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날 의심하지 말아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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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날 의심하지 말아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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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날 의심하지 말아줘요
2022.04.04.
제자의 목소리는 내 머리에 찬물을 붓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저절로 등이 움츠러들었다.
애써 그런 표정을 감추고 돌아보자, 말고삐를 쥐고 선 제자가 보였다. 제자에게 고삐를 잡힌 말은 내가 타고 온 말이었다.
심장이 철렁했으나 나는 모른 척 제자에게 인사했다.
“제 말을 붙잡아 주신 건지요? 감사합니다, 전하.”
제자는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9황녀에게 보냈다.
“누님이 왜 제 스승님과 함께 있습니까?”
아아. 맙소사. 큰일 났다. 제자의 표정에 이미 수상해하는 기색이 걸렸다.
전생이라면 3황자를 졸졸 쫓아갔어야 할 내가 9황녀와 있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게 분명했다.
“네 스승이 날 구해주었단다.”
내 사정을 모르는 9황녀는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신뢰가 가득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며 이렇게 칭찬하기까지 했다.
“이국사의 자질과 학식에 대해선 내 이미 들어본 바가 있었는데. 오늘 보니 이국사는 무과 급제자들만큼이나 기마 실력도 뛰어나구나.”
(이국사 : 황손들의 스승)
아아아. 9황녀 전하, 제 제자 표정 좀 봐주세요. 완전히 현장 검거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잖아요…….
“그렇군요. 스승님께선 학식만큼 기마 실력도 뛰어나시군요. 동생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님.”
당장 사직서를 내는 게 생존 확률을 더 높여주지 않을까? 그럴 거 같은데?
그런데 황후가 직접 나를 13황자의 스승으로 지시한 건데. 벌써 사직서를 내도 되나?
안 되겠지. 그랬다간 황후가 우리 요씨 가문에게 화풀이를 하려 들겠지.
젠장. 이걸 어째야 하는 거야?
* * *
“스승님께서 누님과 함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대회가 거의 끝난 후. 인부들이 뒷정리하는 걸 바라보며 나도 심장 정리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뼈 있는 말이 들려왔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삐걱삐걱 돌려 바라보자 역시나. 제자가 내 쪽으로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연히 마주쳐서요.”
그를 보자 가까스로 눌러둔 심장이 도로 톡 튀어나와서 온몸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나는 손을 등 뒤로 슬그머니 숨겼다.
그러나 제자는 눈썰미 좋게도 그걸 바로 눈치채고는, 팔을 뻗더니 내 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덜덜 떨리는 내 손을 보자 제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왜 이리 떠십니까?”
네가 무서워서요.
“고, 고삐를, 너무 세게 움켜잡아서요.”
나는 얼른 둘러댔다. 그가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겼으나, 제자는 다행히 믿는 눈치였다.
그뿐만 아니라 혀를 차더니 내 손을 직접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는 기절할 만큼 놀랐으나, 제자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을 계속했다.
심지어 잘했다. 그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내 손을 이리저리 눌러대자 저절로 ‘어구 시원하다’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물론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나는 얼이 빠진 채 내 손과 제자의 손이 얽힌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호흡이 지났을까. 제자가 내 손을 내려다본 채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이 제자는 스승님이 셋째 형님과 있을 줄 알았습니다.”
“네? 아니요. 전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전하.”
“…….”
“왜 그리 생각하신 건지……”
“스승님은 늘 셋째 형님을 따라다니니까요.”
“아닌데요?”
“맞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한 제자가 내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얼른 손을 회수했다. 보나 마나 아직도 손은 떨릴 테니까.
그런데 손을 회수하고서 보니, 놀랍게도 내 손이 정말 더이상 떨리지 않고 있었다.
뭐지. 진짜로 고삐를 세게 쥐어서 떨렸던 거였나?
* * *
“언니, 오늘도 선안 공자랑 말 타러 갔어? 사냥대회 때 둘이 또 붙어 다녔어?!”
“오늘 사냥대회는 황족이랑 종친들 참석하는 대회고, 나는 스승 자격으로 초대받은 거라 선안 없었다 동생아.”
“거짓말!”
“걔는 아직 과거에 급제 못 해서 이런 데 초대받지도 못해.”
집에 돌아가자마자 빌어먹을 동생이 달려와서 나를 공포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데려와 준다.
몹시 짜증 나지만 어쩔 수 없다. 내다 버릴 수도 없잖아.
내 동생은 순기능과 역기능을 모두 갖춘 완전체라 생각하자.
