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509화>
“이 이상은, 계약을 해야 이야기할 건가?”
“그래. 이건 내 밑천이다…… 날 살려 준다는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면, 절대로 더 이상은 입을 열 수 없다. 성지훈.”
“흠.”
성지한은 고민하는 척하며, 손으로 씰룩거리는 입가를 가렸다.
성지훈이라.
관리자 권한으로 이름 바꾸니까, 실시간으로 패치가 되네.
“그럼 계약서에 확실히 써 둬라. 바벨탑의 운용을 돕고, 천수강신의 비밀을 확실히 밝히겠다고.”
“좋다. 너도 성지훈의 이름, 확실히 써라. 이번에는, 절대 저번처럼 당하지 않겠다.”
“배틀넷 이름까지 다 쓰라며? 이걸 어떻게 숨기겠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상태창의 이름까지 공개해라.”
자식.
그래도 저번에 당한 게 컸는지, 좀 조심은 하는군.
“자, 봐라.”
성지한은 기꺼이 상태창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거기엔.
[이름 : 성지훈]
수정된 이름이 맨 위에 올라와 있었다.
“……맞군.”
“이제 믿을 수 있겠지?”
“그래, 넌 엔키두보다는 진실하군.”
“아, 맞다. 하나 더 추가해라. 이 근처에선 활동하지 않겠다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이 동아시아랑 가장 떨어진 지역에 가서, 이쪽 방향은 쳐다도 안 볼 거다.”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아 말하는 길가메시.
성지한은 피식 웃고는, 손바닥을 펼쳤다.
“그 항목 추가해서, 계약서 꺼내 봐.”
“알았다.”
성지한의 말에, 인벤토리에서 얼른 계약서를 꺼내는 길가메시.
이때만을 기다렸는지, 그의 행동은 민첩하기 짝이 없었다.
[성좌급 존재 간 거래에 관한 계약서]
배틀넷 공식 마크가 딱 찍혀 있는 계약서를 꺼낸 길가메시는.
“자…… 이 문구, 추가했다.”
성지한이 요청한 문구들을 넣어 두곤, 그에게 넘겼다.
그는 이를 스윽 훑어보았다.
계약서의 문구는 자동으로 모국어인 한국어로 번역되었는데.
1. 갑은 어떤 경우에도, 을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한다.
어떤 경우에도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라니.
1번부터 문구가 영 거슬렸다.
이거, 재수 없으면 성지한이 길가메시를 지켜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원래라면 이런 문구 하나하나 따지고 수정을 해야겠지만. 어차피 이름 뒤바꿀 거니까.’
성지한은 이외에도 함정을 여럿 발견했지만, 어차피 성지훈에서 이름을 롤백하면 끝날 문제라 무시했다.
대신.
“흠…… 태극마검이 꺼지려 하는군. 알겠다. 빨리 사인하지. 갑에 날 쓰면 되겠지?”
너무 대충 본 거 같아.
이에 대한 핑계로, 태극마검을 거론했다.
“오…… 좋다! 그럼 바로 하자!”
그러자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도는 길가메시.
그는 성지한이 갑 자리에 성지훈 이름을 써넣자, 더욱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 둘 다 이름을 다 쓰자.
지이이잉……!
[‘성지훈’과 ‘길가메시’ 간에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시스템에, 계약 체결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후후…… 정말 사인했구나.”
사인을 하자마자 바로 태도가 거만해진 길가메시.
이제 안 죽을 거라 판단되니, 원래 자세가 나왔다.
“그럼 너부터, 내 궁금증을 풀어 줘 봐.”
성지한의 물음에, 길가메시는 턱을 치켜들었다.
“네 천수강신과 내 천수강신이 다른 것 말인가? 너와 나의 격이 달라서 그런 거지.”
“네 팔다리랑 생식기 잘라도 생명과 안전은 보장되는 거 알지? 장난칠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해라.”
“크, 크흠…… 알았다.”
성지한의 서늘한 기세에, 허세를 버리고 원래 자세로 돌아온 길가메시는.
“나도 사실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내 기프트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
“기프트?”
갑자기 자신의 기프트를 거론했다.
“그래. 내 기프트는…… 적색의 대기거든.”
* * *
“……적색의 대기라고?”
적색의 대기라니.
이거.
‘공허의 대기랑…… 너무 흡사한데?’
윤세아가 대기만성을 극한으로 키워서, 업그레이드했던.
공허의 대기와 앞에 수식어만 달라진 것 아닌가.
“너도 대기만성 기프트의 소유자였나?”
“하, 대기만성이라니. 나는 태어날 때부터 커다란 그릇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네가 활동할 시절엔, 배틀넷 참가한 것도 아니었잖아?”
“그건 그렇지. 그냥 나중에 성좌 되고 기프트란을 보니 적색의 대기라고 되어 있더군.”
