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너 전생에 안 이랬잖아2022.03.28.
“스승과 제자라고요?!”
튀어나올 뻔한 놀란 표정은 다행히 선안의 외침에 묻혔다. 나는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하며 선안을 보았다. 선안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유 가주와 13황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유 가주가 뱉은 ‘스승과 제자’라는 말에 ‘귀인’의 정체를 이제 짐작한 듯했다. 내가 제자로 둔 사람은 13황자뿐이니까. 선안은 아예 대놓고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님. 할아버님께서 귀인이라 부른 저 공자가 13황자님이란 뜻입니까?”
“그래.”
유 가주는 이번에는 솔직하게 대답하고서 선안에게 지시했다.
“13황자 전하께 인사를 올리거라.”
선안은 좀 놀라긴 했으나 빠르게 침착해져서 격식에 맞게 인사를 올렸다.
“13황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그러나 나는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마음은 제자만 살피고 있었다. 회귀 전에 선안이 내게 말해준 그 ‘장기 귀인’ 일화의 주인공이 13황자였을 줄이야. 그놈의 귀인 소리를 듣고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유 가주가 귀인이라 부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기에,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알아맞힐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유 가주가 13황자를 귀인으로 소개한 건 진짜 귀인이라 여겨서가 아니라, 그냥 선안 앞에서 둘러대느라 한 말인 줄 알았지. 그렇지만 속으로 여러 가지 한탄해보아야 이제는 다 소용없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나는 제자의 앞에서 그의 방식으로 잘난 척 장기를 설명했다. 내 머리가 자기만큼 출중하지 않단 걸 아니까, 제자는 이 상황을 수상하게 여기겠지. 두려워서 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다.
“노부의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었으니 보답을 해야지. 요 공자, 원한다던 은신처를 주도록 하겠네.”
그나마 유 가주가 이렇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정신이 고갈되어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한없는 자괴감에 빠져들어 가다가 나는 기뻐서 유 가주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십니까?”
유 가주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선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은신처를 나한테 준다면서 손주 어깨는 왜 두드리세요. 불안하게.
“하지만 하나만 주겠네. 아니면 이 노부의 손해니까.”
계산적이시구나. 그러니 한 가문을 일구어낸 거겠지만. 그래도 한 개라도 얻는 게 어디야? 사실 열 개를 구하려 하긴 했지만, 그건 만약을 대비해서이다. 은신처가 한 개라도 13황자에게 들키지 않을 장소라면 그걸로도 충분했다. 나는 기쁜 얼굴로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대인.”
유 가주는 흐뭇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필요하다면 얼마든 찾아오게. 또 노부를 도와준다면 그때마다 하나씩 주지.”
네. 하지만 한 번은 겸양하자.
“그러면 대인께서 손해 보실 텐데요.”
유 가주는 껄껄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좋은 인재와 친분을 다지는 일이라면 그 정도는 괜찮다네.”
정말로 호탕하시군요. 내가 장기 말 움직이기 전까지는 좀생이 같으시더니. 나는 속마음을 누르고서 덩달아 온화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일이 잘 풀려간다 싶은 그 순간.
“유 가주. 저 은신처 위치는 내게도 알려주어야 하지 않나?”
내내 지켜보던 13황자가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말을 꺼냈다. 나는 웃다가 얼음이 되어서 제자를 보았다. 뭐라고? 유 가주 역시 의외란 얼굴로 13황자에게 물었다.
“전하께서도 은신처가 필요하십니까?”
“아니. 하나 요 대인은 내 스승이 아닌가. 스승의 은신처 위치는 당연히 제자가 알아야지.”
제자는 유 가주를 보고 말하고는,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조금의 사심도 없다는 듯 웃었다.
“아니 그렇습니까, 스승님?”
사심이 없을 리가. 나는 유 가주가 거절하길 바라며 그쪽을 바라보았으나, 이게 괜한 기대임은 유 가주가 대답하기도 전에 알고 있었다. 황자가 위치를 알려달라는데 유 가주가 어떻게 안 알려줄까? 예상대로 유 가주는 거절하는 내색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시지요. 스승과 제자는 늘 한 편이지요. 사제 간에 같은 은신처를 알아두면 훨씬 더 쓰임이 좋을 겁니다.”