“언니, 선안 공자-.”
대답해주기도 귀찮아서 나는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아 잠근 다음, 책상 앞에 앉아 필기구를 꺼냈다.
지금은 동생이랑 말다툼할 때가 아니야. 내 안위를 좀 계산해보아야 한다고.
보자…… 일단 9황녀.
전생에는 나랑 데면데면하던 사이였지. 하지만 오늘 일로 나한테 호감을 느끼게 된 것 같아.
날 바라보던 그 눈동자는 분명 첫눈에 반했을 때나 나올 그런 눈동자였어.
‘괜찮나?’
바람둥이 행세를 하면서도 나는 감당하기 어려운 집안과는 얽히지 않으려 애썼다.
요구를 무시하기 어려운 명문가 소저 쪽에서 혼담을 넣을 경우 거절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아마 비슷한 명문가 사람과 혼인하진 못할 거다. 남장하고 있으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성품이 온화하고 목울대가 작고 외모가 꽃 같은 청년을 찾은 다음, 그 청년을 여장시켜서 나와 혼인시킬 계획을 세우고 계신다.
이 때문에 우리 가문 힘으로 회유할만한 꽃도령들을 얼마나 열심히 물색하시는지 모른다.
여하간, 이런 처지이다 보니 9황녀가 내게 호감을 갖는 건 절대로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이루어질 수도 없을뿐더러, 거절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아아! 아니. 아니야.
‘이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생각해보니 황후는 내가 여자인 걸 알고 있잖아?
내가 태어났을 때 의원은 어머니가 더이상 아이를 낳지 못할 거라 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황제와 황후를 찾아가서 나를 남아로 기르겠다고 청했지.
‘뜻밖에 린화가 더 태어나긴 했지만.’
어쨌든 황후는 내가 여자란 걸 알고 있으니, 9황녀가 혼담을 넣어 달라고 조르더라도 알아서 차단할 거다.
좋아. 좀 부담스럽겠지만 이쪽은 괜찮아.
‘그럼 역시 문제는 제자 쪽인가.’
머리가 비상하니 분명 이상하다고 의심하고 있겠지.
회귀 전엔 3황자를 따라갔던 내가 지금은 9황녀를 구해주었고, 회귀 전엔 기마술이 뛰어나지 않던 내가 지금은 9황녀에게 칭찬까지 듣고…….
“미치겠네.”
차라리 9황녀가 내게 화를 냈더라면 제자가 별 의심을 하지 않을 텐데. 일이 너무 잘 풀리니 오히려 더 의심받을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회귀 전처럼 3황자나 따라갈걸.
‘…하지만 이번 삶에는 3황자 근처에 가고 싶지 않아.’
그렇게 멍하게 있기를 일주향 정도. 짧아진 향초를 꺼낸 다음 새 향초를 꺼내 모래에 꽂으려는데 이 시기 즈음에 벌어진 일이 떠올랐다.
맞아. 6황자! 지난 삶에서, 6황자는 13황자에게 화가 나자 내게 화풀이를 한 적이 있다.
꼬투리를 잡혀서 뺨을 서른 대나 맞았었지. 제자도 이 사건을 알 거다.
이 사건을 내가 피해가지 않으면?
내가 회귀 전처럼 6황자에게 뺨을 서른대 맞고 쓰러지면 제자도 의심을 풀지 않을까?
좋아. 또다시 뺨 서른대를 맞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눈이 어질어질하지만, 제자의 의심을 사 독살당하는 것보단 낫겠지.
6황자에게 내 뺨을 주자고!
* * *
이틀 뒤. 나는 6황자에게 뺨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다음 월무궁으로 들어갔다.
맞을 때는 무지막지하게 아팠고, 맞은 다음에는 얼굴이 퉁퉁 부어서 며칠간 몰골이 말도 아니었던 기억이 있지만 괜찮다. 후유증이 남진 않았잖아?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 뺨 서른대를 맞고 제자의 의심을 풀 수 있다면 맞을 거다.
‘그러고보니 전생에 13황자를 멀리하게 된 데는 그 일도 영향을 주었지. 때린 건 6황자지만, 6황자가 날 때린 건 13황자를 미워해서였으니까.’
13황자 옆에 있다간 순장 당하겠다고, 선안에게 흥분해서 하소연한 기억이 난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과거 일을 생각하느라 멍하게 걸어가는 사이 너무 많이 걸어버린 모양이다.
날 부르는 제자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돌아섰다.
