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미운 제자 편들려니 쉽지 않네2022.03.10.
자기도 이제 막 회귀했으니, 어디까지 수업받았는지 기억이 안 나서 저러겠지. 나도 비슷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저 빌어먹을 제자가 난감해하자 고소한 마음이 든다. 미소를 감추기 위해 나는 입술을 깨물고 정색했다. 그가 더 곤란해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제자는 곧 태연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그게 어디였지요? 지난번 수업에 머리가 몹시 아프더니.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집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영악한 놈.
“아프셨습니까? 이런. 전 몰랐습니다.”
그래도 넘어가 주고 싶지 않아 슬쩍 말꼬리를 잡자, 제자가 좀 실망한 척 말했다.
“제게 관심이 없으시군요, 스승님.”
여우 같은 자식. 하지만 맞는 말이다. 아마 저번 수업을 할 당시의 나는 제자에게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더 말꼬리를 잡는 대신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띠고서 내 서책을 뒤적거렸다. 보자…… 나나 쟤나 진도 모르긴 마찬가지이니, 그냥 적당히 아무 데서나 골라서 수업하면 되겠지? 어디서 하지? 책을 뒤적거리고 있자니, 마침 딱 적당한 소제목이 보인다.
“스승님?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2장 4항목. 군사부일체 봅시다, 전하.”
* * * 수업하는 내내 나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럴 수밖에. 내 제자는 여러 번 회귀했다. 머릿속엔 온갖 지식이 다 들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전생에 제자는 문무 모두에서 완벽했다. 그런 제자에게, 고작 스물한 살짜리 스승인 내가 대단한 학자인 척 설명하는 상황 아닌가. 제자는 내가 회귀한 걸 모를 테니 온순한 척 굴고 있지만, 나는 이 사실을 알기에 신경 쓰였다. 불편했다. 저 온순한 표정 아래에 날 향한 복수심과 살의를 숨겼단 걸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가 웃을 때마다 자꾸 안 좋은 상상이 들었다. 그는 지금 뭘 생각하고 있을까. 날 속여 먹던 일? 자신의 손으로 날 국사로 만들고 죽인 일?
“스승님. 오늘따라 안색이 안 좋으신데.”
“감기에 걸려서요.”
제자도 같이 회귀한 이상, 난 그에게 복수할 수 없다. 복수가 뭐야? 나 살길 찾기도 바쁘다. 내가 해야 할 건 그에게 복수하는 게 아니라, 저 패륜 제자한테 아주 잘해주는 거였다. 그가 날 또다시 죽이지 않길 바라면서. 내가 회귀한 것도 절대로 들키면 안 돼. 그러면 진심으로 잘해주는 게 아니란 걸 알고서 또 죽이려 들 거 아냐?
“전하.”
“네, 스승님.”
“목소리가 참 좋네요.”
“……예?”
음. 그래도 뜬금없는 칭찬은 좀 아닌가. 하긴.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그것도 수상할 거야. 적당히 이전 삶처럼 대하되, 은근하게 잘해줘야겠다.
‘그러다 기회를 잡아서 대놓고 친한 척해야지.’
그런데 막 그 결심을 하자마자, 제자가 섬뜩한 말을 던졌다.
“오늘따라 좀 다르시네요, 스승님.”
평범하다면 평범한 말이었으나, 내게는 심장을 쥐어박는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나는 책장을 넘기다 말고서 힐긋 시선을 들었다. 제자가 책상에 턱을 괴고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어디가 다르단 거지? 아까 갑자기 칭찬한 거? 딱 한 번인데? 그럼? 그럼 뭐가 다르단 거지? 내가 전생에서 어떻게 수업했더라? 그냥…… 무난하게 했던 것 같다. 그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대놓고 냉대할 배포는 아니었는걸. 그럼 대체 어디가 다르단 거지? 간이 쥐여 짜이는 느낌이다. 그가 내 입술에 독을 가져다 대는 감각이 떠오르면서 다시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책상 아래로 내리고서 멀뚱멀뚱한 척 제자를 바라보았다. 제자는 여전히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호흡.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일부러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하다는 투로 말했다.
