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그리 나오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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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그리 나오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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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그리 나오시겠다?
2022.04.11.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지? 나는 멍하게 제자를 바라보았다.
반면 제자는 아주 침착하게 하얀 술주전자를 가져가 표면에 손을 대어보고 있었다.
나는 계속 입가를 닦으면서 속으로 욕을 했다. 저 제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회귀 여러 번 하다가 미쳤나?
기억은 안 나지만 전전생엔 내가 그를 죽였다며. 그 복수를 한다고 전생엔 자기가 날 죽였잖아? 나와 그의 사이에 오간 건 독과 피인데,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멍멍멍’ 하고 대답하면 제자가 “그렇군요.”라고 대답해 줄 것 같다. 그 정도로 그의 말은 뜬금없었다.
“입술 닳겠습니다.”
제자가 픽 웃으며 놀리는 바람에 나는 손수건을 얼른 내렸다. 멍하게 생각하는 내내 계속 손수건으로 내 입술을 문지른 모양이다.
나는 얼른 반박했다.
“이 정도론 안 닳습니다.”
그가 한 시답지 않은 농담에 대한 반박이었다.
“하긴. 그렇긴 하더군요.”
그러나 제자가 난데없이 덧붙인 동조에 나는 다시 굳고 말았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왜 자기가 나랑 입이라도 맞춰 본 것처럼 말해?
묘한 말을 툭 던져 놓고서 제자는 자기 홀로 고상하게 물을 마셨다.
나는 괜히 찝찝해져서 손수건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제자와 술을 마시러 온 게 벌써 후회되고 있었다.
애초에 원해서 온 게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도 더 요령껏 거절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손수건 일부가 내가 만지작대는 사이에 뒤집힌 걸 보는 순간. 문득 발상이 전환되었다.
아. 혹시 제자가 한 말. 나더러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은 게 아니라, 연모하는 대상으로 자기가 어떤지 평가해 달란 거였나?
“…….”
생각해보니 이거 같다. 이쪽이 훨씬 그럴듯했다. 제자가 툭 던진 말이 너무 모호해서 내가 착각한 게 분명했다.
원래 친구끼리는 이런 말을 한 번씩 하지 않던가. 내가 제자랑 친구는 아니지만.
어쨌든 한결 마음이 정돈되자, 나는 손수건을 반듯하게 접으면서 아까의 침묵을 만회할 만큼 밝은 투로 대답했다.
“전하께선 아주 훌륭한 분이시지요. 어느 사람이 전하를 연모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럼요.”
“좀 빨리 대답하셨다면 그럴듯하게 들렸을 텐데.“
“!”
내가 흠칫하자, 제자는 농담이라는 듯 웃더니 주전자를 들어 내 쪽으로 주둥이를 기울였다.
따라주려고? 얼결에 두 손으로 술잔을 받치자 주둥이에서 졸졸졸 소리와 술이 부어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나는 한 번 더 덧붙였다.
“진심입니다. 설마 신이 이런 거로 농을 하겠습니까.”
어쨌든 술자리 내내 이런 분위기로 할 필요는 없지. 적당히 분위기를 풀어야 했다. 아니면 술을 마시고 취하는 게 아니라 체할 것 같았다.
“하면 스승님. 이 제자를 연모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제자가 건넨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손이 흔들리고 말았다.
술잔에 부어지던 술은 내 손과 탁자 위로 떨어졌다.
“송구합니다.”
나는 얼른 술잔을 내려두고 옆에 놓인 예비용 수건을 집어서 술이 떨어진 자리에 두었다.
“그렇게 놀라실 일인가요?”
제자는 여전히 농담조로 말하며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스승님께서 방금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제자를 연모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거라고요.”
대체 무슨 속셈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나는 힐긋 그의 안색을 살폈다. 제자가 멍청해서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리는 없는데.
저번 삶의 행적으로 볼 때 제자는 확실히 남색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한테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갔다.
내가 남장을 하고 있어도 사실은 여자라 본능으로 끌리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난 삶엔 아주 가차 없이 죽였잖아.