제자는 자기의 서재 앞에 삐딱하게 기대어 선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재로 들어왔어야 할 내가 넋을 놓고 계속해서 걸어가고만 있자, 지켜보다가 부른 듯했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송구하옵니다, 전하.”
나는 얼른 사죄하고서 제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제자가 ‘무슨 생각을 하느라 정신을 빼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어쩌지, 염려했으나 제자는 내게 별 관심이 없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곧장 수업을 주고받는 서재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회귀 전의 학식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애써 제자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늘은 이쯤 하지요.”
슬슬 수업을 끝낼 때가 된 듯해서 나는 먼저 책을 덮었다. 제자도 반대하지 않고 따라서 책을 덮었다.
그러고 있자니 밖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얼핏 들어도 6황자 전하 어쩌구 하는 것 같았다.
‘6황자가 내 뺨을 때리러 왔구나.’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기에 두려운 마음은 없다. 아니,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천천히 뒷정리를 하다가 괜히 문가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밖이 소란스럽군요."
날 보는 제자의 시선이 묘하다. 그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겠지.
어쩌면 제자는 내가 지금부터 어떻게 반응할지 살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짐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방 안으로 제자의 태감이 들어와 알렸다.
"전하. 6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제자의 태감은 힐긋 내 쪽을 보며 덧붙였다.
"요 대인을 뵙고 싶다 합니다."
제자는 느긋하게 따라 일어서며 내게 물었다.
"만나실 겁니까. 스승님?"
그의 시선이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내가 회귀의 기억이 없는 평범한 스승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황자님이 오셨는데 당연히 뵈어야지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느긋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것처럼.
그러고서 밖으로 나가자 제자가 내 뒤를 따라 나왔다. 회귀 전과 꼭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6황자가 내 뺨을 왜 때렸더라?’
제자 때문에 화가 나서 꼬투리를 잡은 건 생각나는데. 그게 정확히 무슨 꼬투리였더라?
하긴.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흘러가는 대로 휩쓸리기만 하면 되는데.
그래도 막상 정원으로 나와 6황자를 마주하니 궁금해지네. 찾아올 때는 웃는 얼굴로 찾아온 6황자가 대체 뭐로 꼬투리를 잡았던 걸까?
어? 웃는 얼굴?
'6황자가 웃으면서 찾아왔던가?'
6황자 쪽을 보았다가 나는 흠칫했다.
기억이 완전하진 않지만, 6황자가 웃으면서 찾아왔던 것 같진 않다.
처음부터 화난 얼굴로 찾아와서 대놓고 시비를 걸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랬기에 '제자한테 화난 걸 나한테 화풀이하는구나'라고 바로 느꼈던 거고.
‘그런데 왜 이번엔 웃으면서 왔지?’
그 의구심이 풀리기도 전에, 6황자가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나를 끌어안으며 외쳤다.
"고맙네 요 대인!"
그 뜬금없는 인사에 나는 굳었다.
"예?"
내 뺨을 때리러 온 게 아니야? 나한테 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야? 뭐가 고마워?
어리둥절해 있자니, 6황자가 끌어안았던 내 등을 놓아주고서 호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요 대인이 아니었다면 둘째 형님과 나 둘 다 곤혹스러웠을 거네. 요 대인이 아홉째 동생을 구해준 덕에 우리가 면이 살았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감각이 났다.
젠장! 맞아. 6황자가 내 뺨을 때린 건 13황자에게 화가 나서이고, 13황자에게 화가 난 건 9황녀 일 때문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중간에 나서서 9황녀를 구했고, 9황녀는 다치지 않았다.
당연히 2황자와 6황자는 황제에게 혼나지도 않았다.
즉, 6황자가 13황자를 원망하며 내 뺨을 때릴 일은 아예 사라진 거였다.
그 깨달음을 얻는 동시에 뒤에서 어마어마하게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분명 제자다. 제자가 날 쳐다보고 있어!
이를 모르는 6황자는 그저 호탕하게 웃으면서 내 어깨만 두드렸다.
"둘째 형님도 요 대인에게 아주 고마워하고 있다네. 같이 오려 했는데, 열셋째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나 혼자 왔지."
아뇨 부담스러운 건 난데요.
"한 번 성환궁으로 놀러 오게. 내가 아주 잘 대접하겠네."
맙소사. 2황자까지도 나한테 고마워하고 있다고?
미치겠다. 난 이걸, 이걸 이러려던 게 아닌데! 제자에게 잘 보이려던 건데! 왜 뜬금없이 다른 황자 황녀들하고 사이가 가까워지는 거야?
‘더 의심스러워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