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517화〉
투성에 유인하여, 빛의 장막에 성지한을 가둔다.
적색의 관리자의 계획은 심플했지만, 그만큼 효과적이었다.
애초에 ‘빛의 장막’은 백색의 관리자가 펼친 권능이었으니.
이걸 임시 관리자 따위가 뚫을 순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성지한도 장막을 보자마자 이건 넘을 수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장막을 넘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적색의 관리자는 더더욱 현재의 상황을 바로 인정하지 못했다.
상시 관리자의 권능을, 성지한 따위가 뚫어 내다니.
이건, 그의 상식선에선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지한은 그런 적색의 의문을 풀어 주는 대신.
철컥.
도로에 박힌 검을, 가볍게 뽑아내었다.
무극멸신武極滅神
삼재무극三才武極
태산압정泰山押頂
그러자.
치이이익……!
한 번 갈라졌던 적색의 관리자의 몸뚱어리가.
또다시 반으로 쪼개졌다.
가볍게 뻗은 일검.
하나 그것은, 땅에서 시작하여 히늘까지.
푸른 빛줄기를 일직선으로 그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는, 안 되는군.]
번뜩!
반으로 쪼개진 얼굴에서.
적색의 관리자의 눈이 각기 다르게 번뜩였다.
전투에 서툴다고 스스로가 자평했던 적색의 관리자는.
이 일검만으로, 자신과 성지한의 차이를 빠르게 파악해 내었다.
빛의 장막을 베고 온 것만으로도, 격차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맞아 보니 확실히 알겠다.
‘청색의 관리자와 전투는 필패.’
적은 청에 관하여, 무에 있어서는 열세임을 인정했다.
이러면, 전투 말고 다른 대처방법을 찾아봐야 했는데.
청색의 관리자는 그럴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치이익……!
암검의 테두리에 푸른빛이 일렁이자.
붉은 거인의 몸뚱어리가, 금방 수백 수천 갈래로 갈라졌다.
“저항을 하지 않는군.”
성지한의 말에.
화르르륵……. 갈라졌던 거인의 몸에서 불길이 피어오르더니, 그가 다시 몸을 재생했다.
[애초에 전투는 나의 분야가 아니어서 말이지.]
“근데 그런 거치곤, 끈질기게 재생을 하는데.”
[그릇 완성이 코앞에 있는데, 포기하기는 이르지 않는가.]
“그릇이라…… 붉게 물든 소드 펠리스를 말하는 건가.”
성지한은 적색의 관리자가 만지던 빌딩을 힐끗 바라보았다.
건물은 색만 붉게 변한 게 아니라, 외부에서 막대한 힘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적색의 관리자가 방금 전 재생할 때, 저 힘의 일부가 쓰이기도 했다.
“저게 널 살리고 있군.”
[그래. 1억 2천만의 지원이 계속되는 한, 나는 계속 살아날 것이다.]
“1억 2천만?”
[나를 따르기로 한 인간의 숫자지. 네가 돌아왔음에도, 아직 늘어나는구나.]
투성에 갇혀 있는 동안, 저놈 또 뭔 짓을 했나 보네 .
성지한은 적색의 관리자를 유심히 지켜 보았다.
‘불씨가 남아 있으면, 그걸 기반으로 살아남는다.’
상대의 신체를 수천 조각 잘라 내도.
이게 단번에 소멸되지 않는 한, 적색의 관리자는 소드 펠리스를 통해 다시 몸을 재생했다.
상대를 없앨 거면, 단번에.
재생할 틈도 주지 않아야 했다.
‘그렇다면.’
성지한은 검을 땅에 꽂았다.
그러자 한순간, 완연히 푸른빛을 띠는 암검.
바닥에 태극의 문양이 잠시 일렁이자.
그는 다시 검을 뽑아, 하늘을 베었다.
무극멸신武極滅神
태극마검太極魔劍
검흔劍療
대지부터 하늘까지, 일직선으로 뻗어가는 청색의 빛줄기.
이것은 방금 전, 태산압정을 사용했을 때와 얼핏 보기엔 똑같았다.
[또 그 검인가. 아무리 날 베어 보았자, 소용없다…….]
적색의 관리자는 반으로 쪼개진 와중에도, 태연히 말을 이어 나갔지만.
그를 잘라 낸 검의 흔적.
푸른 선은 사라지질 않았다.
오히려.
[으음? 이건……!]
검광이 번뜩이자.
적색의 관리자의 육신이 일제히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검의 흔적이 빨아들이는 건, 적색의 불씨와 건물을 잠식했던 붉은빛.
