하지만 않았어도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을 텐데.

3황자가 멀쩡했다면 회귀 전에도 13황자가 황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3황자는 황제의 후계자가 되기엔 너무 병약했고,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가 전혀 야욕이 없었다.

나는 착잡해서 3황자를 바라보았다.

어떤 이들은 그가 야욕 없는 걸 두고서 근성이 없다던가 마음까지 유약하단 식으로 말해댔지만, 나는 오히려 3황자가 그런 사람이라 좋았다.

하지만 이건 속마음뿐.

막상 3황자가 날 보자마자, 나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정중하게 선을 그어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16583987211977.jpg

“3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러나 13황자와 혼인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어서인가. 아쉬운 마음이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3황자는 몸이 약하긴 해도 13황자와 달리 높은 품계의 어머니와 강력한 외가가 있단 걸 알지만 그래도…….

16583987211982.jpg

“여기서 자네를 보는군.”

3황자는 늘 그렇듯 모두에게 사용하는 친절한 말씨로 내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러고는 더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바로 2황자에게 인사했다.

16583987211982.jpg

“동생이 몸이 약해 형님께 폐가 되지 않으려나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들이 대화 나누는 걸 지켜보다가 일부러 몸을 돌려 태감들이 화살이 가득 든 화살통과 활을 챙겨 오는 걸 바라보았다.

그러다 나는 선안이 뻘쭘하게 서 있는 걸 눈치채고 아차 싶어서 얼른 그의 팔을 잡고 황자들을 둘러보았다.

나이 순서대로 소개해야 하는데, 2황자와 3황자, 6황자가 현재 인사 중이었다.

말하는 데 끼어들 수는 없으니 그럼 남은 건…….

16583987211977.jpg

‘아아.’

13황자가 날 뭐라 헤아리기 어려운 눈길로 보고 있구나.

나는 속으로 욕을 뱉고서 선안을 13황자 앞으로 데려갔다.

16583987211977.jpg

‘여기서 9황녀 전하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분위기가 싹 바뀔 텐데. 9황녀 전하는 대체 언제 오지? 일부러 어제 황제의 측근 태감을 만나서 슬쩍 궁술 놀이에 대해 흘렸는데. 안 전해줬나?’

그러나 9황녀는 오지 않았고, 나는 13황자와 두어 걸음 앞에서 마주 서게 됐다.

13황자는 평소 같은 표정으로 선안을 보았다. 나는 선안의 팔을 놓아주고서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16583987211977.jpg

“13황자 전하. 여기는 제 친구인 선안입니다. 이번에 2황자 전하께서 초대해주셔서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선안은 얼른 싹싹하게 인사했다.

16583987212005.jpg

“선안입니다. 황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상황이 난처하긴 하지만, 13황자가 3황자를 대할 때가 문제이지 선안에게는 문제가 없겠지? 서로 초면인 척하고 있지만, 예전에 도박장 유 가주 앞에서 만나기도 했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서 별생각 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13황자가 선안을 보는데, 그 시선이 미묘하게 괴이하단 걸 발견했다.

16583987211977.jpg

‘왜 저러지?’

의아해하고 있자니, 13황자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고개를 돌렸다.

반쯤 무시당한 거나 다름없는 모습에 선안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그 사이 2황자와 3황자, 6황자도 대화를 끝낸 듯해 나는 이번에는 그쪽으로 걸어가서 선안을 소개해주었다.

16583987211977.jpg

“세 분 전하. 여기는 제 친구 선안입니다. 2황자 전하, 며칠 전 말씀 드린 그 신궁이 이 친구입니다.”

일부러 호들갑스럽게 소개하자, 선안은 당황해서 “신궁이라니.” 하고 내 어깨를 툭 치고서 얼른 세 황자에게 인사했다.

16583987212005.jpg

“선안입니다. 친구가 제 재주를 너무 비약해 소개한 모양이라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궁술을 좋아하는 2황자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선안에게 부담을 주었다.

16583987230401.jpg

“겸손하군. 내 오늘 자네 솜씨를 기대해 보겠네.”

6황자는 딱히 선안에게 큰 관심은 없는지 2황자와 선안이 대화 끝내기를 기다렸다가 신이 나서 말했다.

16583987230401.jpg

“여섯 명이니 세 명씩 패를 가르면 되겠군요. 어떻게 할까요?”

나는 2황자가 선안과 나, 그리고 내 제자인 13황자를 한 편으로 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2황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16583987230401.jpg

“나는 안 공자의 궁술을 한 편에서 응원하고 싶구나. 반대편이면 마음 놓고 응원하지 못하고 점수를 못 내길 바라야 할 테니까. 그러니 나는 안 공자와 한 편이 돼야겠다.”