‘혹시 내가 죽은 뒤에…… 옷이라도 벗겨봤나?’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제자는 자기 정적들을 제대로 장사지내지 않았다. 죽으면 구덩이에 시체를 넣고 묻어버리는 게 끝이었다. 적들을 마지막 가는 길까지 모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제자가 나에게만 특혜를 베풀어 제대로 시체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는 긴 절차를 밟아주었을 리 없었다. 제자가 가장 원망하는 대상이 나일 텐데. 말도 안 되지.
하물며 남들 시선을 피해서 나를 죽인 상황이 아니던가.
‘그럼 회귀한 뒤에 마음이 바뀌었나?’
아니야. 이것도 말도 안 된다. 회귀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리고 그가 진담이 아니라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장난치듯 말하는 제자의 눈동자였다. 말투와 달리 그의 눈동자는 아주 차갑기 짝이 없었다.
‘혹시 날 가지고 노는 건가?’
영문은 모르겠지만…… 일단 정석대로 대답하자.
“당연히 놀랄 일입니다. 저는 사내인걸요.”
“뭐 어떻습니까.”
“예?”
“스승님은 어차피 사내도 좋아하시잖습니까.”
“!”
이 제자가 오늘 나를 제대로 가지고 놀려나 보구나. 술잔을 쥐다가 순간 너무 놀라서 제자에게 술을 부어버릴 뻔했다.
나는 술잔을 꽉 부여잡고서 제자를 노려보았다.
‘저 새끼…… 회귀 전에 내가 3황자를 연모한 일을 아나? 알고 저러는 거 같은데?’
나는 회귀 전에 3황자를 사모했다. 호되게 마음 앓이를 한 후에 결국 연정을 접어야 했지만, 이 시기의 나는 3황자를 아직 연모할 때였다.
제자는 그걸 알고서 일부러 조롱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게 이미 3황자에 대한 마음을 접은 나라는 걸 모를 테니까.
아니면 바람둥이 호색한으로 유명한 내게 저런 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
표정 관리할 자신이 없어져서 나는 일부러 술잔과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술을 마셨다. 그러나 부글부글 끓는 속에는 술을 부어도 소용없었다.
결국 술 마시기도 관두고 제자를 재차 보니, 내게는 술을 따라준 제자가 자기는 홀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술 마시며 꽃을 감상하자 하시더니. 전하께선 물만 드시는군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자 비꼬자, 제자는 물잔을 내려놓지도 않고서 대답했다.
“제자는 스승님께 술을 따라 드렸는데. 제자의 잔을 채워줄 사람은 없어서요.”
“그렇군요. 신이 눈치가 없었습니다.”
나는 보란 듯 그의 술잔을 가져간 다음 넘치기 직전까지 술을 부어 내밀었다.
그러고서 주전자를 내려놓자 제자는 무표정하게 그 술잔을 가져다 한번에 입에 털어놓았다.
그는 분명 무표정한데. 내 눈엔 그가 날 비웃는 것처럼 여겨져서 괜히 더 성질이 났다.
이 상황도 짜증 나는데, 얼굴만큼은 한여름 꽃처럼 아름다운 제자의 용모에 부아가 더욱 치밀었다.
나는 일부러 그에게 술을 더 따라주었다. 취해버려라.
제자는 순순히 받아 마셨다. 그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나는 제자가 술잔을 내려놓자마자 또 술을 따라주었고, 제자는 이번에도 거절하지 않고 마셨다.
‘안 취하나?’
그러다가 또다시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제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은 정하셨습니까?”
“술이나 더 드시지요.”
“술병이 다 비기 전에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요?”
“일단 드시고 계시지요.”
어차피 날 놀리기 위해 한 제안이면서. 무슨 수를 써서든 내게 대답을 듣겠단 건가?
내가 그를 연모하겠다고 하면 날 모욕하거나 비웃고, 내가 그를 연모할 수 없다고 하면 무엄하다고 꾸짖기라도 할 참인가?
나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 능구렁이 같은 자식에게 또 술을 따라 주려다가, 마음을 바꾸어 이번에는 술잔 바닥만 조금 젖을 정도로 따라주었다.
제자는 이번에도 술을 한번에 털어 넣으려다가, 내가 쥐 오줌 정도로만 따른 술을 보고 손을 멈칫하더니, 픽 웃으며 나를 보았다.
“이게 뭔가요 스승님.”
천천히 생각하려고 수를 쓴 게 너무 티가 나나……?
“술은 천천히 마셔야 하는 겁니다.”