내 은신처 쓰임을 왜 영감님이 고르세요?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하지만 동감이라는 듯,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욕이 나왔다. 이 마음고생을 하면서 가까스로 은신처를 얻었는데. 받자마자 똥이 되다니. 13황자를 피할 은신처가 필요한데 13황자가 위치를 알게 되었으니, 나는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은신처를 받은 것이었다.
‘허탈해.’
하지만 허탈한 이상으로 큰 문제는, 제자가 오늘 일로 나를 의심할지도 모른단 점이었다.
‘유 가주를 통해 은신처를 구했다간 죄다 13황자 귀로 들어가겠어.’
은신처를 구하면서 유 가주에게 ‘13황자에겐 비밀로 해주세요’ 부탁하기도 좀 그렇잖아. 은신처는 다른 방법으로 찾아보던가 해야겠다.
* * * 다음날. 황자의 수업에 가기 위해 의복을 차려입는데 도무지 손이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다 어제 일의 부작용이다.
“언니! 어제 또 하루종일 선안 공자랑 같이 있었다며!”
이 와중에 린화는 얼마나 시끄럽게 떠들어대는지. 하지만 저 투정에 하나하나 상대해주다간 끝이 없으리란 걸 알기에, 나는 린화의 고함을 무시하고서 옷이나 갈아입었다. 화내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인가. 다행히 린화가 고함을 친 다음부터는 손이 빨라졌다. 쟤가 이런 데 도움이 되네. 아아. 입궐하기 싫어. 아아. 제자 보기 싫다. 하지만 약속 시각은 다 되어 가고 의복도 다 갈아입었다. 나는 푹푹 한숨을 내쉬고서 집을 나섰다. 그러고서 입궐해 제자가 머무는 월무궁으로 들어갔더니, 하필 제자는 방 안에 있지 않고 정원에 서 있기까지 했다. 잡초에 물을 주고 있네. 예전부터 자주 저랬지만 진짜 뭐 하는 행동인지 모르겠어. 그 모습을 너무 대놓고 허탈하게 바라보아서일까. 아니면 제자가 내가 회귀한 지 며칠 만에 이미 신체를 수양한 것일까.
“스승님?”
소리 없이 들어간다고 갔는데. 제자는 내 기척을 바로 알아차리고서 내 쪽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그래도 애써 모른 척 미소를 짓자, 제자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오라는 건가. 싫다 싫어.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마지못해 다가가자, 제자는 자연스럽게 내 옷깃을 눌러 상처를 확인하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연고는?”
“발랐습니다.”
“전혀 흔적이 없는데.”
“어젯밤 발라서 그래요.”
“제가 수시로 바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스승님.”
“그게-.”
“제가 드린 연고라 몸에 닿는 것도 싫으십니까?”
나는 목을 가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죄했다.
“송구합니다.”
그가 싫긴 하지만, 그가 준 연고라서 안 바른 건 아니었다. 어제의 은신처 건으로 정신이 나약해져서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뿐. 하지만 제자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잡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추궁이 끝난 걸까? 안도해도 되나? 은신처 일은…….
“은신처는 왜 찾으십니까? 달아나야 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안 끝났구나. 아니, 추궁은 이제 시작인가 보다. 밤새 걱정한 질문을 그가 던지자 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 났다. 나는 곤란한 마음을 감추려 미소 지었다. 여러 가지 준비한 대답이 있지만 개중 어느 것도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열 집 살림-.”
“거짓말인 거 압니다.”
“!”
“의리도 충절도 없는 스승님이 열 명을 사랑할 수 있을 리가요.”
무슨 소리야. 의리와 충절이 없어야 열 명을 사랑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의리가 있으면 한 명만 사랑했겠지…….
“열셋째. 나와 얘기 좀 하지.”