[동방삭의 그 ‘검’인가. 이걸, 네가 쓰다니…….]
“그저 흉내 낸 정도에 불과하지.”
[허, 일이 거의 다 성사되었거늘…….]
원래의 색을 되찾은 빌딩과.
재생하기도 전에 검흔에 빨려 들어가는 몸을 보며, 적색의 관리자는 허탈한 음성을 발했다.
[이렇게 죽다니, 허무하구나. 명계 구축은, 불가능한 꿈이었나…….]
적색의 관리자가 검흔에 빨려 가는 와중에, 그렇게 유언을 내뱉자.
이를 듣던 성지한이 피식 웃었다.
“잔꾀는. 어딜 죽은 척하냐?”
[……알아챘나.]
“배틀넷 초대장에 있는 거점은 그대로잖아. 그걸 부술 때 유언 내뱉어라.”
[거기까지 을 셈이냐? 참으로 집요하구나.]
“집요? 그건 너한테 해당되는 단어지.”
[후후…….]
파아아앗……!
그 웃음을 마지막으로, 검흔에 적색의 흔적이 모두 빨려 들어가자.
성지한은 가볍게 점프를 해, 펜트하우스 창가 안으로 들어섰다.
“삼촌……!”
[지한아, 몸은 어때. 괜찮아?]
성지한이 창가에 도착하자, 걱정스런 기색으로 이곳에 다가오는 가족들.
그는 그들을 보곤 살짝 웃었다.
“다들 다행히 몸은 괜찮네.”
그러면서 그는, 윤세아 옆에서 둥둥 떠 있는 메신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야, 흑색의 관리자는 뭐 하고 있냐? 백색이 대놓고 적이랑 협력해서 나 가두는데, 구경만 하고 있어?”
[바로 보고는 드렸습니다만, 배틀넷의 통신망은 백색의 관할이라 지금까지 막혀 있었습니다. 다만 지금은, 다시 개통이 되어 보고가 들어갔습니다.]
“통신이 지금은 열렸다고?”
[예…… 그러면서, 이번 사태는 ‘일부의 일탈’이라고 해명하셨습니다.]
일부의 일탈이라니.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드란 놈 내세웠던 게, 이런 때 희생양으로 써먹기 위해서였나.
“그 ‘일부’가 빛의 장막까지 동원할 수 있냐?”
[그래서 빛의 장막이 온전치 못해서, 쉼게 뚫린 거라고…….]
“상시 관리자란 놈이 추하긴. 그래도 그렇게 나오는 걸 보면, 적색의 관리자 죽이는 데엔 개입 안 하겠다?”
[예. 그것은 확답받았습니다.]
백색의 관리자가 이런 상황에서도 나 아니라고 오리발 내미는 게, 황당하긴 했지만.
사실 각개격파하기엔 오히려 좋았다.
‘일단은 한 놈부터 확실히 없애고 보자.’
성지한은 그렇게 적색의 관리자부터 뿌리를 뽑아야겠다고 마음먹곤.
윤세아를 바라보았다.
“적색의 관리자 소멸시키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모자 쓰고 있어.”
“삼촌, 지금 바로 가게?”
“어. 저놈 시간 주면 또 뭘 할지 모르니까.”
전투 빼고는 다 잘한다는 적색의 관리자.
그에게 시간을 허용했다간, 또 뭔 짓거리를 할지 모른다.
지금 당장 부리를 뽑아 버려야지.
“……금방 올 거지?”
윤세아가 조심스레 묻자.
성지한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 * *
빛으로 가득한 공간.
거기서,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적색의 관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대한 후원자시여.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왜 쓸데없이 거기서 투성을 비추었지? 그 덕에, 빛의 장막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게 나타난 이상, 더 이상의 개입은 불가능해.]
[그게 뚫릴 줄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청색의 관리자는 임시에 불과하고. 빛의 장막은 상시 관리자의 강력한 권능 아니었습니까.]
[어쨌든, ‘이드’는 더 이상 나설 수 없다.]
적색의 관리자는 그 말을 듣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드’말고, 직접 개입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건…… 안 된다.]
[흑색의 관리자 때문입니까?]
[아직은 백과 흑이 우열을 겨룰 때가 아니다.]
위대한 후원자께서 겁을 먹었군.
적색의 관리자는 백색의 반응을 보고는, 단번에 그의 본심을 파악했다.
[결국 직접적인 지원이 불가능하단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좋습니다. 그러면, 헤븐넷의 소유권이라도 넘겨주십시오.]
