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반하게 하려던 건 아닌데
(8/159)
9화. 반하게 하려던 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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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반하게 하려던 건 아닌데
2022.03.31.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나는 공손한 자세로 13황자와 7황자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자 제자야. 봐라. 내가 네 편을 들고 있다.
하지만 제자보다 7황자가 먼저 반응했다.
7황자가 손을 올리는가 싶더니, 찰싹 소리가 귓가에서 나며 시야가 옆으로 돌아갔다.
“!”
나름 공손하게 거절했는데도 7황자가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내 뺨을 내려친 것이다.
‘진짜 저놈의 성격. 전생에 제자가 빨리 죽인 이유가 있다니까.’
뺨이 욱신거리지만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다행히 욱하는 성격이지만 7황자도 멍청하진 않았다. 머리를 굴리기 전에 성질머리가 먼저 폭발하는 유형일 뿐.
일단 성질대로 손을 휘두르고 나자, 7황자는 아차 싶은지 바로 손을 내렸다.
13황자는 뒷배 없는 그의 이복동생이지만, 우리 요 씨 가문은 연이어 5대가 일사직을 지낸 최고 명문가 중 하나란 걸 떠올린 거겠지.
비록 아버지 대에서 일사직을 내지 못해 전대만큼의 권력은 없으나, 어쨌든 아직도 손꼽히는 명문가니까.
“요 대인이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사과하기엔 자존심이 상하나 보다. 7황자는 우물거리다가 그렇게 툭 던지듯 말하고는 소매를 털며 휙 돌아서 나가버렸다.
그가 폭풍우처럼 휩쓸고 떠나자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7황자는 원래도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여서 황제에게 자주 혼나긴 했다. 덕분에 적도 많았지.
하지만 회귀 전에 나는 7황자에게 맞은 적이 없었다. 데면데면했지.
그런데 회귀 후에는 그에게 뺨까지 맞았다. 날 때리고 마지못해 떠나긴 했지만, 7황자도 속으로는 분명 원한을 품게 되었을 거다. 회귀 전보다 사이가 나빠진 것이다.
‘앞으론 제자를 편들더라도 다른 황족들과 적을 만들진 말아야겠어.’
나는 미래 정보를 마음껏 활용할 수 없는 처지 아닌가. 괜히 잘못 행동하다 미래가 변하기라도 하면 대응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13황자가 본격적으로 황위 쟁탈에 참여하면 싫어도 싸울 일이 많을 텐데. 내가 나서서 개인적인 적까지 만들 순 없었다.
‘눈치껏 굴자.’
“왜 제 편을 드십니까?”
하지만 7황자에게 뺨을 맞은 일로 끝이 아니었다.
7황자가 떠나고 발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제자는 바로 내게 물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가 내 눈동자를 분석하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마워하는 표정이 아니라 수상해하는 표정으로.
몇 차례 회귀하는 동안 내내 자신을 죽였다던 내가 갑자기 그를 돕자 미심쩍게 여기는 듯했다.
하긴. 당장 바로 전생만 해도…… 나는 7황자 편을 들었으니까.
맞아. 갑자기 친한 척해도 수상하지.
“송구하오나 전하. 전하께서 승마에 출중하단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사옵니다.”
이에 나는 13황자를 편들어서가 아니라, 그의 부족함을 염려해서 이렇게 행동했단 핑계를 댔다.
물론 나는 13황자의 승마술이 군부의 일사직들보다 훨씬 뛰어나단 걸 안다. 하지만 이 시기는 13황자가 자신을 낮추던 때라, 회귀 전 이때의 나는 13황자의 실력을 몰랐다.
그러니 이런 핑계를 대어도 괜찮겠지.
13황자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회귀 전 기억을 떠올리는 걸까. 아니면 내 말의 진위를 가늠하는 걸까.
그 시험 같은 시간이 지난 뒤. 13황자가 차갑게 돌아서며 지시했다.
“들어가시지요. 속히 치료하지 않으면 얼굴에 손자국이 날 겁니다.”