뭐? 나는 물론 6황자까지 놀라서 그를 보는데, 2황자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내 등을 두드리더니 13황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16583987230401.jpg

“우리 스승바라기 열셋째는 당연히 요 이국사와 한 편이어야 할 테고.”

그 말에 13황자의 눈썹이 움찔했다. ‘스승바라기’라는 소리가 불쾌한 듯했다.

나 역시 그 ‘스승바라기’라는 말에 기겁했으나 표현하진 못하고 몰래 옷자락만 꽉 쥐었다.

2황자는 그렇게 선안과 나, 13황자를 놀라게 한 다음, 마지막 정점까지 확실하게 찍어주었다.

16583987230401.jpg

“셋째와 내가 한 편이 되면 동생들이 형님들이 이기게 해주느라 제대로 활을 쏘지 못하겠지. 그러니 여섯째가 나와 한 편이 되고, 셋째가 열셋째와 한 편이 되는 게 좋겠군.”

2황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얼핏 논리적으로 들리게 설득까지 하는 재주가 있구나.

2황자가 선안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면서 활을 든 태감에게 걸어가고 그 뒤를 6황자가 쫓는 모습을 보다가, 나는 돌처럼 굳은 머리를 가까스로 돌려 13황자와 3황자를 번갈아 보았다.

3황자는 괜찮다. 3황자는. 3황자는 내가 자기를 연모하는 걸 모르니까!

문제는 13황자였다.

며칠 전만 해도 13황자는 내가 3황자의 얼굴만 보고 연모했다고 그렇게 비꼬았는데. 설마 이렇게 상황이 되어 버릴 줄이야!

그러다 13황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역시나. 그는 입가에는 미소가 없고 눈빛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16583987211977.jpg

‘노려보고 있어!’

나는 얼른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심장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뛰고 있었다.

팔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을 지경이라, 나는 쩔쩔매다가 태감들이 높은 선반에 활 몇 개를 늘어놓은 걸 발견하고 일부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어차피 제일 말단이니 두 황자를 챙기는 척 13황자의 눈길에서 좀 벗어나야겠다.

그러나 탁자 앞에 서자마자 양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보니, 오른쪽에는 3황자가 왼쪽에는 13황자가 다가와서 같이 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겁해서 비명이 절로 나오려는 걸 얼른 참고서 나는 일부러 밝게 말했다.

16583987211977.jpg

“두 분 황자님과 한 편이 되다니 참으로 좋군요. 신의 솜씨가 좋지 않아도 발목을 잡는다고 탓하시면 안 됩니다.”

그 말에 3황자는 따뜻하게 대답해주었다.

16583987211982.jpg

“나도 못하니 괜찮단다. 다 같이 못하니 서로 미안할 일이 없어 좋겠구나.”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저절로 입 끝이 올라갈 뻔했다. 활을 못 쏘신다니 참으로 귀엽기도 하시지.

하지만 그러다 나는 13황자와 눈이 마주치고서 다급히 양 입꼬리를 강제로 내렸다.

13황자는 말없이 나를 차갑게 바라보며 자기 활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더니 옆의 태감이 든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날렵하게 활에 재어 보고는, 두어 번 당기는 시늉을 하며 내게 말했다.

1658398723044.jpg

“전 잘 쏩니다, 스승님.”

16583987211977.jpg

“예?”

나는 당황해서 13황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자기는 잘 쏘니까 발목 잡지 말란 건가.

제대로 안 하면 후환을 염려하란 소리인가? 아니면 잘난 척하는 건가?

하지만 13황자는 더 말하는 대신, 마음에 드는 활을 골라 어깨에 메고서 화살을 쏘는 장소로 홀로 걸어가 버렸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3황자가 온화하게 물었다.

16583987211982.jpg

“이국사. 이국사도 다 골랐는가?”

16583987211977.jpg

“아…… 아, 아니요. 이제 고르겠습니다.”

제자가 저러고 가버리니, 옆에 3황자를 두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13황자를 쳐다보게 된다.

아. 신경 쓰여. 화났나? 화난 거 같은데. 3황자가 와서 화난 건가, 아니면 내가 또 2황자, 6황자와 어울려서 화난 건가.

그러다 선안 쪽을 보니, 선안은 어느새 6황자와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잘 나누고 있었다.

그 세 사람도 활을 다 고른 듯했다.

그러고 있자니 궁술장을 맡은 태감이 다가와서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표적을 가리키며 말했다.

16583987230401.jpg

“2황자 전하와 6황자 전하, 선 공자께선 여기 활을 사용하시고, 저쪽의 붉은 표적을 노리시면 됩니다. 그리고 3황자 전하와 13황자 전하, 요 대인께선 여기 활을 사용해 저쪽의 파란 표적을 노리시면 됩니다.”

