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벨로 회귀한 무신 480화>
야밤의 인천 해안가.
인기척이 드문 자리에 선 길가메시는, 바다 너머를 보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래. 역시 세계수는 바다 안에 있었는가.”
[맞아. 근데 여기선 거리가 꽤 돼. 갈 수 있겠어?]
“내 아무리 약해졌다지만…… 바다를 건너는 것 정도는 문제없다. 그것보다.”
길가메시는 자신의 손등을 보았다.
말라비틀어진 채, 주름진 손.
이는 노화가 더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더 늙기 전에, 세계수에게서 생명력을 얻어야 한다.”
[그래.]
“대답이 시원찮군. 너도 생명의 기운을 얻어야, 그 눈알 형태에서 해방될 텐데?”
[딱히 네가 줄 거 같진 않으니까. 이용하다 버릴 생각 아니었어?]
“허허. 내 어찌 첫째 부인에게 그리 박하게 대하겠나.”
길가메시는 입꼬리를 올리며, 신안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에 성심성의껏 협조하면, 생명력을 나눠 주도록 하지. 인류의 왕으로서, 확실히 약속하겠다.”
[도와주기만 하면 그냥 살려 준다고?]
“후후. 작은 금제는 가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 큰 제약은 아니니, 걱정 말거라.”
작은 금제를 거론하며, 미소가 짙어지는 길가메시.
[……그래. 가자.]
그렇게 길가메시는 신안이 안내하는 빛을 따라, 바다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힘이 줄었다 할지라도, 8레벨 성좌까지 도달했던 힘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는 금방 목표한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바다 밑바닥까지 가야 한다.]
“그래. 이젠 나도 알겠군…….”
바다 밑을 바라보는 길가메시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이제 봉인된 세계수에서 생명력을 흡수하면, 이 노화를 멈출 수 있겠지.
그는 바다 안으로, 재빨리 들어가, 세계수가 봉인된 장소에 도달했다.
그렇게 해저에 발을 디딘 그는.
‘이게 봉인진인가.’
바닥에 새겨진 구궁팔괘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성지한의 진 해체로 인해, 복잡한 문양은 대부분 사라지고.
중앙의 붉은 점과, 이를 잇는 여러 선만 남은 구궁팔괘도.
모양 자체야 간단해서, 해체를 시도하긴 쉬워 보였지만.
‘안에 담긴 힘이 심히 강대하군.’
스으윽.
길가메시가 바닷속에서 손을 움직이자, 그의 몸 주변에 배리어가 생겼다.
배리어가 바닷물을 밀어내자, 대화가 가능해진 그는.
“피티아, 들리는가.”
신안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왜?]
“저 봉인진, 해체하기 쉽지 않군. 네 신안으로 뭐 보이는 것 없나?”
[……글쎄. 중앙을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머진 나도 잘 모르겠어.]
“쯧, 신안도 도움이 안 되는군.”
혀를 찬 길가메시는, 바닷속에서 봉인진을 가만히 주시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저게 문제네.
‘분명 진 안엔 세계수가 있는데…….’
저 강대한 봉인진으로도, 세계수의 생명력은 모두 틀어막을 수 없는지.
붉은 점 안에선 생명력이 은은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게 완전히 개방되어 세계수가 모습을 드러내면.
노화를 막는 건 물론이거니와,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그냥 두고 보기만 할 거야?]
“기다려라…… 어떻게 부지한 목숨인데. 이런 데서 모험을 할 순 없지.”
[이 봉인은 너도 해제 못 하는 거네.]
“거참 시끄럽군! 지금은 힘이 부족할 뿐이다. 흠. 잠깐. 그런데…….”
길가메시는 얼굴을 찡그리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봉인진 옆으로 걸어갔다.
“생각해 보니, 굳이 위험하게 진을 해체할 필요가 없었다.”
[……왜지?]
“여기서 새어 나오는 생명력만 흡수해도, 서서히 예전 힘을 회복할 수 있으니까.”
[저 생명력으로 원래의 힘을 회복하려면,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은 걸릴 것 같은데…….]
“흥, 수백 년이 대수인가.”
길가메시는 피티아의 말에 코웃음 쳤다.
“태초부터 지금껏 살아온 나다. 그 정도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지.”
[…….]
“여기서 생명력을 흡수하며, 성지한 놈이 스스로 붕괴하기만을 기다려야겠군…….”
그러면서 그는 신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런고로, 너와도 작별이다.”
[나눠 줄 생명력은 없나 봐?]