“신이 미흡하여 마음에 안 차시는 건 알겠으나 전하. 어쨌든 신은 전하의 스승이고, 전하는 신의 제자이십니다. 수업 도중엔 수업에 열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차갑게 꾸짖고 나서, 나는 정색을 유지한 채 제자의 표정을 샅샅이 훑었다. 그가 불쾌해할까? 속으로 ‘아, 역시 저 스승은 나중에 또 죽여야겠어’ 이렇게 생각하려나? 콩닥거리는 심정으로 그와 시선을 맞추기를 또다시 몇 호흡. 밖에서 신시말을 알리는 나무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제자는 날 빤히 보던 걸 멈추고서 빙그레 웃으며 책을 덮었다.
“수업이 끝났군요.”
바짝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물 먹은 해초처럼 펼쳐졌다. 나도 표정을 감추고서 책을 덮었다.
“다음 수업 시간은 이렇게 허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전생의 내가 할 법한 말도 덧붙였다.
‘빨리 집에 가자. 마주하고 있기가 생각보다 무서워.’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이 제자가 왜 이러지? 미쳤나? 뜻밖에도 제자가 따라 일어났다.
“같이 나가지요, 스승님. 제자도 잠시 산책하고 싶으니 문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반사적으로 ‘싫어!’라고 외칠 뻔했다. 나는 짐보따리를 들고서 제자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네가 왜 날 문까지 바래다줘? 머릿속이 다시 열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전 삶에서 제자가 나를 문까지 바래다준 일이 있었나? 아아. 그래. 몇 번 있긴 한 것 같다. 많지는 않지만. 지난 삶에서, 나는 제자가 그렇게 나올 때마다 그가 내게 애정을 갈구하는 거라 여겼다. 다른 평범한 스승과 제자들이 주고받는 신뢰 가득한 그런 애정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당시 내가 가르친 제자는 이미 여러 번 회귀한 능구렁이였으니까. 그는 왜 나를 가끔 바래다주던 걸까?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미 그를 여러 번 죽였다는 나를? 그것도 그렇고. 생각해보니 진짜 이상하네. 제자는 여러 번 회귀했다면서, 왜 매번 나한테 죽은 거야? 한 번만 회귀했어도 알아서 날 경계하고 곁에 안 둘 수 있었지 않나? 복수하려고 곁에 두다가 매번 역습당했나?
“나가지요.”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고서. 제자는 태연하게 권했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서 제자와 밖으로 나갔다. 날씨는 사람 마음과 전혀 다르게 좋구나. 그런데 제자와 나란히 마당을 걸어갈 때였다. 정문으로 나가려는데, 궁녀인 기양이 내게로 다가와 불렀다.
“저…… 요 대인.”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자, 그녀가 노란색 종이로 싼 무언가를 내밀며 말했다.
“이걸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인가?”
하지만 13황자가 신경 쓰여서 받지 못하고 묻자, 기양은 귀까지 붉어져서 말했다.
“지난번에 소녀를 도와주셨잖아요. 너무 감사한데 따로 보답할 길이 없어서요. 약소하지만 제가 직접 밤과자를 만들었습니다.”
내가 기양을 도와준 적이 있다고? 그런 일이 있나?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거절하면 이상하게 보일 거다. 나는 지난 삶에서 바람둥이로 행세했고, 덕택에 여인들에게 선물 받는 일이 많았으니까. 나와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고 싶어하는 여인은 드물었으나, 편한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여인은 많았다.
“고맙소, 소저.”
나는 13황자의 눈치를 보면서 과자 묶음을 받아들었다. 그러고서 돌아서려다 보니, 이건 너무 점잖게 여겨졌다. 이전 삶의 나라면 호색한 평판을 받기 위해 이쯤에서 헛소리를 좀 했을 거다. 그렇다면 이번 삶에서도 헛소리를 해야 한다. 내가 이전 모습과 너무 다르게 굴면, 제자가 내 회귀를 눈치챌 테니.