[그건…….]
명계를 통해, 배틀넷을 대체하는 플랫폼으로 이름 지은 ‘헤븐넷’.
아직 이게 결과물로 나온 건 없었지만.
백색의 관리자는 뭐가 아까운 건지, 이 요구에 답을 주저했다.
결국.
[이 일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도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살아남으면, 소유권을 다시 드리지요.]
[그렇다면, 알겠다.]
적색의 관리자가 소유권을 다시 이전해 주겠단 이야기까지 하자.
번뜩……!
그제야 권리를 넘겨주었다.
붉은 거인의 이마에, 새하얀 빛이 새겨지자.
그는 만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써먹을 수단은 얻어 냈군.’
백색에게서 소유권을 얻었다 한들, 청색의 관리자에겐 이길 수 없었다.
투성에 갔다 온 그는 이미 괴물이 되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꼭 전투로 이길 필요는 없지…….'
그럼에도.
적색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무신이 된 청색의 관리자에게, 저항할.
* * *
미국 워싱턴.
배틀넷의 초대장이 위치한 장소는.
이미 거대한 불꽃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아무리 진화하려고 해도, 꺼지지 않는 불.
이를 일으킨 존재가 적색의 관리자임이 알려진 이후엔.
백악관을 포함하여, 워싱턴 시민 대다수가 피난을 가서 도시는 텅텅 빈 상태였다.
그렇게 이 불길의 중심부, 비석이 있는 장소에.
파앗……!
암검이 꽂히고, 성지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도 난리군.”
성지한은 가볍게 검을 뽑곤.
휙!
검을 허공에 몇 차례 베었다.
그러자.
스으으으…….
도시를 뒤덮었던 화마가, 급격하게 진화되기 시작했다.
이곳의 불꽃은 검흔까지 쓰지 않아도 사라질 정도로 약해서.
'지금까진 별거 없네.’
성지한은 검을 열 번 휘둘러, 워싱턴에 번진 불길 대부분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가볍게 진화를 끝내고 나자, 눈에 띄는 건.
붉게 변한 기념비, 배틀넷의 초대장과.
그 위에 커다랗게 떠 있는 붉은 포탈뿐이었다.
‘저 포탈…… 아까 그릇 역할을 하던 소드 펠리스같네.’
사람 수백 명은 한 번에 들어갈 것 같은, 커다란 포탈.
저 안을 향해, 사방에서 불특정한 기운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거, 아까 1억 2천만 운운하던 거랑 흡사한 힘 같은데.
성지한이 그렇게 초대장과 포탈을 살피고 있을 때.
[참 빨리 왔구나.]
붉은 포탈 안에서, 적색의 관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꽤 여유를 찾았군.”
[손님 맞이할 준비를 급히 끝났으니까.]
그러면서.
스으윽…….
붉은 포탈 안에서, 적색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러니 얼른 들어오는 게 어떻겠나?]
“굳이 갈 필요 있냐?”
적색의 관리자가 뭘 해 놨을지 모르는 수상쩍은 포탈.
저 안으로 들어설 필요야 없지.
“아까처럼 베면 되지.”
성지한은 검을 바닥에 꽂았다.
태극의 문양이, 잠시 대지에 새겨지고.
푸르른 검광이 피어오르자.
포탈 안에서 적색의 관리자가 웃음소리를 내었다.
[후후…… 포탈 전체를 베려 하다니. 너답구나. 한데, 1억 2천만도 같이 죽일 셈인가?]
“1억 2천만?”
[정확히는, 1억 2514만이군. 나에게 종속되기로 한 인류의 숫자가.]
성지한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놈 참.
혼자 죽지, 물귀신처럼 애들 다 끌고 가네.
‘기운의 흐름을 보니, 저게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적색의 관리자를 선택한 인류.
이들을 살리기 위해, 포탈에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가.
‘……그럴 순 없지.’
그러다 일이 잘못되면.
1억을 살리려다가 인류 전체가 적색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꼴이 되겠지.
그렇다고.
그냥 베어 버리기에는, 확실히 1억이라는 숫자가 많긴 많았다.
‘다른 해결 방법은 없을까.’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긴 성지한의 시선이.
포탈에서 서서히 아래 쪽으로 내려왔다.
그가 주시한 건, 배틀넷의 초대장.
인류를 배틀넷에서 탈퇴시켜서 이 난리를 일으킨 원홍이 었다.
‘……좋아.’
시도는 한번 해 봐야겠군.
스스스스…….
성지한의 등 뒤로, 황금의 수레바퀴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