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정숙하지 못한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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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정숙하지 못한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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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정숙하지 못한 스승님
2022.05.16.
선안은 잠시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나를 보다가 물었다.
“정말인가?”
“정말이네.”
내가 바로 대답하자 선안은 즉시 흥분해 외쳤다.
“아니, 그러면 9황녀 전하께 송구하다, 감읍하다, 인사 올리고 당장 혼인하자 나서야지! 내 도움이 왜 필요하단 건가? 혼인하기도 전에 아이를 가졌단 게 문제 될까 봐?”
“아이 없다니까!”
“하지만 다른 황자와 혼담이 오가는 상황 아닌가. 아이 핑계라도 없으면 자네가 9황녀 전하와 어떻게 혼인하겠어?”
왜 말이 자꾸 같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 같지?
“난 9황녀 전하와 혼인할 마음이 없네. 그리고 폐하께서 주선하신 혼담을 앞두고, 감히 황후마마 소생인 9황녀 전하와 사고를 쳤단 누명을 사고 싶지도 않아. 폐하께선 그 얘기를 듣고 화가 나셔서 내 머리에 벼루를 집어 던지셨다고!”
“벼루를?!”
“문진을. 하지만 문진도 무겁잖나.”
선안은 멍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또 제자리로 돌아가 물었다.
“하지만 9황녀와 혼인하지 못하면 자네는 황자와 혼인한다며. 그래도 되나? 자네는 남자인데, 그게 가능한가?”
누구는 하고 싶어 하는 줄 아나! 내가 남장한 여인이라 이러지!
13황자와 혼인하는 것도 큰일이고 9황녀와 혼인하는 것도 큰일이지만, 적어도 13황자와의 혼담은 내가 여인인 걸 아는 황제와 황후가 밀어붙이니 그 부분에는 문제가 없었다.
내가 족보에는 여인으로 되어 있고 호적은 성별 표기가 안 되어 있단 걸 황제는 알고 있으니, 혼담이 확정되면 13황자에게 내가 여인임을 알리고, 나중에 내가 아이를 가지면 공개적으로 남장을 풀게 시키던가 할 것이다.
내가 13황자와 혼인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황제의 손주 아닌가. 손주라고 해도 황손으로 지원받는 건 없지만 물질적 지원이 없다고 해서 황제가 자기 손주가 무시 받고 사는 걸 두고 본단 뜻은 아니니까.
사람들이 처음에는 수군거려도 나중에는 황제가 무서워서라도 수긍하겠지.
그러나 9황녀와 혼인한다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거다.
13황자가 날 노리는 문제는 내가 혼자 해결하면 되지만, 9황녀와 혼인해서 사기꾼으로 몰리면 가문 전체가 위태로워진다. 물론 혼인하기도 전에 황제가 먼저 내가 남장한 여인이란 걸 밝히고 우리 가문에 벌을 내리겠지만.
“상관없네.”
하지만 이런 꼬인 사정을 모르는 선안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말 한마디 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물었다.
“그럼 내가 뭘 어떻게 돕길 바라나? 난 아직 관직에 오르지도 못했네. 우리 가문이 명성 있다지만 백부님 내외는 날 그리 좋아하시지 않네. 종형도 마찬가지지. 내 일에도 나설지 말지 모르는데, 친우 일이라면 더욱 무관심할 걸세.”
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자네 가문에서 먼저 나설 필요 없네.”
일이 잘 풀려서 9황녀가 선안과 혼인하고 싶어 하고 황후가 선안을 마음에 들어 한다면 이미 일은 끝난 거지.
황실에서 혼담이 들어온 이상 선씨 가문에서는 무조건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선안이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느냐 뿐이었다.
“무슨 소린가?”
“내 생각에 9황녀 전하는 날 진심으로 사모하는 게 아니야. 그냥 충동적으로 날 가지고 싶어 할 뿐이지. 내가 위급한 상황에 황녀 전하를 구해드렸거든. 그 일과 내 찬란한 외모가 겹쳐져서 황녀 전하의 소유욕을 부채질한 게 분명해.”
“자랑 같은데.”
“하지만 자네는 나만큼은 아니라도 아주 출중한 꽃도령 아닌가. 자네를 보면 황녀 전하가 마음을 돌릴지도 몰라.”
선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 말이 바로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고서 간절하게 부탁했다.