일단 넘어간…… 건가?
* * *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 종이와 붓을 꺼냈다.
전생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최대한 머릿속을 뒤적거렸다.
13황자처럼 전생 정보를 대놓고 활용하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대비가 될 것 같았다.
오늘 같은 일만 하더라도 그래. 7황자와 13황자의 충돌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예 그 자리를 피한다거나 더 좋은 대답을 찾아두는 둥의 대비는 할 수 있었다.
내가 7황자와 13황자가 충돌하는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중에 13황자를 위로해주기만 하면 됐겠지.
그러면 13황자는 날 수상쩍게 쳐다보지 않았을 거다. 날 좀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회귀 전 몇 해 간의 일을 샅샅이 기억해내는 건 각오만큼 쉽지 않았다.
‘계기가 있으면 생각날 거 같은데. 그냥 갑자기 떠올리려니 잘되지 않아.’
다행히 사냥대회는 7황자가 언급한 덕택에 바로 떠올랐지만.
거기서 두 가지 큰일이 있었지. 하나는 7황자가 낙마해 다리를 다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2황자와 6황자가 싸우다가 9황녀가 다치는 일이었다.
‘그 둘이 13황자에게 일을 덮어씌우려 했지.’
9황녀는 황후 소생의 딸인지라, 외가 쪽 힘이 없는 13황자가 여기에 연루되었더라면 몹시 곤란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13황자는 ‘운이 좋게도’ 사냥대회 도중 황제와 마주쳐 함께 돌아다니다 헤어졌다.
9황녀가 다친 그 시각은 13황자가 아직 황제와 함께 있을 때였다.
덕택에 2황자와 6황자의 거짓말은 바로 밝혀졌고, 황제는 이 일로 크게 노해서 몇 개월간 두 황자의 문안조차 받지 않았다.
그때는 ‘참 운도 좋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운이 아니었을 거야.’
아마 9황녀가 다치는 사건을 미리 알고서 황제의 곁에 머물러 위험을 피해간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자세한 정황은 모르겠다. 회귀 전 나는 사냥대회에서 3황자 근처에 머물렀기에 이 사건과는 좀 동떨어져 있어서.
하지만 당시 3황자는 아무 일도 없었고 무사히 사냥대회를 마쳤으니…… 좋아. 난 이번엔 13황자를 따라다니자.
아니, 아니야. 아니다. 13황자를 따라다니면 회귀 전보다 일찍 2, 6황자에게 찍힐 위험이 있잖아.
13황자가 황위를 노리기 시작한 후로는 어차피 3황자를 제외한 모든 황족들과 사이가 멀어질 테지만 그전까지는 적을 만들면 안 되지.
13황자에게 잘 보이는 것과 필요 없는 적을 만드는 건 다른 일이다.
13황자에게 잘 보인다고 다른 황족들에게 밉보였다간, 13황자에게 죽기 전에 다른 황족들한테 먼저 죽을 테니까.
‘그런 위급한 상황에 제자가 내게 도움을 줄 리도 없고.’
* * *
사냥대회 날.
나는 대회가 시작하자 미리 계획한 대로 행동했다.
대회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 뒤. 황족들과 종친들이 순서대로 숲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다가 느릿하게 말을 몰아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13황자가 있는 쪽으로도 원래의 3황자가 있는 쪽으로도 가지 않아야지.’
마음 같아서는 막사에서 쉬고 싶지만, 황제가 주최한 놀이에서 그랬다간 황제에게 미운털이 박힌다.
그러니 사냥터 끄트머리에 있는 창서호에서 시간을 때우다 올 생각이었다.
거기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면 7황자는 다리가 부러져 있을 테고, 9황녀도 다쳤을 테고, 2황자와 6황자는 황제에게 혼이 나 있고, 13황자도 무사히 제힘으로 위기를 헤쳐나온 상태겠지.
‘좋아. 완벽해.’
하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에 맞닥뜨렸다.