태감이 말을 시작하자, 다행히 13황자는 아까보다는 흉흉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나는 계속 그의 눈치를 보다가 안도해서 3황자를 보았다.

3황자는 나한테 관심이 없는 듯 태감만 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궁술장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보았다. 그러나 길목에는 아직 9황녀는커녕 9황녀의 궁녀조차 보이지 않았다.

16583987211977.jpg

‘일이 꼬이기만 꼬이고 9황녀 전하는 안 오는 불상사는 없겠지.’

나는 시무룩하게 생각하며 태감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 * *

그렇게 목적과는 좀 따로 노는 듯한 삼 대 삼 궁술 놀이가 시작되었다.

2황자와 6황자는 대부분의 황족들이 그렇듯 기본 이상의 궁술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6황자는 제법 활을 잘 쏘았다.

2황자는…… 의지는 높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소개한 선안은, 과장을 섞긴 했지만 실제로도 명궁이다 보니 그야말로 쏘는 족족 다 표적에 맞혔다.

반면 우리 쪽은 나와 3황자가 13황자의 발목에 매달려 딸려가는 모양새였다.

사실 나는 솔직히 선안 이상으로 궁술에는 자신 있었다.

학당에 다닐 때 소년들끼리 모여서 몇 가지 교양 무술을 하며 노는데, 아무래도 나는 다른 소년들보다 체구도 작고 근육도 덜했다.

하지만 못한다고 해서 빠지면 그 아이들과 어울리기 힘드니, 그 대안으로 근력이 부족하더라도 잘할 수 있는 부분에 유독 주력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궁술이었다.

하지만 선안을 돋보이게 하려는 곳에서 내가 더 잘해 버리면 안 되는 법 아닌가.

게다가 9황녀가 지금 내 눈엔 보이지 않지만 어쩌면 숨어서 보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렇다 보니 나는 형편없게 활을 쏘아댔고, 내가 활을 쏠 때면 2황자는 자기보다 더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게 좋아서인지 무척 기뻐했다.

그런 나와 맞먹게 못 쏘는 게 3황자였지만 아무도 그에겐 기대하지 않았기에 뭐.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실력을 숨기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제자는 내가 알기로는 백발백중의 명궁이었다. 그러나 아직 실력을 감추고 웅크리고 있기 때문인지, 제자는 일부러 딱 6황자 수준으로만 활을 쏘아댔다.

16583987230401.jpg

“하하. 우리가 이기겠는걸? 내기라도 할 걸 그랬군!”

하여튼 이런 상황이다 보니 즐거워하는 건 2황자 쪽뿐이었고 우리 쪽은 분위기가 어두웠다.

그러다 나는 길목 쪽을 습관적으로 또 보았다가 수풀 사이로 슬쩍 보이는 옷자락을 발견했다.

16583987211977.jpg

‘9황녀다! 9황녀 전하가 숨어서 보고 있구나!’

아니, 그러면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할 때가 아니지!

내 모든 힘을 다해서 선안을 아주 멋지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렇게 맥없이 활만 쏘아서는 안 돼.

이럴 때는…… 좋아, 내가 한 번 악역이 되어 주어야겠어!

나는 그 생각을 하자마자 선안이 활을 쏠 때 즈음 일부러 그의 뒤로 다가갔다.

그러고서 슬쩍 길목을 보니, 여전히 수풀 밑으로 치맛자락이 보였다.

좋아. 잘 보십시오, 황녀 전하.

저는…… 쓰레기입니다!

나는 각오를 하고서 선안이 활을 쏘려는 순간. 일부러 그를 뒤에서 퍽 밀쳐 버렸다.

16583987248448.jpg

 
그 바람에 활이 비리비리하게 툭 떨어지자 6황자는 화난 얼굴로 호통쳤다.

16583987230401.jpg

“이국사! 뭐 하는 건가!”

거기에 내가 9황녀의 환상을 깰 만큼 못 되게 대답하려 할 때였다.

뜻밖에도 다른 사람이 먼저 나섰다.

1658398723044.jpg

“스승님. 이리 오십시오.”

나선 사람은 제자였다.

나는 적당히 얄밉게 변명하려다가, 말하려는 시기를 놓치고서 얼결에 뒤를 보았다.

우리 쪽 공간에 있던 13황자가 어느새 저벅저벅 걸어와서는 얼른 오라는 듯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16583987211977.jpg

“…….”

나는 잠시 당황해서 13황자의 손을 바라보다가 미쳤나 싶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우리가 혼담이 오가는 사이이긴 하지만 아직 그게 공개적으로 이야기가 된 건 아니잖아? 비밀리에 이야기만 몇 번 주고받은 거잖아?

그런데 주종 관계이자 사제 관계인 사내 둘이서 같이 손잡고 가자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