곤혹스러운 상황은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 덕에 벗어날 수 있었다. 은신처에 관해 대답할 말이 없어 쩔쩔매다가, 나는 이때다 싶어 얼른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나타난 건 7황자였다. 회귀 전, 제자가 비교적 빨리 죽인 이들 중 하나라서 목소리가 낯설게 여겨졌나 보다. 그런데 7황자가 여길 왜 찾아왔지? 본색을 드러내기 전의 13황자는 형제자매들에게 무시 받느라 누군가와 교류하지 않았는데? 특히 가세 높은 외가와 품계 놓은 어머니를 둔 7황자는 13황자를 발가락의 때 정도로 여겨서 절대로 이곳을 찾는 일이 없었다. 의아했지만 나는 얼른 격식에 맞게 인사했다.
“7황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요 대인이로군.”
7황자는 내 쪽에 고개를 까딱하고서 다시 13황자를 보았다. 나도 13황자의 눈치를 살폈다. 13황자는 7황자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을까? 이미 여러 번 회귀했으니 나보단 과거 일을 더 많이 기억할 것 같은데. 하지만 표정 변화가 없어서 속내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무슨 일입니까, 형님?”
일단 목소리는 덤덤한데.
“곧 사냥대회가 있잖아.”
“그렇지요.”
“그때 ‘해성’을 내가 타고 싶은데.”
“싫습니다.”
“싫다고? ……잠깐 하루 빌려주는 것뿐이잖아.”
“싫습니다. 제게는 말이 해성뿐입니다.”
“동생에겐 내 말을 빌려주지. 아주 좋은 말로. 그럼 어때?”
“싫습니다.”
‘해성’이란 말 이름과 말다툼을 듣고서야, 나는 7황자가 회귀 전에도 13황자를 이렇게 찾아온 적이 있단 걸 기억해냈다.
‘그 일이구나.’
해성은 13황자가 가진 하나뿐인 백마인데, 얼마나 애지중지 보살폈는지 털에서 윤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명마였다. 말을 좋아하는 7황자는 그 말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해서, 평소에도 자기 생일 선물로 해성을 달라고 13황자를 자주 볶아댔다. 그러다가 사냥대회를 앞두자, 아예 전략을 바꾸었는지 해성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그게 지금 일어나는 일이지. 하지만 13황자가 아끼는 말을 싫은 7황자에 줄 리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말다툼을 시작했고, 결국 불똥은 나한테 튀었다.
“너무하는군. 형이 말 한 번 타보겠다는데 그것조차 거절하다니. 요 대인, 요 대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금처럼.
“요 대인은 동생의 스승이지. 요 대인 말이라면 들을지도 모르니 나 대신 좀 설득해주게.”
당시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누구를 편들어도 내게는 난감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회귀 전, 결국 나는 7황자를 편들었다. 13황자가 미워서도 7황자를 따라서도 아니었다. 말 한 필 때문에 권세 좋은 7황자와 대립하기엔 13황자는 너무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13황자처럼 앞길이 막막한 황자는 훗날 황위에 오를지도 모를 7황자에게 미움받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결론만 말하자면, 13황자는 내가 설득해도 해성을 빌려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7황자는 두고 보란 으름장을 놓으며 나갔으나, 사냥대회 후 낙마해 다리가 부러진 건 7황자 쪽이었다. 덕택에 7황자는 다리를 치료하느라 해성에 대한 건을 잊어버렸고, 나는 일이 잘 풀려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7황자가 부상을 입은 게 과연 우연한 사고가 맞나, 의심이 든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도, 7황자는 과거처럼 나를 재촉했다.
“요 대인. 왜 말을 안 하나.”
나는 힐긋 제자를 보았다. 제자는 태연히 서 있었다. 내가 누구 편을 들지 알기 때문인지, 내게 일말의 기대감도 없어 보였다. 아예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7황자의 어깨너머 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편들어야 할 쪽은…… 제자다.
“송구하옵니다, 7황자 전하. 13황자님께는 말이 해성 하나뿐이라, 해성을 빌려드리면 탈 말이 없으십니다. 다른 말을 빌려주시겠다고 하시지만 그것도 안 됩니다. 13황자님은 7황자님만큼 승마 솜씨가 좋지 못해서 익숙하지 않은 말은 못 타시거든요.”
제자의 눈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그의 표정에서 ‘너 왜 이래? 너 전생엔 안 이랬잖아?’ 하는 의구심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