‘이런 말도 안 될 경우가 있나.’
숲의 향기를 맡으면서 ‘역시 살아 있는 게 최고야, 이번 삶에는 아주 오래 살자, 13황자랑 얽히지 말고 무병장수하자.’ 하고 다짐하며 이동하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무슨 소리지?
의아했으나, 나는 안전한 길을 걸어가겠단 마음가짐에 따라 소리 나는 쪽으로 가는 대신 제자리에 서서 소리를 들어보았다.
‘싸우는 소리 같은데?’
정확한 단어는 알아듣기 힘들지만, 남자 두 명이 말다툼하는 소리는 확실하다.
“!”
이럴 수가. 혹시 2황자랑 6황자가 싸우는 소리인가?
2황자랑 6황자가 싸우다가 9황녀를 다치게 했다 했지. 그 사건 현장인가?
맙소사. 그럼 근처에 9황녀도 있나?
이럴 수가! 13황자를 피해 인적 드문 곳으로 오려 했을 뿐인데. 그 인적 드문 곳이 9황녀가 다치는 사건 현장이었다니!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보니 회귀 전에는 3황자를 따라다녔기에, 9황녀가 다친 곳이 어디인지, 7황자가 다친 곳이 어디인지, 13황자가 황제를 만난 곳이 어디인지 나는 하나도 몰랐다.
‘……괜찮아. 아직 아무도 날 못 봤어. 다른 곳으로 빠지자.’
마음이 혼란해진 것도 잠시. 나는 끼어들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고서 말머리를 슬그머니 돌렸다.
저쪽으로 가자, 말아. 조용하게.
그러나 말이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어디선가 “이랴! 이랴!” 하고 당황해 외쳐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수풀을 헤치면서 웬 말 한마리가 미친 듯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가 있는 쪽으로 오는 건 아니고 좀 더 앞쪽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말이 왜 저렇게 미친 듯이 뛰고 있지? 말 위에 앉은 사람은 말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잖아?
저건 또 무슨 소동인가 싶어서 자세히 보니, 말 위에 앉은 사람은 7황자이다.
7황자는 질겁한 얼굴로 말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웬일인지 말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7황자가 기마술에 뛰어나단 걸 떠올리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7황자도 나를 발견했는지 크게 외쳤다.
“요 대인, 도와주시오!”
그러나 막상 불러 놓고서, 도와줄 시도를 할 틈도 없이 7황자는 멀어지고 있었다.
도와줄 수 있다 하더라도 안 도와주었겠지만. 7황자의 말이 날뛰는 게 제자의 계략 때문이라면, 내가 거기에 손을 대면 안 될 테니까.
하지만 몇 호흡 뒤. 나는 7황자가 내가 투척하고 간 똥을 깨달았다.
그 망할 황자! 내 이름을 부르고 갔잖아! 근처에 6황자와 2황자가 있을 텐데!
뒤이어 다른 생각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혹시 9황녀가 다치는 데 저 사건이 연루되어 있나?’
2황자와 6황자가 싸웠는데 9황녀가 뜬금없이 왜 다쳤나 했더니. 혹시 7황자의 말 사건에 놀라서인가?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설령 그렇다 한들 내가 엮이지 않는다면 그냥 호기심을 누르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피하면 그만인데.
하필 7황자가 ‘요 대인’이라고 크게 외치면서 가버렸다. 분명 2황자와 6황자가 들었을 거다.
내가 현장 근처에 있었단 걸 알았으니, 어쩌면 2황자와 6황자는 이번에는 13황자 대신 나를 9황녀 부상 사건에 끌어들일지도 몰랐다.
때마침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연쇄 작용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젠장. 선택권이 없잖아.’
나는 어쩔 수 없이 말을 달려 아까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 부근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러자 9황녀가 탄 말이 아까의 7황자 말에 비견될 만큼 미친 듯 뛰는 게 보였다.