적색의 대기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기프트였지만.
‘이놈, 무조건 죽여야겠어.’
성지한은 더더욱, 길가메시를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색의 그릇이라니.
이거 진짜, 살려 두면 언제 적색의 관리자가 튀어나와서 이놈을 이용할지 몰랐으니까.
‘바벨탑을 통해 이동하는 것도, 포기하는 게 낫겠군.’
적색의 대기가 만드는 바벨탑으로 이동하는 건, 뭔가 찝찝하단 말이지.
역시 검증된 동방삭을 믿는 게 낫다.
대신.
‘바벨탑을 세우는 것 자체는, 무신의 주의를 끌 수 있겠어…….’
성지한은 투성에서의 전투를 한번 예측해 보았다.
바벨탑과, 검의 착지.
두 방법으로 이동하는 것 중, 어떤 게 효율적인가는 답이 나왔지만.
바벨탑을 세우는 것은 무신에게도 나름 주의가 끌릴 것 같았다.
‘은하검흔을 쓸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어쩌면, 무신의 주의를 완전히 끌어서 그의 힘을 모아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두 이동 방법으로 은밀하게 가는 걸 포기하고.
아예 대놓고 무신이 대비하게 만들어서, 거기에 은하검흔을 써 버리는 게.
어쩌면 가장 그에게 크게 타격을 입히는 방법이 아닐까.
성지한은, 투성에서의 전투를 윤곽부터 그려 나갔다.
그가 그렇게 잠시, 말없이 서 있자.
“……천수강신의 효과 원인이 기프트 때문인 것 때문에, 설마 날 죽이는 건 아니겠지?”
길가메시는 그의 침묵을 착각하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린 계약서를 이미 체결했으니…… 너도 날 죽일 순 없을 거다. 안 그런가?”
적색의 세계수에 접할 수 있는, 천수강신의 비법이라고 해 봤자.
길가메시가 파악한 건 자신의 기프트가 전부였으니.
이건 성지한에게 적용되는 운용법이 아니었기에, 그가 걱정할 만했다.
“이걸 이유로 널 죽이거나 하진 않을 거다.”
“자, 잘 생각했다.”
“대신 바벨탑 만드는 거나 한번 봐 보지.”
“그러려면 힘이 좀 필요한데…… 제공하겠는가?”
그러면서 성지한을 바라보고 씩 웃는 길가메시.
안 죽이겠다고 하니까, 또 금방 기가 살아 있었다.
“그거로 직접 이동하진 않을 거다. 무신이 경계할 정도면, 충분해.”
“그래도 생명의 기운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저 먼 곳에 탑을 세우는 일이라.”
“계약서에 생명의 기운 제공하겠단 이야긴 없었는데. 계약 파기할까?”
“어, 어허. 거참. 사람이 왜 이리 각박하나? 알겠네, 알겠어. 내 최대한 있는 힘 없는 힘 다 짜내 보지…….”
성지한이 계약 파기를 언급하자, 쏙 들어간 힘 요구.
그는 투덜거리면서, 바벨탑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지원 없이는, 내 몸 대부분이 사라질 거다…… 팔과 다리는 물론이고, 몸통도 대부분 사그라들 테지.”
“그래서 뭐?”
“네가 힘을 지원해 준다면, 나도 희생 없이 황금의 탑, 아니 바벨탑을 만들 수 있을 텐데…….”
“그건 네 사정이고. 어차피 머리만 남아도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아날 거잖아.”
“크흠……! 넌 날 너무 잘 알아서 탈이군.”
성지한의 지적에, 미간을 찌푸린 길가메시.
“그럼, 저 봉인진의 힘을 조금 쓰겠다.”
“왜?”
“저 열려 있는 공간을 통해 권능을 투사하지 않으면, 바벨탑 건설은 거의 불가능하니까.”
“그래. 허튼짓은 하지 말고.”
“네놈이 저리로 떠나줘야 나도 여기서 안심하고 정착할 텐데, 미쳤다고 허튼짓을 하겠느냐?”
길가메시는 진심을 담아 성지한이 떠나길 소망하며.
봉인진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번쩍……!
그리고 그의 몸에서, 황금의 빛이 새어 나온다 싶더니.
두두두둑……!
화면 속, 투성의 대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희한하긴 하네.’
지금 길가메시가 지닌 힘은, 전성기의 10%도 채 되지 않는 상태인데.
저 멀리 있는 투성에 바벨탑을 이렇게 쉽게 건설할 수 있나.
물론 봉인진을 통해 만들었다지만, 그래도 신기하군.
성지한은 이를 지켜보다 길가메시에게 물었다.
“근데 저건 원래 무슨 용도냐?”
“많은 쓰임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아랫것들을 제어하기 위한 장치다.”