“그래. 힘이 충분했다면 네 몸에 지배의 권능을 새겨놨겠지만. 그럴 여유는 없군.”
[역시…… 그럴 것 같았어.]
피티아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대꾸하며.
스으으윽.
길가메시에게서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제 말이 맞죠? 이 녀석한테 나올 건 없어요.]
“……누,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거지?”
길가메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옆을 바라보자.
“그러게. 별거 없네.”
그곳엔 성지한이 가만히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 * *
성지한이 대체 왜 여기에 있지?
길가메시는 두 눈을 부릅뜨다, 금방 이 의문을 결론내렸다.
“너, 너…… 날 배신한 거냐?!”
[너랑 내가 그렇게 의리 있는 사이는 아니잖아?]
“이 미친 게……!”
꽈악.
길가메시가 급히 주먹을 움켜쥐어, 신안을 터뜨리려고 했지만.
“어허.”
촤아아악!
성지한이 손을 움직이자, 그의 팔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두둥실 떠오른 신안은, 성지한의 근처로 이동했다.
“이, 이놈이……!”
“구궁팔괘도 앞에서 무슨 방법을 쓰나 궁금했는데, 결국 한다는 게 버티기였네.”
무신의 마지막 종 길가메시.
지금까지 추한 모습을 많이 보이긴 했지만, 그가 지닌 권능 천수강신은 연구 가능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세계수에 근접하면, 혹시 이 능력을 새롭게 발현하나 싶어서.
한번 뭐 하나 기척을 숨긴 채 지켜보고 있었는데.
길가메시가 내린 해법은, 결국 성지한이 죽을 때까지 가늘고 길게 쭉 버티는 것이었다.
이런 건 전혀 참고가 안 되지.
“큭…….”
“마지막까지 실망이군, 길가메시.”
뚜벅. 뚜벅.
성지한은 천천히 다가와, 길가메시의 목에 암검을 가져다 대었다.
“지금까지 참 오래 살았지?”
“크윽…….”
“네게 궁금한 건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무신의 다섯 번째 종 길가메시.
그에겐 사실 캐낼 정보가 적지 않았다.
일단 그의 권능, 천수강신부터 시작해서.
태초에 그가 무신과 했던 약속이나, 공허와 연관되었던 일 등.
궁금증을 해결할 실마리는 그가 쥐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이놈은 정보를 줄 테니 살려 달라고 할 텐데, 그럴 순 없단 말이지.’
적의 인자를 지닌 최초의 인류, 길가메시.
그는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히 사라져 줘야 했다.
그래야 이 지긋지긋한 적의 인자에게서 인류가 완전 해방이 되지.
성지한의 검에 보랏빛 기운이 일렁였다.
“이제 그만 쉬어라.”
“자, 잠깐……! 사, 살려다오!”
“네 후손한테 못 볼 꼴 보이지 말고, 그냥 의연하게 죽지그래.”
털썩.
성지한의 말에 오히려, 길가메시는 해저에 무릎을 꿇었다.
“살기 위해선, 뭣들 못 할까……! 성지한, 살려만 다오. 내 이제부터 너를 성심성의껏 돕겠다!”
“뭘 도울 건데?”
“인류를 통치하는 일은, 아무리 관리자가 된 너라 할지라도 시행착오가 있을 터……! 경험 많은 내가 지배권을 확실하게 확립시켜 주겠다.”
“뭔 이야기 하나 했더니, 또 지배냐.”
지배와 생존 욕구.
길가메시가 가장 욕망하는 두 면모가, 죽기 직전에도 드러나네.
“그만 좀 하고 쉬세요 어르신.”
“자, 잠깐……!”
촤아아악!
성지한은 가차 없이 길가메시의 목을 베었다.
툭. 툭.
해저로 떨어지는 길가메시의 머리.
목이 사라진 그의 몸뚱어리는.
스으으으…….
보랏빛 공허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금방 소멸되었다.
[……그가 이렇게 죽은 건가요. 정말?]
“뭐 없는 힘 쥐어짜서 여기까지 온 거니. 제압하긴 쉬웠지.”
길가메시의 죽음을 보고 허탈해 하는 피티아에, 성지한은 가볍게 대꾸했지만.
‘머리는…… 아직도 남아 있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를 곁눈질하고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공허의 기운은 분명 육체가 아니라 목 위 머리에도 적용되었을 텐데, 잘도 버텼네 그래.
성지한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무렵.
슈우우우…….