“기 소저는 정말 배려심이 좋다니까. 난 기 소저가 이렇게 매력적일 때마다 반해서 마음이 다 아플 지경이오. 아시오?”
반쯤 장난으로 여기는 듯 기양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면 됐겠지, 하면서도 나는 헛소리를 몇 개 더 지껄였다. 그런데 거기에 기양도 웃으면서 무어라 대꾸해주려 할 때였다. 한발 앞서 옆에서 웃음보 터지는 소리가 났다. ‘풉’ 하고 갑자기 웃음이 튀어나오는 그 소리 말이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옆을 보자, 제자가 재밌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 반응이 좀 이상한 데다 은근히 기분이 나빠서, 그에게 잘 보여야 한단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묻고 말았다. 기양 역시 내 말에 화답하려던 걸 그만두고 13황자를 쳐다보았다.
“아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묘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스승님은 다 좋으신데 너무 호색하시구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말을 좀 가볍게 하시네요.”
* * * 무슨 뜻이었지? 회귀 전. 나는 남장을 감추려 일부러 바람둥이처럼 가볍고 방정맞게 굴었다. 덕택에 남장은 들키지 않았지만, 여자 문제에 관해선 평판이 좋지 않았지. 하지만 남들이 내게 뭐라고 하건, 제자는 내 사적인 평판을 가지고 시비 건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런데 왜 이번에는 ‘말을 좀 가볍게 하시네요’라고 대놓고 지적했을까? 그의 궁녀에게 친근하게 대해서……는 아닐 거다. 난 원래도 그의 궁녀들에게 사근사근하게 대했는걸. 그럼 그냥 내가 짜증 나서? 내가 웃는 모습만 봐도 속이 부글부글 끓을 정도로 내가 싫은가? 아주 높은 확률로 그럴듯하다. 나도 그놈이 웃는 것만 봐도 속이 끓으니까. 그놈은 좀 더 많이 끓겠지. 젠장. 기껏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왜 혼자 있으면서도 빌어먹을 제자님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지? 전생에선 가문 일을 최우선으로 두었고, 제자에 대한 건 정말 최소한도로만 생각하고 지냈는데. 그를 두려워하게 된 지금, 오히려 머릿속이 그에 대한 일로 가득하다니. 말도 안 된다. 내 제자 역시 그랬을까? 계속 내가 자기를 죽인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그랬기에 그 수많은 정적들을 처리하면서도 나는 끝까지 남겨둔 걸까? 막판에 즐겁게 죽이려고? 문득 나도 제자처럼 이번 삶을 내 뜻대로 바꿔보며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빌어먹을 제자님 덕분에 지난 삶에서 나는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제자가 날 죽이지 않았더라면, 연륜이 쌓인 뒤에는 태사 자리에도 순조롭게 올랐겠지. 내가 아무리 과거를 바꿔댄다 한들, 반역하지 않는 한 그 이상 올라가긴 불가능한데. 황족인 제자와 달리, 나는 반역할 만큼의 힘은 없었다. 미래를 아는 게 나뿐만도 아니고. 아니지. 미래를 알아도 무슨 소용일까? 회귀한 걸 감추려면 나는 미래에 예정된 나쁜 일들을 피해서도 안 된다. 내가 미래를 유리하게 바꾸면 제자는 내가 회귀했단 걸 알아차릴 테니까. 그럼 이번엔 일찍 죽이려 들겠지. 기껏 회귀했으나 슬프게도 내가 이번 삶에서 할 수 있는 건, 제자에게 잘 대해주어 그의 원한을 누르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제자의 원한이 다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니, 도주할 준비도 해 두어야지. 적당히 제자의 눈치를 보며 잘해주다가, 그가 황제 자리에 오를 것 같으면 눈치껏 사직하고 도주해 숨어 지낼 거다.
‘맞아. 미리 은신처를 열 군데 정도 구해놔야겠어.’
학당 친구 중에 그런 쪽으로 정보가 빼곡한 이들이 몇 있었지.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