“선릉에 소환되었을 때, 사람들이 정신지배 당한 것처럼?”
“비슷하지. 원활한 통치를 위해선 꽤 효용이 있는 물건이다. 네 영역에도 설치해 줄까?”
“내가 왜.”
“아무리 관리자라고 해도, 인간들을 완벽히 지배하려면 이런 게 필요할 거다.”
성지한이 인류를 지배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길가메시.
“됐다, 귀찮게 뭘 지배하냐.”
성지한은 그리 말하곤, 화면을 바라보았다.
바벨탑이 생성되기 시작하자, 성좌의 무구가 그리로 이동하는 게 눈에 띄었다.
검의 착지 지점과, 바벨탑.
무신은 두 구역을, 모두 대비하고 있었다.
“성지훈, 이대로라면 무신이 완벽히 저 지역에 함정을 파 둘 것이다. 그러느니 나에게 생명력 일부를 제공하고, 빠르게 이동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걸 보고, 길가메시는 다시 생명력을 달라고 보챘다.
정말 틈만 나면 힘을 요구하네.
성지한은 길가메시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무신이 대비하는 걸 지켜보았다.
바벨탑과 검의 착지 지역.
두 장소가 그리 멀지 않아서 그런지, 여기에 무신이 모아둔 성좌의 무구가 상당히 많았다.
이 정도면 은하검흔으로 한 번에 타격을 입히기 괜찮겠는데.
‘이제 슬슬 가야겠군.’
성지한은 무신의 전력이 모인 걸 보고, 이제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그 전에.
길가메시를 처리해야겠지.
성지한은 관리자 권한, ‘이름 변경’을 해제한 후 입을 열었다.
“길가메시, 내 이름이 뭐라고?”
“네 이름? 성지…….”
성지까지는 자연스럽게 나오던 길가메시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훈…… 이 아니라, 한? 서, 성지한? 잠. 잠깐!”
그러더니 그는 계약서를 꺼냈다.
“뭐, 뭐야. 성지훈…… 이라고 써져 있잖아……! 너, 대체 무슨 짓을……!”
“네가 힌트를 줬잖아. 이름 바꿔치기에 당했다고.”
“그, 그래서 배틀넷 상태창으로 확인까지 했는데……!”
“내가 관리자라서 말이지. 잠깐 수정은 가능하더라.”
스스스…….
그 말과 함께, 성지한의 왼손에 들리는 봉황기.
길가메시는 그걸 보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 이건 아니지 않느냐……! 내가 이번엔 너에게 다 협조했건만. 사, 살려만 다오. 머리통만 남겨도 괜찮으니까! 네 영역엔 얼씬도 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나도 사실 조금 고민했는데, 네 기프트가 문제라서 말이지.”
“내, 내 기프트…… 적색의 대기가 왜?”
“적색의 관리자가 그걸 어떻게 이용할지 모르거든.”
그 말을 끝으로.
푹!
봉황기가 길가메시의 가슴을 꿰뚫었다.
“네…… 놈…….”
“그만 살고 이제 좀 쉬어라. 길가메시.”
“이럴…… 수는…….”
화르르륵……!
길가메시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몸에 불길이 치솟았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혼재된, 청홍의 불길.
봉황기에서 피어오른 힘은, 대번에 길가메시의 육신을 가루로 만들었다.
‘이젠 완전히 죽었겠지.’
작은 신체 조각만 남아도 재생할 수 있는 놈이니.
성지한은 길가메시가 죽은 자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없군. 확실히.’
그리고 그의 흔적이 남아나지 않은 걸 본 그는.
길가메시의 소멸을 확정 짓고는, 봉인진에 비친 투성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지가 흔들리며 솟아오르던 바벨탑은.
길가메시의 소멸과 더불어, 금방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가자.’
성지한은 태극마검을 봉인진에 꽂았다.
그가 착지하려는 위치는, 바벨탑과 정면으로 마주 보는 거리.
가장 무신의 함정이 많이 깔린 것으로 보이는 지역이었다.
그가 그렇게 자리를 확정하자.
번쩍……!
태극마검에서 빛이 났다.
그러자.
무극멸신武極滅神
신검합일身劍合一
심즉검행心卽劍行
성지한의 육신이, 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검은 스스로 움직이더니.
찌이익……!
봉인진의 안.
지정된 착지 지점을 그대로 꿰뚫었다.
* * *
무신의 별 투성.
갑작스레 떠오른 바벨탑과.
위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세에, 무신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즈음.
치이이익……!
빛의 검 한 자루가 공간을 찢더니, 대지에 그대로 꽂혔다.
[……왔는가.]
그걸 보고 무신이 음성을 발하자.
“그래.”
스으으윽…….
태극마검의 옆으로.
성지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을 내자, 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