9황녀는 말을 두 팔로 감싼 채 끌어안고 있었고, 2황자와 6황자는 당황한 얼굴로 이제야 자기들 말에 올라타고 있었다.
싸우는 장소에 황녀가 같이 있던 게 아니구나. 9황녀는 그냥 근처를 지나가던 건데 7황자의 비명을 듣고 말이 놀랐나 보다.
2황자와 6황자는 그걸 보고 놀라서 9황녀를 구하려 했지만 구하지 못했던 거야.
젠장!
나는 9황녀가 탄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9황녀를 구해내지 못한다면, 13황자가 피해간 사건을 내가 덮어쓰게 될 거란 감이 강하게 왔다. 무조건 9황녀를 구해내야 했다.
“이랴!”
다행히 나는 저 두 황자와 달리 처음부터 말에 타고 있던 데다, 회귀 전에 반강제로 13황자를 따라다니면서 기마술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나는 최대한 속력을 내어서, 주위 나무들이 질주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 빠르게 뛰게 했다.
“전하, 고삐를 이쪽으로 주세요!”
그러다 황녀가 탄 말과 엇비슷하게 달리게 되었을 즈음, 9황녀를 향해 외쳤다.
그러나 9황녀는 말을 끌어안은 채 외쳤다.
“손을 못 떼겠다!”
안 그래도 그렇게 보인다.
나는 이번에는 말을 최대한 황녀의 말에 가깝게 붙인 다음 고삐를 직접 낚아챘다.
그러고 고삐를 당기면서 말이 멈출 수 있도록 조절했다.
황족들이 타는 말은 어차피 죄다 잘 훈련된 말이라, 정신만 잘 집중하면 바로 진정시킬 수 있었다.
“말 목을 너무 힘줘서 잡지 마세요, 전하.”
그러면서 다시 황녀에게 말하자, 말 속도가 늦춰진 덕인지 황녀도 이번에는 말 목을 조를 듯 준 힘을 조금 풀었다.
그러자 말은 한층 더 속도를 늦추었고 황녀도 빠르게 안정되었다.
“고삐를 잡으세요 전하! 이제 멈추면 될 겁니다.”
나는 다시 옆에서 외치면서 황녀에게 고삐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황녀는 고삐를 잡으려 한쪽 팔을 뻗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다! 떨어지겠어!”
결국, 내가 직접 고삐를 통제해 말을 멈추게 하려던 때였다.
하필 나와 황녀 사이의 멀지 않은 지점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젠장!’
얼마나 위치가 정교하던지, 이대로 달리다가는 내 팔은 나무에 부딪혀 부러지고, 그 충격으로 황녀의 말은 엎어지고 황녀는 바닥에 나동그라질 게 뻔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황녀가 탄 말로 건너가 말고삐를 직접 당겨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다행히 말은 바로 진정되었다.
나는 말을 멈추자마자 얼른 말에서 내린 뒤 고개를 숙이고 황녀에게 사죄했다.
“송구하옵니다, 황녀 전하.”
원래라면 황족이 탄 말에 멋대로 뛰어들면 안 된다. 법전에 쓰여 있진 않지만, 그냥 기본 상식이다.
하지만 위급한 상황이었으니 이해해주지 않을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황녀가 영 대답이 없었다.
설마. 이런 위급한 상황이었는데도 무례했다고 따지려는 걸까?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회귀 전 여인들이 ‘그런 얼굴을 하면 화를 내다가도 마음이 약해진다’고 평했던 아련하고 먹먹한 표정을 지으면서 황녀를 올려다보았다.
황녀들에겐 바람둥이 행세를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위급한 상황이니까.
황녀가 내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게 놀라서인지, 아니면 이런 위급 상황에도 예법을 우선해서인진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얼굴이 새빨개진 황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복숭아 같은 뺨을 하고서 날 바라보는 황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첫눈에 상대에게 반한 얼굴이었다.
‘곤란한데.’
그 열렬한 눈빛에 당황해서 머리가 얼어붙으려는 순간. 이번에는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무얼 하십니까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