길가메시의 머리에도 공허의 기운이 피어오르며, 살갗이 완전히 사라지고 두개골도 반 이상 녹아내렸다.
몸과는 달리, 꽤 늦게 적용되는 머리쪽 공허.
[…….]
번쩍.
피티아의 신안도, 그 모습이 이상한지 빛을 반짝이며 이를 바라보았지만.
“자. 길가메시도 죽었으니, 신안 넘겨줘.”
[길가메시가, 죽었다고요…….]
“죽었잖아?”
성지한이 그러며 한쪽 눈을 깜빡이자.
[……그래. 죽었죠.]
피티아는 그리 대답하곤, 성지한에게 반문했다.
[그래서 신안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받으실 건가요?]
“받을게.”
성지한은 그러며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여기에 줘. 근데 신안을 이식하면 너도 죽을 텐데…… 그건 각오한 건가?”
[네. 적의 인자도 사라졌으니, 이제는 좀 쉬려구요.]
그러면서 서서히 이동하는 신안.
빛의 눈은 성지한의 이마에 철썩 붙더니.
번쩍. 번쩍…….
빛이, 성지한의 살갗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럼 성지한, 마무리까지…… 확실히 부탁드릴게요.]
‘마무리’를 언급하면서, 목소리가 미약해지는 피티아.
그리고 성지한의 이마에서 번쩍이는 빛이 줄어들자.
[특별권능, 신안神眼을 이식받았습니다.]
[플레이어에 비해, 격이 낮은 플레이어에게 신안을 받았습니다. 신안의 효과가 크게 감소합니다.]
이식이 되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흠…….’
성지한은 이마 쪽을 만져 보았다.
신안이 분명, 들어오긴 한 거 같은데.
효과가 크게 감소했다는 메시지처럼, 영 힘이 미약했다.
거기에.
‘……발동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네.’
이 눈, 뜨는 방법도 영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거 원, 관리자 되기 전에 받았어야 했나.
‘아니. 관리자가 되지 않았다면, 어차피 그녀도 신안을 주질 않았겠지.’
애초에 이 눈을 받은 것도, 성지한이 적의 인자를 없애서였으니까.
청색의 관리자가 안 됐다면, 피티아는 계속해서 무신을 돕고 성지한과 싸우려 들었을 것이다.
‘뭐, 이건 돌아가서 누나한테 좀 물어보고…….’
성지한은 이마를 매만지던 손을 떼곤.
“야.”
바닥에 있는 길가메시의 두개골을 움켜쥐었다.
“할 거 다 했냐?”
그러면서 그가 두개골을 뒤집자.
뒤집은 면에는, 뼈로 된 작은 사슬들이 여럿 보였다.
“이야. 뼈 상태에서도 천수강신을 쓰네.”
성지한이 감탄한 듯, 이를 바라보자.
꿈틀. 꿈틀.
뼈의 사슬이 허공에서 힘없이 움직였다.
[성…… 지…… 한……! 눈치, 채고 있었나…….]
“당연하지. 몸뚱어리 다 사라졌는데 두개골만 그렇게 남았잖아.”
[으…… 으…….]
“너도 참…… 삶의 의지 하나는 대단하다.”
성지한은 반만 남은 두개골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이거 혹시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벤토리.”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인벤토리를 열은 성지한은.
길가메시의 두개골을 넣었다 빼 보았다.
그러자.
[이, 이놈…… 난 아이템이 아니다……!]
성지한에게 일갈하는 길가메시의 머리뼈.
“오…… 의식이 남아 있구나?”
그놈 참 신기하네.
성지한은 길가메시의 생의 의지에 다시 한번 감탄하고는, 인벤토리에 이를 쑤셔넣었다.
‘저 상태면 급하게 소멸시킬 필욘 없지.’
정보 좀 더 캐내고, 없애도 되니까.
성지한은 그렇게 길가메시를 정리하고는.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구궁팔괘도의 마지막 진…… 지금 진입할까.’
예전엔 힘이 부족해서 못 들어갔지만.
이젠, 충분히 저 안의 힘도 감당할 수 있다.
저 진, 지금 와해시킬까.
성지한이 유심히 진을 바라보고 있을 때.
번쩍!
그의 이마에서, 빛이 번쩍였다.
발동 방법을 몰랐던 신안이.
구궁팔괘도를 주시하자, 제멋대로 빛을 반짝인 것이다.
그리고 나타난 신안의 풍경에선.
‘……뭐야 이거.’
구궁팔괘도 옆에.
성지한의 떨어진 목이 나뒹굴고 있었다.