그래도 모른 척 근엄한 투로 대답하자, 제자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염려하시는 게 제자의 건강입니까, 거절 뒤 여파입니까.”
“둘 다요.”
제자가 이번에는 안주로 튀긴 떡을 집어 먹는 걸 보자니, 회귀 전 일화가 떠올랐다.
맞아. 생각해보니 제자는 주량이 어마어마했다. 회귀 전, 제자가 갑자기 황위 다툼에서 위로 치고 올라갈 때 일이던가.
그와 8황녀가 술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8황녀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사망했는데 제자는 멀쩡했지.
당시 두 사람이 하루종일 술을 마셨다고 들었으니…… 하긴. 그런 주량이라면 내가 지금 따라주는 몇 잔 정도로는 안 취하겠네.
나는 힘없이 내 술잔을 집고서 술을 두어 모금 마셨다. 난 제자와 달리 말술이 아니니 적당히 마셔야지. 술 취해서 헛소리라도 하면 큰일 날라.
그러다 식도를 타고 싸한 기운이 내려가는 순간.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제자가 나한테 자기를 연모해보라 하는 건 회귀 전 이 시기의 내가 3황자를 연모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그래서 기분이 나빴는데. 생각해보니 이걸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제자는 남색가도 아니고 날 좋아하지도 않으니, 내가 자기를 짝사랑한다고 해서 내 마음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
막상 내가 대놓고 자기를 연모한다고 말하면, 처음에만 좀 놀려먹고 비웃을 뿐. 나중에는 막상 자기가 귀찮아질 거다.
어쩌면 그 귀찮은 마음 탓에 날 향한 경계심까지 좀 잦아들지도 몰랐다.
바람둥이 흉내를 내던 내가 그에게 매달리면 좀 설정이 바뀌는 것 같긴 하지만…… 그거야 다른 사람의 시선이고. 제자는 내가 3황자 연모한 일도 아는 듯하잖아?
내가 13황자에게 반한 척 굴면, 13황자도 내가 회귀 전과 달리 행동하더라도 덜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이야. 나 천재인가? 생각해보니 아주 좋은 방법인데?’
좋아. 그렇게 하자.
단, 갑자기 3황자에서 13황자로 연모 대상을 바꾸면 수상쩍으니, 처음에는 양다리로 시작하다가 나중에 천천히 갈아타자.
‘이야 진짜 괜찮아. 나 정말 천재인가?’
나는 마음을 먹자마자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아직도 궁금하십니까?”
제자가 이제는 술을 혼자 따라 마시다가 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자기가 내게 한 제안조차 까먹은 표정이었다.
“대답이요. 연모에 대한.”
내가 얼른 짧게 설명해주자, 제자는 그제야 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꼭 제자가 스승님께 연모한다고 먼저 청하고 답을 기다리던 것 같네요.”
“…….”
“네. 대답해 주시기를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자가 눈웃음을 지었다.
어딜 웃냐고, 그의 이마를 한 대 콩 때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서 나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그러고서 일부러 바람둥이 행세를 할 때나 짓던 매력적인 표정을 지으며 밝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전하를 연모해보아도 괜찮을 거 같긴 합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제자의 눈웃음이 조금 흐려졌다. 자기가 먼저 제안한 일이면서. 내가 순순히 대답할 줄 몰랐던 듯했다. 제자가 생각한 내 대답은 거절이었나 보네.
그가 질색하는 듯해서 나는 일부러 한 번 더 덧붙였다.
“전하께선 제가 본 모든 이들 중 가장 고우시거든요.”
“!”
오늘 술자리를 가진 이래 그가 처음으로 내 말에 진지하게 흔들리는 걸 보는구나. 아주 유쾌하다 못해 웃음이 나오려 한다.
그래도 웃음을 꾹 참고서 나는 미를 탐하는 호색한처럼 지껄여댔다.
“전하께서 감상하자 하시는 저 겨울 국화보다 훨씬 청아하시지요. 하지만 존귀한 분이라 감히 마음에 품어 볼 수도 없는 분이신데. 이리 먼저 판을 깔아 주신다면야……”
뒤의 끝말을 생략하고 방긋 웃자, 나를 빤히 바라보던 제자가 “하.” 하고 짧게 한숨을 뱉었다.
그러더니 헛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터트리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 나오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