“자네가 9황녀 전하의 마음을 빼앗아주게. 내가 나서서 모든 걸 준비하겠네. 자리, 시간, 우연한 만남, 황녀 전하가 뭘 좋아하시는지까지 다 알아 올게. 자네가 황녀 전하와 혼인해줘!”
선안의 턱이 뚝 떨어졌다. 그는 그 상태로 한참을 있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황, 황녀 전하와 혼인, 혼인하면 나야 영광이지. 하지만 혼인은 가문의 일 아닌가.”
“폐하께서 내게 명령하셨네. 9황녀 전하가 나와 혼인하겠단 말을 무르게 하라셨어. 못하면 날 벌하실 걸세.”
“폐하께서?”
“폐하는 날 사위로 맞고 싶지 않아 하시거든.”
선안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며느릿감이라?”
하지만 결국 그는 생각한 바를 입 밖으로 꺼내더니 배를 잡고 웃어댔다.
‘이 자식!’
나는 그의 정수리를 깨물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서 다시 그에게 애원했다.
“자네는 얼굴이 반짝반짝 아주 잘났지 않나. 황녀 전하가 자네를 보면 마음을 돌리실 거야. 게다가 자네는 가문도 우리 가문 못지않게 좋으니, 폐하께서 혼인을 허하실 가능성도 높아. 그러니 자네가 황녀 전하와 혼인하는 게 싫지 않다면 날 도와주게. 응?”
“…….”
“하지만 자네가 싫다면 돕지 않아도 돼.”
다행히 선안은 조용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황녀 전하와 혼인해도 상관없네. 폐하의 부마가 될 수 있다면 내겐 좋은 일이지.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뭔가?”
“나섰다가 실패하면 우스갯거리가 되지 않을까?”
“자네가 나서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나만 알 걸세. 자네가 실패해도 나는 절대 자네를 비웃지 않을 거야. 날 위해 나서는 거 아닌가. 비웃다니. 그럴 리가. 난 평생 자네를 은인이라 여길 걸세.”
선안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하지만 중요한 일이니 좀 더 신중히 생각해볼 시간을 주게.”
“얼마큼?”
“사흘.”
* * *
선안이 도움을 준다면 가장 좋지만, 그가 거절할 경우도 대비해야 했다.
이를 위해 나는 다른 출중한 사내들을 후보로 찾아두기로 했다. 그래야 선안이 거절하면 그 사내들을 찾아다니며 후사를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나와 선안은 함께 얼굴이 잘났고 가문이 꽤 괜찮은 사내들의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발이 넓은 선안은 이런 일에 확실하게 도움이 되었다.
“정말 고맙네.”
“일이 잘 풀려 황녀 전하와 혼인할 수 있다면 내가 더 고맙지.”
안도한 나는 아예 선안의 집에서 함께 식사까지 하고서야 집에 돌아왔다.
“황자 전하와 혼인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친구들과 조금씩 거리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나를 보고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어보았으나, 내가 질색하자 어머니는 그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염려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내가 13황자와 혼인한다고 해서 내 친구들까지 다 버려야 하냐’고 항의하려다가, 남장을 벗게 되면 우정이 변치 않더라도 대외적인 시선 때문에 지금처럼 친구들을 편하게 만날 수 없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말문이 턱 막혔다.
사람들은 남장을 푼 내가 여인의 모습으로 또래 남자 친구들을 만나고 다니면 이전부터 친구였다는 걸 알면서도 수군거릴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현실을 아니까 나보다 먼저 염려해주실 뿐이었다.
생각하니 머리가 아픈 문제라, 나는 얼른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13황자의 수업을 하러 가면서 선안이 만들어 준 명단을 품 안에 잘 챙겨 갔다.
수업이 끝난 다음 집으로 곧장 오는 대신, 이 명단에 오른 이들의 실물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월무궁에 도착해 평소처럼 수업을 하던 도중이었다.
13황자가 내가 경전을 해석하는 걸 가만히 듣다가 잠시 말이 끊어졌을 즈음. 긴 손가락을 뻗어 날 가리키며 물었다.
“스승님? 소매 안에 뭘 넣고 다니시는지요?”
“!”
혹시 명단이 조금 삐져나왔나? 나는 놀라서 다급히 아래를 보았다. 하지만 소매는 멀쩡했다.
아니, 그런데 저 제자는 내가 소매 안에 뭘 넣고 있는 걸 어찌 안 거야?
하지만 그가 뭘 보긴 본 눈치라, 나는 당황해서 재빨리 둘러댔다.
“그냥. 서신입니다.”
그러고서 접은 종이를 더욱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나 13황자는 눈치가 어찌나 귀신인지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제자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나는 단호하게 대답하고서 일부러 제자를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제 서신을 왜 전하께서 보십니까?”
솔직히 그렇지 않나? 제자가 회귀 전에 나를 독살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 왜 내 서신을 봐? 이건 서신이 아니지만.
다행히 제자도 내가 이렇게까지 나서자, 더 보겠다고 조르는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 순순히 넘어갔다.
나는 안도하고서 다시 경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서책을 보시지요 전하. 흐름이 끊어집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돌아갈 생각에 얼른 일어섰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제자는 쓸데없는 배려를 하며 곁으로 다가왔다.
“네에…….”
나는 그가 또 서신을 보자고 할까 봐 순순히 대답하고서 문가로 걸어갔다.
그러고서 나가려 할 때였다. 뜻밖에 바로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정말 과장 하나도 하지 않고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렸다. 거기에 놀란 나는 다급히 돌아서다가, 순간 균형을 잃고 댓돌에서 넘어질 뻔했다.
제자가 나를 잡아주는 바람에 다행히 휘청이기만 할 뿐 넘어지진 않았지만, 그가 날 잡아주면서 내 팔을 꽉 잡는 바람에 넘어진 것만큼 심장이 철렁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얼른 대답하고서 그에게 잡힌 손을 힘주어 뺐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고서 꾸벅 인사한 다음 얼른 월무궁 밖으로 달려 나가는데, 심장이 얼마나 요란하게 뛰던지 내 귀에 내 심장 소리가 다 들릴 지경이었다.
그의 품 안에서 독을 마신 일이 떠오르며 팔에 소름이 오싹오싹 돋아났다.
‘안 돼. 이러면 들켜. 제자는 내가 회귀했단 걸 모르잖아.’
내가 회귀를 하나 안 하나 제자는 날 증오하고 있겠지. 하지만 최소한 내가 회귀한 걸 모른다면 날 죽이려 드는 시점은 그가 성공한 이후이다.
그는 가장 성공한 지점까지 나를 데려갔다가 그 꼭대기에서 날 밀어버리고 싶은 거니까.
하지만 내가 회귀했단 걸 알아버리면 제자는 거기까지 가기 전에 슬쩍 나를 죽이려 들 것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내 회귀 사실을 감추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와 닿을 때마다 일어나는 공포를 눌러야 한다.
‘할 수 있어. 괜찮아. 제자도…… 제자도 했잖아.’
제자는 회귀 전전 삶에서는 내가 자기를 죽였다지만, 회귀 전에 내게 그런 내색을 하나도 보이지 않았잖아. 그러니 나도 할 수 있다.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월무궁 근처를 벗어난 뒤에야 화원 안쪽으로 들어가 소매에서 서신을 꺼냈다.
그런데…….
‘없어!’
소매 안에 넣어둔 서신이 없었다.
놀라서 다급히 몸 여기저기를 쳐보다가, 비틀거릴 때 제자가 내 팔을 잡아준 일을 떠올렸다.
‘설마? 설마 그때?’
아니겠지?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하지만 의심이 사라지지 않아서, 나는 결국 왔던 길을 돌아가 월무궁으로 갔다.
그렇게 월무궁으로 뛰어 들어가자 제자가 보였다. 제자는 앞채에 난 길 한가운데에 서서 선안이 내게 준 명단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기척을 느꼈는지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화난 얼굴이 아닌데도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아니, 아니야. 괜찮아. 저기에 쓰여 있는 거라고는 그저 이름 몇 자일 뿐이야. 관직에 오른 이들이 거의 없고 오른 이들이 있어도 다 신입들이니, 파벌을 만드는 거로 보이지도 않을 거다.
제자가 본다 한들 내가 회귀했단 걸 알아낼 구석은 없었다.
그 생각을 하자 가까스로 안도가 되었다.
그래. 이상한 내용은 없어. 그러니 13황자가 화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런데 왜 저렇게 서늘한 얼굴이지?
당황해서 보고 있자니, 13황자가 내게 다가오라 손짓했다.
무거운 발을 끌고 마지못해 다가가자, 제자는 내게 서신을 돌려주며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정숙하지 못한 사람은 싫다고 말씀드린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잘생긴 사내 명단’을 작성하고 계십니까. 우리 스승님. 대체 제자가 스승님을 어찌해야 좋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